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규제 없어야 금융산업이 산다”
  • 장영희 기자 ()
  • 승인 2006.05.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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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정부 금융개혁 시안 2월쯤 나올 듯



 적어도 2월말이면 2000년대 한국 금융산업의 새 질서를 세울 보고서가 나온다. 영국의 금융개혁 보고서인‘윌슨 보고서??처럼 ??박영철 보고서??가 나올 시기가 임박하자 세인의 관심은 이 보고서의 내용에 쏠려 있다.

재무부는 지난해 11월 금융정책 심의기구인 금융산업발전심의회(이하 금발심·위원장 구본호 한양대 교수)에 금융산업 개편에 관해 연구해달라고 의뢰했다. 금발심은 이 과제를 전담할 금융제도개편소위원회 (이하 소위·위원장 박영철 금융연구원 원장)를 구성했다. 이 특별팀에는 박영철 원장, 김병주 교수(서강대·경제학) 등 금융전문가 17명이 참여하고 있다.

소위가 내놓을 개편안이 금융시장에 엄청난 변화를 몰고오리라고 예측하기는 어렵지 않다. “금융산업의 효율성을 높이고 국제경쟁력을 강화하여 새로운 금융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전략으로써, 금융의 자유화와 개방화를 추진??하기 위해서는 금융제도 전반을 뜯어고치는 대수술이 불가피하다.

잇단 땜질 개편으로 누더기 된 금융산업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우선 금융기관의 발목을 잡고 있는 수많은 규제를 대폭 철폐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금리 규제, 내부경영 규제, 업무 규제 등이 상당히 없어질 것이다. 자금운용을 제약하는 정책금융도 크게 축소해야 한다. 금융기관 설립 인가권도 정부가 더이상 틀어쥐어서는 곤란하다. 외국 금융기관과의 경쟁을 위해 합병 등 대형화를 이루는 제도 장치가 마련되고 금융기관 간의 업무영역도 조정될 것이다.

더 큰 변화는 금융제도 자체에서 나타날 것이다. 통화관리 방식이 간접규제 방식으로 옮아가고 금융기관에 대한 감독은 사전에 뭘하면 안된다는 것에서 잘못했을 때 벌칙을 가하는 방식으로 바뀐다. 금융기관의 소유구조에도 변화가 와 기업이 은행을 소유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가계·기업 등 금융기관 이용자는 달라진 세상을 경험할 것이다. 자유화가 진전돼 경쟁체제가 되면 금융기관들은 고객을 끌기 위해 서비스를 개선할 것이다.

소위는 이런 방대하고 복잡한 작업을 사실상 1백여일 안에 끝내야 하기 때문에 강행군하고 있다. 최종 보고서는 6월말에 완성될 예정이지만 시안은 2월말까지 내야 한다. 최종안은 시안을 세부적으로 다듬는 데 불과해 시안이 개편안과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는 게 소위의 말이다. 당초에는 시안 없이 보고서 완성 시점을 6월말로 잡았다. 그런데 최종안과 다름없는 시안을 앞당겨 작성하는 까닭은 새 정부 출범이라는 정치적 일정 탓이다. 소위의 한 위원은 “새 정부가 금융개혁을 내건만큼 출범에 앞서 금융제도 개편에 대한 골간을 알고 싶어하지 않겠느냐??며 일정이 앞당겨진 이유를 설명했다.

재무부가 굳이 정권교체기에 이 과제를 들고 나온 것도 정치적 이유로 설명할 수 있다. 재무부는 3단계 금융시장 개방 일정과 맞물려 금융산업 개편을 더이상 미룰 수 없다는 이유를 들지만 실은 정치권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일 것이다. 정치권에서 구상이 먼저 나와버리면 재무부는 꼼짝없이 이 구상에 따라야 한다. 빨리 복안을 만들어야 한다는 위기의식이 높아진 것이다.

