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 悳의 안전기획부
  • 김방희 기자 ()
  • 승인 2006.05.08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검은 안경’ 벗고 경제 첨병된다


 민자당의 한 국회의원은 주머니에 동전을 잔뜩 넣고 다니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평상시 공중전화를 주로 사용한다. 자신의 사무실이나 집 전화가 도청당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의원의 경우는 좀 심한 편이지만 대부분의 다른 정치인들도 국가안전기획부(이하 안기부)에 대해 비슷한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다.

 이같은 피해의식이 근거가 없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공중전화를 애용하는 이 의원만 하더라도 안기부 전신인 중앙정보부 출신이므로 누구보다도 정보기관의 생리를 잘 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새 정부가 출범하면서 안기부의 일방적 피해자로만 여겨지던 정치인들의 반격이 시작됐다. 이는 지난 90년 3월 여야가 안기부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기로 합의한 뒤 최초의 일이다. 반격의 강도는 90년 당시보다 더욱 드세다. 안기부 개편 논의를 촉발한 장본인이 金泳三 대통령이기 때문이다.

 한 안기부 관계자는 “최초의 야당 출신 대통령을 모시게 됐다”는 말로 자기들의 처지를 설명했다. 바꾸어 말하면 안기부로서는 정보기관에 피해를 당했던 대통령을 처음 맞이한다는 뜻이다. 김영삼 대통령은 자기가 정보기관이 주도한 공작정치의 피해자라는 점을 여러차례 강조해왔다. 그가 말하는 피해 이력은 69년 초산테러사건에서부터 시작해 90년 여당 정치인으로 변신한 이후까지 계속된다.

 물론 안기부를 개편하라고 요구하는 정치인들의 목소리가 똑같은 것은 아니다. 작년 10월 정기국회 때 정치관계법심의특별위원회 토론과정에서도 국가안전기획부법(이하 안기부법)에 대해서는 여야 간에 시각 차가 컸다. 그러나 안기부를 정치의 영역에 두어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의견이 상당히 근접했다. 미국과 비슷하게 국회 안에 정보위원회를 두어 안기부에 대한 견제 기능을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정치사찰ㆍ‘조정과 보안감사’ 사라질까

 신임 대통령의 대통령직 인수 업무를 보좌했던 대통령직인수위원회(이하 인수위)는 활동기간에 안기부가 정치사찰을 하지 못하게 하겠다고 밝혔다. 취임 직후 취재진과 만난 金 悳 신임 안기부장도 안기부의 정치사찰 중단이 자기를 임명한 대통령의 뜻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44~45쪽 인터뷰 참조).

 정치사찰과 더불어 논란 대상이 되어온 안기부의 직무 가운데 하나는 각 정부 기관에 대한 ‘조정과 보안감사’이다. 안기부는 각 정부 부처와 지방 행정기관에 조정관을 파견하고 모든 국가 기관에 대해 보안감사를 실시해왔다. 또 안기부장을 위원장으로 하고 각 부 장관을 위원으로 하는 ‘정보조정협의회’를 설치ㆍ운영해왔다. 안기부의 이러한 활동은 안기부법 가운데 모호하게 해석될 여지가 있는 규정(제2조 5항 정보 및 보안 업무의 기획ㆍ조정)에 근거한 것이다.

 안기부가 많은 공무원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정부 위의 정부’라는 별명을 얻게 된 것은 바로 이 활동 때문이다. 6공 들어서 안기부는 각급 기관에 조정관을 파견하는 것을 자제하고, 조정관들도 전처럼 드러내놓고 활동하지는 못하지만 아직도 조정과 보안감사로 인한 부작용이 완전히 없어지지 않은 상태다. 중앙정보부에서 17년간 근무했고 현재는 정보기관 출신 국회의원 모임인 양우회 회장을 맡고 있는 金永光 의원(민자당)은 조정과 보안감사 업무가 부작용을 낳는 메커니즘을 이렇게 설명한다. “각급 기관에 출입하는 조정관들은 원래 비밀리에 정보를 수집하고 활동하게 돼 있다. 그런데 조정관이 자기 신분을 밝히면 정보를 수집하고 활동하기가 훨씬 수월해진다. 또 해당 기관에서 일하는 사람이나 지방 유지들은 조정관에게 잘 보여야 할 필요가 생긴다.” 이렇듯 신분을 드러내고 활동하는 과정에서 조정관들은 접촉하는 사람에게 불쾌감을 주고 권력을 남용할 여지가 많아진다는 것이다.

