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 산업 “ I M Fine"
  • 소성민 기자 ()
  • 승인 1998.08.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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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 편수 줄었지만 흥행 성공 잇달아 … 정부의 산업 보호 · 지원이 관건

인기 탤런트 안재욱이 옂아 출연해 화제를 모았던 영화 <찜>. 그러나 제작사인 황기성 사단은 <찜>이 한국 영화라는 이유로 톡톡히 설움을 겪었다.

 <찜>이 개봉된 지 2주째 되던 5월 30일 토요일. 충무로의 노른자위 개봉관인 명보프라자가 제작사 모르게 <찜> 대신 할리우드 블록서스터인 <딥 임팩트>를 상영한 것이다. <찜>과 같은 날 개봉된 <딥 임펙트>는 이미 명보프라자 5개 상영관 중 3개관을 점령하여 상영되고 있던 터였다.

 일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명보프라자는 6월1일 월요일부터 <찜>상영을 재개했다가 4대 지방선거가 치러진 6월4일 공휴일에는 다시 <딥 임펙트>를, 그 다음날에는 <찜>을, 그 다음날인 토요일에는 재차 <딥 임팩트> 간판을 내걸었다. 이같은 사실을 알고 자존심이 상한 제작사는 극장측에 항의하고 6월8일 <찜>필름을 회수했다.

 황기성 사단이 판단하기에 <찜>은 서울에서만 20만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한 만큼 3백석 정도의 상연관에서 영사기를 돌기에는 무리가 없는 영화였다. 제작사측 관계자는 “간판을 내리려면 깨끗하게 내릴 일이지, 그런 식으로 변칙 상영할 줄은 몰랐다.”라고 말했다.

 극장측 생각은 달랐다. 명보프라자 책임자에 따르면 ‘홀드오버(hold over)'라 하여 객석 점유율이 주 평균 50%에 미달하는 영화는 1주 만에도 간판을 내릴 수 있는 것이 한국 영화 상영의 관례다. 주말에 영화를 교체한 사실을 제작사에 통보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제작사가 수시로 극장에 연락해 관객 입장 현황을 점검하는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영화 교체 사실을 몰랐다는 것은어불성설이라는 주장이다.

가장 큰 희소식은 ‘완전 등급제’도입
 극장측 책임자는 평일에 한국 영화, 주말에 할리우드 영화를 번갈아 상영한 사실이 잘못되었음을 일부 시인했다. 하지만 이 또한 스크린 쿼터 제도를 준수하면서 극장을 운영하려면 불가피했다고 설명한다. 그는, 올해만 해도 스크린 쿼터 때문에 관객이 잘 들지 않던 <강원도의 힘><투캅스3>등 한국 영화 필름을 빌려다 평일에 잠깐씩 상영했다고 밝혔다.

 <찜>의 변칙 상영은 한국 영화의 현실을 드러내주는 한 가지 예에 지나지 않는다. 지난 7월에는 직배사인 컬럼비아 트라이스타가 강남 지역 개봉관 씨네하우스에서 상영 중이던 한국 영화 <여고 괴담>을 평일로 몰아내고 자기 영화 <고질라>로 주말을 독차지하려다가 여론의 질타를 받은 바있다. <찜>의 예와 비교할 때 <여고괴담> 파동이 크게 불거진 것은 , 어떻게 보면 상영 일수를 정확하게 못박는 지배사의 ‘선진적’ 거래 방식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서울에서만 7월 말까지 75만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할 만큼 ‘대박’을 터뜨린 <여고괴담>조차도 할리우드 괴물 영화의 으름장에 간판을 내려야 하는 것이 7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한국 영화의 현주소이다. 이런 마당이니 21세기는 소프트웨어 산업, 그 중에서도 문화 산업이 국가의 부를 좌우하리라는 경제 전문가들의 전망은 영화인들에게 현실과 동떨어진 공염불처럼 들기기 십상이다.

