사람 살리는 폐타이어
  • 김당 기자 ()
  • 승인 1998.08.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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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 안전 시설물로 기능 탁월…비용 적고 사고 예방에도 큰 효과

서울 중계동에 사는 박동렬씨(38)는 1월29일이 두번째 ‘생일’이다. 합정동에서 외국인 전용 관광식당을 경영하는 박씨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이날 새벽 5시 반쯤 집을 나서 승용차로 동부간선도로를 타고 식당에 출근했다. 겨울이어서 안전하게 2차선 도로를 타고 가던 박씨는 티코 승용차에 ‘초보운전’ 딱지를 붙인 여성 운전자가 1차선에서 깜빡이를 켜지 않고 갑작스레 끼여드는 바람에 살얼음이 낀 도로에서 미끄러지면서 철길 교각을 들이받았다. 순간 정신을 잃은 박씨는 인근 위생병원에 실려 갔다가 4시간 반 만에 깨어났다. 16주 진단을 받은 박씨는 아직 오른쪽다리와 골반 사이를 철심으로 고정시킨 채 식당일을 보고 있으나 곧 다리에 박은 나사를 풀 예정이다.

 그런데 박씨는 사고 순간 정신을 잃었다가 병원에서 깨어났기 때문에 자신이 들이받은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었다. 박씨가 들이받은 것은 콘크리트 교각이 아니라 폐타이어로 만든 충격 흡수대였다. 지난해 11월 충격 흡수대 설치이후 3개월 동안 박씨처럼 동부간선도로 중랑철길 교량 밑 충격 흡수대를 들이받은 사고는 4건이나 된다. 그러나 사망자는 없었다. 만약 콘크리트 였다면 박씨도 목숨을 잃었을지 모른다.

 이처럼 폐타이어를 활용한 충격 흡수대나 도로 경계대(중앙 분리대)가 교통 사고 피해와 그로 인한 사회적 비용을 줄이는 데 ‘효자’ 노릇을 하고 있다. 게다가 곤란한 폐타이어를 재활용하기 때문에 말 그대로 꿩 먹고 알 먹는 격이다. 또 설치하기가 간단하기 때문에 다른 도로 안전 시설물에 비해 공사 기간이 짧고, 파손되어도 단시간에 복구가 가능해 교통 사고로 인한 교통 체증 같은 간접 비용을 줄일 수 있다.

 제작 원리도 간단하다. 폐타이어를  3~4단으로 쌓아 2~3열씩 묶어 바닥에 고정시킨 다음 외부에 7㎜ 두께의 폴리에틸렌 커버를 씌우고 미관을 고려해 형광 도료를 칠했다. 그리고 타이어 안팎의 빈 공간에는 충격을 받을 때 완충 작용을 할 수 있도록 모래나 흙을 채워 넣은 것이다. 보기에는 이렇게 간단한 장치가 시속 100㎞로 달리는 승용차가 정면 충돌했을 경우 발생하는 충격을 거뜬히 흡수할 수 있다.

 이처럼 서울 시내 주요 자동차 전용도로에 폐타이어를 활용한 충격 흡수대와 중앙 분리대를 ‘독점 설치’하고 있는 회사는 벤처 기업인 (주)크레모아(대표 강승구)이다. 자동차 구조학을 전공한 강씨는 95년에 폐타이어를 이용한 도로 안전구조물을 특허받아 그동안 서울 시내 주요 도로의 사고 다발 지역 50여 곳에 관할 경찰서의 협조를 받아 무상으로 설치해 왔다.

지자체 · 경찰서 등 다투어 설치
 그런데 각 관할 경찰서가 조사한 사고 발생 사례에 따르면, 충격 흡수대를 설치한 지점에서는 사망 사고가 단 1건도 발생하지 않았다. 용산경찰서에 따르면, 97년 11월3일 0시50분에 관내 사고 다발 지역인 강변북로 서부이촌동 대림아파트 지하차도에서 중앙 교각을 들이받는 사고가 발생해 승용차 운전자는 현장에서 즉사하고 동승한 1명은 병원에서 응급 치료중 사망했다. 그러나 충격 흡수대를 설치한 후인 지난 2월19일과 2월28일에 같은 장소에서 같은 사고가 2건 발생했는데, 둘 다 사고 차량은 반파되었으나 운전자와 승객은 모두 찰과상 정도만 입었다.

 또 마포경찰서도 관내 사고 다발 지역 네 곳에 충격 흡수대를 설치했는데, 1월25일 06시50분께 베스타 승합차 운전자가 강변북로 중앙분리대(마포고 현석동 호수아파트 근처) 앞 충격흡수대를 정면 충돌하는 사고가 발생했는데 인명 피해는 없었다. 또 2월15일에도 같은 장소에서 같은 사고가 발생했고, 1월에도 합정동 절두산성지 갈림길 앞에 설치한 충격 흡수대를 정면 충돌한 것으로 추정되는 사고가 2건 발생했으나, 충격 흡수 시설만 파손되었을 뿐 인명 사고가 접수된 사례는 없었다. 사고 운전자가 사고 이후 멀쩡하게 차를 운전하고 ‘뺑소니’를 쳤다는 얘기이다.

 따라서 관내에 폐타이어를 활용한 도로 안전 시설물을 설치한 지방자치단체나 경찰서는 이 시설물들이 사고 발생시 인명·재산 피해를 줄일 뿐만 아니라 야간 운전자의 눈에 잘 띄고 안전 운전에 대한 홍보를 하기 때문에 교통 사고를 예방하는 데도 상당한 효과를 거두고 있는 것으로 판단해 이를 잇달아 설치하고 있다. 서울시는 최근 개통한 청계고가도로의 진입로마다 (주)크레모아에 의뢰해 충격 흡수대를 20여 군데 설치했으며, 서대문구청도 최근 사고 다발 지역인 금화터널 입구에 폐타이어를 활용한 중앙 분리대를 설치 중이다.

 경찰청이 집계한 교통 사고 통계에 따르면 96년에 교통 사고가 총 26만여 건 발생해 약 1만2천6백 명이 사망하고 35만5천9백여 명이 부상했다. 또 교통개발연구원이 5월에 발표한 ‘교통 사고 비용의 추이와 결정 요인’ 보고서에 따르면, 96년 기준으로 한국의 교통 사고 비용은 총 10조4천4백억원으로 GNP(국민총생산) 대비 2.8%에 해당한다. 이는 단순 접촉 사고를 제외한 인명 피해 사고만을 대상으로 생산 손실 비용·차량 손실 비용·의료비용·관련 행정 비용 및 피해자와 가족들의 겪는 정신·물리적 고충을 돈으로 환산한 PGS(Pain, Grief&Suffering) 비용이 포함된 것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교통 안전 사업은 투자비(비용)에 비해 교통 사고 감소(사고 비용 감소) 비율이 10배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눈앞의 이익을 발생하는 것은 아니지만 투자 대 효과 비율이 큰 고부가가치 사업인 것만큼은 분명하다. 따라서 도로 설계에서부터 안전 시설물에 이르기까지 교통 안전 사업에 투자하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막대한 비생산적인 사회 비용을 줄이는 지름길이다. 폐타이어를 이용한 도로 안전 시설물은 그 중 하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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