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의 사랑 감정이입 쉽지 않네
  • 안철흥 기자 (epigon@sisapress.com)
  • 승인 2006.05.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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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의 남쪽>
감독: 안판석
주연: 차승원, 조이진, 심혜진

 
사랑의 판타지는 대개 헤어짐으로써 완성되는 법이다. 이별이 비극적일수록 절실함은 커진다. 하지만 21세기 한국 사회는 사랑의 비극을 그리기에는 여러모로 부적절하다. 메신저와 휴대전화로 실시간 연결되어 있는 연인들에게는 오히려 자기만의 시간이 더 필요할지 모른다. 인스턴트 사랑에 익숙한 요즘 신파적 연애담이 먹히기나 할까. 

스타 드라마 PD 출신인 안판석 감독의 첫 영화는 21세기 한국에서 전통적인 사랑 이야기의 공식을 펼쳐 보일 ‘마지막 틈새’를 발굴해냈다는 점만으로도 일단 점수를 먹고 들어간다. 그의 영화 데뷔작 <국경의 남쪽>은 모든 것의 장벽 너머, 평양에서 시작된다.

오케스트라에서 호른을 연주하는 선호(차승원)와 전쟁승리기념관 안내원인 연화(조이진)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다. 어렵사리 마음을 확인하고 결혼을 약속한 이 남녀에게 갑자기 비극이 찾아온다. ‘조국해방전쟁’에서 인민군으로 장렬히 전사한 줄로만 알았던 선호의 할아버지가 남쪽에 살아 있었다. 그것뿐이 아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와 그동안 비밀 서신을 주고받았는데, 그게 발각되고 만다. 선호 가족에게 남은 것은 북한을 탈출하는 일 뿐이다. 사랑하는 남녀는 훗날을 기약하며 눈물로 헤어진다.

서울에 도착한 선호는 연화를 북한에서 빼내오기 위해 자신이 정착금으로 받은 전재산을 브로커에서 건넸다가 사기 당한다. 이때부터 선호는 돈을 벌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한다. 웨이터 ‘김정일’이 되기도 하고, 신앙 간증에 나선 귀순 용사가 되기도 한다. 몸도 마음도 피폐해가던 어느 날 연화가 평양에서 결혼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삶의 의욕이 꺾여버린 선호는 그를 옆에서 지켜보던 경주(심혜진)의 청혼을 받아들인다. 그렇게 생활인이 되어가던 어느 날, 대규모 탈북 행렬에 끼어 연화가 서울에 나타난다.

영화의 본론은 사실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영화는 철저히 선호의 처지에서 진행된다. 연화는 그를 만나기 위해 결혼식 전날 가족마저 버리고 홀로 탈북을 감행했다. 하지만 선호는 이미 결혼한 몸. 그렇게 그리던 옛 약혼자 앞에 선 선호는 자신의 변해버린 처지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다시 만나게 된 두 남녀, 아니 운명적으로 얽힌 세 남녀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차승원의 연기 변신을 보는 재미는 ‘쏠쏠’

<국경의 남쪽>이 잘 짜인 멜로드라마임에는 틀림없다. 뛰어난 코믹 연기로 고정 관객을 몰고 다니던 차승원의 연기 변신을 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이 영화는 차승원의 첫 멜로 영화 출연작이다. 하지만 <국경의 남쪽>은 사랑의 판타지로서도, 탈북자를 소재로 한 영화로서도 조금씩 아쉽다.

 
선호의 우유부단한 캐릭터는 매력이 별로 없다. 연애에서 탈북, 재회에 이르기까지 선호가 주도해서 풀어가는 이야기가 없다. 그는 단지 던져진 상황에서 아파하고, 갈등하고, 회피할 뿐이다. 또 영화가 두 남녀의 재회 이후로 초점을 맞추면서, 헤어지기 전 연애담이 소홀히 다루어지는 약점은 피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평양에서 둘이 사귀는 장면은 회상 신을 통해 띄엄띄엄 소개된다. 이 때문에 드라마는 매끄럽게 되었을지언정, 관객들이 둘의 연애에 감정을 이입하기는 쉽지 않다.

탈북자들을 우리 사회의 식구로 맞아들였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한국 영화의 한 경계선을 넘어섰다. 하지만 영화는 무겁지도, 진지하지도 않다. 선호 가족들이 베이징 주재 독일 대사관에 진입하기 위해 연습하는 장면은 코믹하기까지 하다. 탈북자들은 남한 사회에 쉽게 정착한다. 멜로드라마에 집중하기 위해 복잡한 현실을 걸러낸 감독의 의도가 이해되지만, 탈북 문제를 본격적인 소재로 다룬 첫 한국 영화라는 점에서 아쉬운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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