 그러나 요즘 영화인들은 국제통화기금 체제에서 올 상반기 한국 영화 제작 편수가 19편으로 급감했는데도 전례없는 희망에 차있다. 가장 큰 요인은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획기적인 한국 영화 진흥책을 모색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창작 최일선에서 일하는 감독들에게 가장 큰 희소식은 ‘완전등급제’ 도입니다. 96년 헌법 재판소가 영화 사전 심의를 위헌이라고 결정한 뒤에도, 공연윤리심의위원회를 주축으로 한 보수세력은 등급외 판정을 받은 영화에 대해 상영을 보류하는 기형적 검열 제도인 영화등급 심의제를 유지해 왔다. 완전 등급제가 시행되면 등급외 판정을 받은 영화는 전용관에서만 필림을 돌릴 수 있다(한국에는 아직 전용관이 없다).

 신잔 <까>를 준비하고 있는 정지영 감독은 87년에 찍은 <거리의 악사>를 생각할 때마다 검열의 악몽에 치를 떤다. 여주인공의 집이 재개발 지역으로 묶여 강제 철거되자 어머니가 시름시름 앓다가 병원에서 죽고, 여주인공은 어머니 시신을 화장한 가루를 뿌린다는 내용이 문제였다. 정감독은 재개발 지역 강제 철거 장면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가는 사전 심의에서 걸릴 것 같아, 여주인공 어머니가 일하던 식당 간판이 떨어져 나가는 상징적 장면으로 처리했다. 그런데 검열을 거치고 나온 영화는 식당 간판이 떨어지는 장면부터 어머니가 병원에서 죽는 대목까지 완전히 잘렸다. 관객들은 멀쩡히 살아 있던 여주인공의 어머니가 왜 갑자기 뼛가루로 변했는지 의아해 왔다.

 이럴 경우 감독으로서는 작품을 창고에 처박아 버리고 싶겠지만 ‘자본의 예술’인 영화에서는 이 또한 불가능하다. 정감독은 “우리 세대만 해도 검열에 길들어 상상력이 자유롭지 못하다”라고 털어 놓았다.

 영화인들의 숙원 사업 가운데 현재 정부가 우선 추진하고 있는 것이 전국 극장 매표소의 전산망 구축이다. 문화관광부의 입장권 발매 전산화 시스템이 완성되면 영화관뿐만 아니라 공연장 · 체육시설 등의 모든 매표소에 통합 전산망이 구축된다. 영화 제작자는 온라인 화면을 통해 전국에서 얼마나 많은 관객이 입장권을 샀는지 한눈에 파악할 수 있게 된다.

매표소 전산화가 ‘영화 부흥’ 선결 조건
 영화인들이 극장 매표소 전산화를 원해 온 까닭은, 다음 영화 제작에 재투자해야 할 흥행 수익금이 제대로 환수되지 않은 구조적 비리가 극장 매표소에서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속칭 ‘마와시(표돌리기)’라 하여 극장측이 입장객 수를 속이는 오랜 비리가 서울 · 부산 등 대도시에서는 많이 개선되었으나, 그밖의 지역에서는 여전하다. 매표소 전산화는 탈세를 방지하면서 영화 제작자들에게 정당한 이익금을 되돌려 주는 중요한 시스템이다.

 영화인들이 갈망해 왔지만 정부가 나서서 해결하기 힘든 사업이 전국적 영화 배급망을 구축하는 일이다. 자국 영화의 배급 그물을 짜는 일이 영화산업 발전에 얼마나 중요한지는 일본의 예를 보면 알 수 있다.

 일본의 3대 메이저 영화사인 도호 · 도헤이 · 쇼치쿠는 직접 주요 극장들을 소유하며 일본 적역의 극장들과 체인을 형성하고 있다. 일본의 자국 영화 시장 점유율은 40%를 웃도는데, 이는 탄탄한 배급망을 토대로 자국 영화를 안정적으로 공급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이 종종 한국보다 일본에서 더 늦게 개봉되는 이유는, 일본에서 개봉관을 확보하려면 메이저 영화사들을 통해 일종의 일괄 계약인 ‘블록 부킹’방식을 채택해야 하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는 이미 60년대에 전국적 영화 배급망을 구축하기 위해 정책적으로 메이저 영화사들을 집중 지원했다. 영화사들은 정부의 자금 지원ㅇ르 받아 전국 곳곳에 극장을 신설하거나 기존 극장들을 끌어들여 배급 라인을 형성했다. 아무리 국익을 겨냥한 것이라 해도 일본이 취했던 직접 지원방식은 시장 경제 원리를 무시한 특혜이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가능하지 않다.
 