금융산업을 개편하는 일에 대해서는 민자당 정책실과 한국은행도 독자안을 만들고 있지만 소위안이 ‘嫡子??가 될 공산이 크다. 소위의 한 위원은 ??박영철 팀장과 차기대통령의 박재윤 경제특보가 소위안을 새 정부의 금융개혁안으로 수용하는 데 합의한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소위는 각 분야별로 “무엇이 문제인가?? 하는 연구를 끝내고 ??어떻게 풀어나가야 하는가??에 대한 막바지 작업에 들어갔다. 한 위원은 ??자유화 개방화에 대비해 여건을 조성한다는 대전제에는 의견의 일치를 보았으나 그 다음이 문제다. 업무영역 조정, 은행의 소유구조 변경 등 직접적인 이해가 걸린 사안에서 갈등을 겪을 것이다??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이들이 가장 신경쓰고 있는 것은 보안유지다. 보고서가 완성되기 전에 그 내용이 외부로 유출될 경우 엄청난 반발과 압력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소위를 보는 눈길도 곱지만은 않다. “정부가 용역을 주었으니 또 다른 관치금융이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소위의 한 위원은 ??개입이나 압력은 전혀 없다. 일부에서 정부가 복안을 갖고 있으면서 소위더러 들러리를 서게 했다고 보는데 이는 오해다??라며 고충을 얘기했다. 실무 사령탑인 재무부 정덕구 저축심의관은??오얏나무 밑에서 갓끈을 매지 않는 정도가 아니다. 오얏나무 반경5㎞ 내에는 들어갈 꿈도 꾸지 않고 있다??며 소위의 독립성을 강조했다.

금융산업 개편은 새로울 게 없는 해묵은 과제다. 82년부터 시작한 이 논의는 87년까지 말잔치 수준이었다. 책상서랍 깊숙이 처박혔던 이 과제를 재무부가 88년과 90년 다시 꺼내 들었을 때 뭔가 되려나 하는 기대가 높았다. 그러나 금융자금을 많이 가지고 있는 기득권층과 관료집단의 이해관계가 얽혀 또 좌절됐다. 88년 재무부에서 실무작업을 했던 한 국장은 “체계적인 밑그림을 그려보려고 시도했으나 각 국 간에 이해관계가 얽혀 난항을 겪던 차에 장관이 바뀌자 백지화됐다. 모든 개혁이 그렇듯이 최고통치권자의 전폭적인 지지 없이는 이루기 힘들다는 사실을 절감했다??고 털어놓았다.

지난 10년 동안 금융산업 내부에 변화는 꽤 있었다. 시중은행들이 민영화됐고 수십가지 새 상품이 선을 보였으며 단자사가 은행이나 증권사로 전환했다. 그때그때의 필요성 때문에 혹은 개방압력에 밀려 정부는 부분적인 개편을 했지만 체계적인 밑그림은 그리지 못했다. 이런 땜질식 봉합수술로 금융산업은 더욱 누더기옷이 됐다.

기업·국민의 ‘금융만능주의’도 문제

금융산업을 표현하는 말에는 듣기 좋은 말이 없다. 관치금융이니 지시·배급 금융이니하는 말이 늘 따라다녔고, 은행은 전당포와 다름없다고 비판받는다. 우리 경제에서 금융산업은 가장 뒤떨어진 산업이라는 통념이 자리잡았을 정도다. 금융의 낙후성은 금융자산축적 정도를 보여주는 금융연관 비율로 설명할 수 있다. 91년 한국의 금융연관 비율은 4.22로 일본(7.10) 미국(5.23) 대만(4.98)에 비해 크게 떨어진다. 이 밖에 은행원 1인당 생산성 등 한국 금융산업의 비효율과 낙후성을 드러내는 통계는 많다.

금융을 말 그대로 풀이하면 자금의 융통이다. 금융산업은 돈 흐름을 원활히하기 위해 필요한 서비스를 생산해 공급하는 산업이다. 금융산업에 문제가 있다면 금융서비스의 양이 부족하고 질이 떨어진다는 의미다. 소위의 한 관계자는 “금융산업이 낙후한 근본 원인은 금융산업이 시장경쟁 원리에 따라 운영되지 않은 데 있다??고 잘라 말한다. 이는 시장기능에 따라 굴러가야 할 금융을 정부가 꿰어차고 주물렀다는 뜻이다.