 취임 전 김영삼 대통령이나 인수위는 안기부가 해온 조정과 보안감사 업무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밝힌 적이 없다. 내부적으로는 조정관제도를 폐지하고, 신분증을 안기부내에 두고 출퇴근하게 하자는 방안이 검토됐다. 그러나 이런 방법으로 조정과 보안감사 업무의 부작용을 없앨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권력이 강하면 남용의 여지가 생겨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선거 기간에 간첩단사건으로 타격을 입은 민주당은 아예 안기부의 수사권도 폐지하자는 방침을 굳혔다. 익명성을 가진 정보기관이 수사권을 장악하면 인권 유린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민주당 악법개폐위원회 위원장인 朴相千 의원은 “수사권을 폐지해야 그동안 대통령의 손발 노릇을 했던 안기부가 진정한 정보전담 기구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민주당이 내놓은 안기부법 개정안은 정보전담 기구로서의 성격을 분명히하기 위해 안기부의 이름도 ‘국가정보처’로 바꾸도록 했다.

 

보안정보국 축소ㆍ산업정보국 신설 계획

 이런 논의와는 별도로 안기부는 나름대로 안기부 개편 논의가 본격화할 것에 대비해왔다. 이 책임을 떠맡은 것이 6공 출범후 발족한 ‘21세기발전위원회’이다. 일부 언론은 이 기구가 92년에 생긴 것으로 보도했으나 실은 이보다 훨씬 전이다. 이 기구는 자체적으로 안기부 개편 프로그램을 준비해왔다. 이 프로그램과 관련하여 안기부 관계자들은 “대통령이 요구하기만 하면 당장 제출할 수 있을 정도”라고 말한다.

 안기부가 이처럼 일찍 개편에 대비한 프로그램 작성에 착수하게 된 것은, 이미 6공 초기부터 안기부를 개혁해야 한다는 사회 여론이 높았기 때문이다. 이에 부응하여 당시 신임 裵命仁 안기부장은 큰 폭으로 조직 개편과 인사조처를 단행하기도 했다. 안기부는 그때부터 장기적인 안목에서 어떻게 탈바꿈해야 하는가를 연구해온 것이다.

 대통령 취임 전까지 활동했던 인수위는 안기부의 이런 움직임을 평가절하했다. 인수위 관계자들은 인수위가 발족함으로써 안기부내 21세기발전위원회의 역할은 끝난 것으로 간주했다. 지난 1월 ≪시사저널≫ 취재진은 안기부에 취재 협조를 공식으로 요청한 적이 있으나 안기부측은 “인수위가 활동중”이라는 이유로 거절했다. 신임 대통령과 안기부장의 안기부 개혁 구상이 구체화하기 전에 안기부가 스스로 만든 개편안을 공개해서는 곤란하기 때문이다.

 안기부의 자체 개편안은 아직 베일에 싸여있다. 이에 대한 구체적 내용을 묻자 안기부의 한 관계자는 “공식적으로 아는 게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잘 알지 않느냐”라며 답변을 피했다. 그러나 안기부가 자체 개편안을 확정하기 위해 자문을 구한 외부 전문가들의 말을 종합해 볼 때 개편안의 핵심은 ‘안기부의 역할 조정’이다. 이는 안기부의 기구와 역할을 축소해야 한다는 정치권의 논의와는 차이가 있다. 이 때문에 개편안은 정치인들의 반격에 대비한 ‘방어논리’로 해석되기도 한다.

 안기부 개편안의 핵심은 국내 정치 분야를 담당하는 기구와 인원을 줄이고, 해외 경제정보 수집에 주력하겠다는 것이다(46~47쪽 기사 참조). 이를 위해 안기부 안에서 정치ㆍ정부기관ㆍ언론 등을 담당하는 보안정보국을 크게 줄이는 대신 해외 산업정보와 첨단기술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할 산업정보국을 신설한다는 계획이다.