전국적 영화 배급망 구축 시급
 통상 교섭 본부측이 운을 뗏던 스크린 쿼터 제도 폐지론에 영화인들이 너나없이 반발한(72쪽 기사 참조) 이유도 전국적 영화 배급망이 없는 한국의 현실 때문이다. <찜><여고괴담> 사례에서 드러나듯, 스크린 쿼터 제도마저 없으면 아예 개봉관에 한국 영화 간판을 걸기 힘들 정도이다.

 한국 영화 배급 업계ㅢ 최대 실력자이자 시네마 서비스를 통해 영화 제작에도 활발히 참여하고 있는 서울극장의 곽정환 사장. 그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한국 영화 진흥책이 효과를 발휘한다면 빠르면 3년안에 여러 실력자들에 의해 전국적 배급 라인이 구축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보았다. 그 이전에는 스크린 쿼터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는 스크린 쿼터를 자동차 배터리에 비유하며 “배터리가 없어 시동도 안 걸리는 차를 누가 운전하려 하겠는가”라고 말했다.

 우리와 처지가 비슷했던 멕시코의 사례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멕시코는 93년 미국과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체결할 때 미국측 요구에 따라 스크린 쿼터를 93년부터 단계적으로 축소해 98년에는 전면 폐지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98년이 되자 정반대로 법을 개정해 2002년까지 93년 이전 수준인 30%로 스크린 쿼터를 복구하기로 정책 노선을 선회했다. 스크린 쿼터가 줄어들면서 93년 이전에 60여 편 제작되던 멕시코 영화가 15편 안팎까지 급감해, 시장 좀유율이 5%에도 못 미치는 등 자국 영화 산업이 괴멸 위기에 처하자 이런 조처를 취한 것이다.

 한국 영화를 형식상 1백46일, 실질적으로 1백6일 이상 상영하도록 규정한 스크린 쿼터가 제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한 때는 93년 ‘스크린 쿼터 감시단’(감시단)이 출범하면서부터였따. 감시단 통계에 따르면, 활동 첫해인 93년 전국 1백55개 개봉관들의 허위 공연 일수는 평균 48일, 이것이 지난해 전국 2백8개 개봉관을 조사한 결과 평균 20.5일로 격감했다. 이같은 차이만 보아도 감시단이 활동하기 전까지 스크린 쿼터가 얼마나 유명 무실하게 운영되었는지 알 수 있다.

 스크린 쿼터 제도는 세계 각국이 할리우드 영화로부터 자국 영화 산업을 보호할려고 50년대 말부터 도입한 제도이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이 한국 영화의 전성기였던 66년에 굳이 이 제도를 도입한 것은 외화 수입을 제한함으로써 국민들의 사상을 통제하려는 정치적 목적이 더 강했다.

 한국영화제작가협회(회장 이춘연)는 지난 7월 대통령에게 제출한 건의문을 통해 스크린 쿼터제는 한국 영화가 정부의 진흥책에 힘입어 국내외 경쟁력을 갖출 때까지 최소한 5년은 더 유지되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스크린 쿼터제 5년간 더 유지해야”
 이같은 건의가 수용된다며 아프올 영화인들에게 남겨진 숙제는 우수한 한국 영화를 많이 제작 하는 일이다. 정부는 자본금 2백억원 규모의 영상투자조합과 3천억원 수준으로 조성될 문화산업지원특별자금 일부를 통해 영화 제작을 집중 지원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또 방송법을 개정해 방송 프로그램의 외주 제작 의무 비율을 현행 6.5%에서 5년 이내에 25%까지 향상시켜 영화 제작사의 일감을 늘려 줄 방침이다.

 한가지 다행스러운 점은 소재 제한이 철폐되면서 지난해부터 뛰어난 기획을 바탕으로 제작된 한국 영화들이 속속 흥행에 성공해, 한국 영화의 시장 점유율이 올라가고 수출이 늘어나는 고무적인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69쪽 도표 참조). 바야흐로 한국 영화는 위기속에서 새로운 기회를 맞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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