개발년대에는 정부가 금융산업에 간여하는 것이 불가피했을지 모른다.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수출 등 특정 부문을 지원하기 위해 금융자금을 몰아줄 필요가 있었고 또 금융산업이 걸음마단계여서 정부의 간여가 오히려 효율적일 수 있었다. 문제는 정부의 관여가 더이상 필요하지 않은 시점에서도 정부의 금융개입이 계속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 깊어졌다는데 있다.

금융을 만신창이로 만든 것은 금융에 대한 그릇된 이해와 환상에도 기인한다. 기업이나 국민은 저축으로 만들어진 금융자금을 재정자금과 동일시해 민간 기업인 금융기관을 정부기관같이 생각한다. 금융은 공공성과 상업성이라는 상반되는 성격을 동시에 갖는다. 이는 금융의 숙명이지만 지나치게 상업성을 무시하면 금융이 제 기능을 못해 공공성도 기대할 수 없게 된다.

한국은행 조사부의 한 관계자는 “우리는 툭하면 금융에 책임을 돌리기 일쑤다. 기업들은 자신의 잘못으로 도산해도 은행이 지원을 안해줘 망했다고 한다. 개인신용을 쌓지 않고 신용대출을 안해준다고 불평하며, 중소기업이나 농어민에 대한 싼 금리의 지원을 권리로 생각한다. 예금할 때는 고금리를 좋아하면서도 대출이자는 싸게 내려고 한다??고 꼬집었다. 그는 또 금융에 대한 그릇된 이해와, 금융으로 모든 것을 풀 수 있다는 금융만능주의가 금융낙후를 부채질했다고 지적했다. 소위의 한 위원은 ??금융산업 개편은 금융의 체질을 효율적으로 바꾸는 작업이다. 이것은 금융을 하나의 산업으로, 금융기관을 하나의 기업이라는 제 위치로 돌려놓는 일이다??라고 말했다.

최각규 부총리는 지난해 말 93년도 업무보고에서 금융개혁을 유달리 강조했다. 개발년대에 시행했던 정부 규제 위주의 경제정책가운데 아직까지 해결 안된 분야가 금융이며, 따라서 이를 개혁하는 것은 새 정부가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과제라고 지적했다. 재무부도 금융제도 개편 문제를 금발심에 의뢰하면서 “세계적인 금융개혁이 부른 금융산업의 본질적 변화와 경제 사회 여건의 급변은 금융제도 전반에 걸쳐 새로운 시각에 기초한 폭넓고 심도있는 개편을 요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부가 이처럼 금융개혁을 부르짖는 것은 금융산업 낙후가 국민경제에 끼치는 영향 때문이다. 소위의 한 위원은 “금융이 제 기능을 못하면 한국이 강력한 산업국가로 올라서는데 결정적 장애요인이 된다??고 잘라 말했다. 가령 섬유산업이 낙후했다고 해서 한국이 부국이 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자동차?반도체 등 다른 산업으로 대체할 수 있다. 그러나 금융 낙후는 그 자체가 한 국가의 경쟁력 확보에 치명적 결함이 된다.

효율지향이냐 안전지향이냐

국민경제는 지불결제 제도라는 금융의 경로를 통하지 않고는 이루어지지 않으며 모든 상품은 화폐로 표시하고 현금 수표 등 금융수단을 통해 결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금융산업에 손을 대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금융에는 실물경제 분야를 구조조정하는 것과는 또다른 어려움이 있다. 금융은 사람의 핏줄에 비유된다. 복잡하면서도 정교하게 얽힌 핏줄을 잘못 건드리면 생명까지 위태롭다. 금융산업을 개편하려면 자유화가 선행돼야 하는데 이는 필연적으로 경쟁을 부른다. 경쟁체제는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지름길이다. 하지만 극심할 경쟁체제는 금융시장을 불안정하게 만든다. 금융기관이 도산할 수도 있다. 금융기관들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돼 있으며 한 금융기관에 돈줄을 걸고 연명하는 기업은 수천개다. 은행이 도산한다면 이는 곧‘신용공황??을 불러일으키고 국민경제를 뿌리째 흔든다. 이른바 ??외부 효과??가 큰 것이다.

게다가 금융산업은 본질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산업이다. 은행들은 단기로 예금을 받아 조달한 돈을 장기로 대출하는 위험부담을 안고 있고, 예금자로부터 받은 빛이 몇십조원에 이르지만 자본금은 수천억밖에 안된다.

소위의 가장 큰 고민은 개편의 큰 틀을 효율지향으로 하느냐, 안전지향으로 하느냐에 있다. 금융산업의 경쟁력을 높이려면 효율성을 추구해야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기존체제를 상당히 깨뜨려야 한다. 안전지향으로 간다면 금융시장에 충격은 덜 주겠지만 개편이 추구하는 목표는 반감된다.

외국의 금융개혁 사례를 봐도 똑 떨어진 해답을 구하기 어렵다. 일본은 7년간 금융개혁에 매달려 지난해 8월 국회에 금융개혁안을 내놓았지만 이 안은 허망하기 짝이 없다. 1백30차례 회의를 하고 금융기관 참고인을 70명이나 부르는 등 법석을 떨었지만 결론은 자회사를 통해 은행과 증권사가 상호진출을 허용하는 정도였다. 극도로 안전성을 추구한 개혁이었다. 반면 영국은 일시에 금융제도 전반을 뒤흔드는 이른바‘빅 뱅??을 했다. 개편 방향에 대해 소위의 한 위원은??일본식도 영국식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소위의 개편안은 일단 많은 금융규제를 철폐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으며 더 자유로운 시장을 만들어 경쟁을 촉진한다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한편으로는 자유화가 부를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데 역점을 두고 있다. 과도한 금리경쟁과 위험한 자금운용을 막을 또다른 규제가 필요하다. 건전성 규제는 강화해야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감독체계를 대폭 수술해야 한다.

금융기관이 도산하는 사태에 대비해 예금자를 보호하는 장치도 강구해야 한다. 금융제도가 유지되려면 금융기관을 믿고 돈을 맡길수 있어야 하며 만일 한 금융기관이 망하더라도 돈을 되찾을 수 있다는 보장이 있어야하는 것이다.

간접규제 방식으로 통화를 관리할 수단을 마련하는 것도 연구과제다. 자유화·개방화가 진전될수록 직접규제를 할 수 없는 까닭이다. 업무영역 조정은‘밥그릇 문제??이기 때문에 금융기관들로서는 최대 관심사이다. 소위의 한 위원은??업무영역 조정은 가장 나중에 결론을 내려고 한다. 은행이 증권 업무를 겸영하지 못하게 막는다는지 하는 높은 벽은 낮아질 것이지만 이익이 상충하는 문제가 두통거리이다??라고 지적했다. 가령 은행업무와 증권업무를 함에 하는 금융기관이 한 고객의 정보를 다른 고객에게 주거나 예금으로 받은 돈으로 부실한 증권을 사는 잘못된 자금운용을 하면 그 피해는 예금자에게 돌아간다. 결국 업무영역 조정의 초점은 한 금융기관으로 하여금 은행업무와 증권업무를 겸할 수 있게 하느냐 여부에 모아진다.

소위는 약화된 은행의 경쟁력을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와 성격이 복잡한 제2 금융권 금융기관을 어떻게 정비할 것인가를 놓고 골머리를 앓고 있다. 산업과 금융 간의 관계를 설정하는 일도 관심거리다. 독일처럼 은행과 기업이 서로 소유하는 구조로 가느냐, 주인 없는 은행을 그대로 놓아둘 것인가, 아니면 주인을 찾아줄 것인가 정하기도 쉽지 않다.

우리는 20년 전에 풀었어야할 과제를 지금 풀려 한다. 늦추면 늦출수록 개혁 내용은 더 급진적이 되어야 하고 개혁 자체가 어려워진다. 비싼 대가를 치르겠지만 금융산업 개편은 더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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