 안기부가 국내 정치를 멀리하고 해외 경제에 눈 뜨려고 하는 데는 몇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냉전체제가 무너진 후 세계 경제체제가 ‘경제전’의 양상을 띠게 됨에 따라 선진국 정보기관들이 경제전쟁의 첨병역을 자임해왔다는 점이 고려되었다. 옛 소련 국가안보위원회(KGB)는 85년 해외공작을 담당하는 제1총국 안에 서방의 첨단산업과 군사기술 정보를 수집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T국을 설치했다. 현재 해외에 파견된 국가안보위원회 공작원 가운데 상당수가 현지에서 ‘라인X'라 부르는 T국 공작원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이보다 늦은 89년 외국 산업정보를 전담 수집할 특별팀 6개를 구성했다. 미국 중앙정보국은 이 특별팀을 대폭 강화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다양한 분야의 경제전문가를 충원하려 애쓰고 있다. 이밖에도 프랑스 정보기관 등 대부분의 선진국 정보기관이 주요 기능을 바꾸고 있다. 이 가운데서도 특히 한국 정보기관의 ’이상형‘이던 미국 중앙정보국의 변신은 안기부에 큰 충격을 주었다.

 선진국 정보기관들이 해외 산업기술 정보수집에 열을 올리게 된 것은 일본의 성공에 자극받은 것이 분명하다. 일본의 민간기업들은 지난 60년대부터 크고 작은 선진국의 산업기술을 빼내는 데 열중해왔다. 일본 정부와 일본무역진흥회(JETRO) 같은 공공 단체도 산업기술 정보를 수집하는 기능을 점차 강화해왔다. 일본은 국가 차원에서 이들 간에 유기적인 협조체제가 잘 돼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런 일본을 두고 선진국들은 한때 ‘복사기’ ‘무임승차자’라고 비난했지만 지금은 인식이 크게 바뀌었다.

 미국에 망명한 옛 소련의 전 국가안보위원회 간부의 회고록에 따르면, 정보원들이 일본의 한 화학공장을 견학하다가 공정약도를 촬영해 빼냈다. 소련 국가안보위원회는 이 단 한번의 절도로 얻은 이익이 동경에 12년간 주재하는 데 든 경비와 맞먹는다고 평가했다. 이런 매력 때문에 웹스터 미국 중앙정보국장은 지난 90년 한 공개 연설에서 “국제경쟁에서 이기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첨단기술을 스스로 개발하거나 아니면 외국에서 획득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안기부가 스스로 마련한 변신 방향은 적지않은 지지를 받고 있다. 姜慶植 국가경영전략연구원 이사장은 이미 몇년 전부터 경제정보 수집 쪽으로 안기부를 개편해야 한다고 주장해온 사람이다. 강이사장은 “아직도 냉전체제의 잔재가 남아 있는 한반도의 현실을 잊어서는 안되겠지만 정보기관의 역할은 크게 봐서 경제 쪽으로 기울게 돼 있다”고 말한다. 신임 안기부장도 안기부 내의 조화를 최대 목표로 내걸면서 안기부가 마련한 개편 프로그램을 존중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민주당마저 안기부법 개정안에 해외 산업기술 정보수집을 안기부의 새로운 직무로 규정하도록 해야 한다는 방침을 정했다.

 안기부를 잘 아는 일부 인사들은 해외 산업기술 정보를 수집하는 데 신경 쓰기보다는 북한 관련 정보를 수집하는 데 힘을 쏟아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안기부가 국내 정치에 신경을 분산한 탓에 대북한 정보수집 능력이 크게 약화됐다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다 한 의원은 “일본이 해외 산업기술 정보수집 능력이 뛰어난 것은 그것을 주로 민간기업에 맡겼기 때문이다. 안기부는 통일에 대비하는 작업에 더욱 열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안기부가 스스로 마련한 개편안을 효율적으로 실천할 수 있을지 아직 모른다. 해외 산업기술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려면 그 분야에 정통한 고급 인력이 필요하다. 안기부 내에서조차 보안정보와 수사를 담당해온 인원을 해외 산업기술 정보 분야로 돌려 쓸 수 있겠느냐 하는 회의론이 대두되고 있다. 정치 전문가를 경제 전문가로 만들 수는 없다는 것이다.

 안기부가 문민시대에 걸맞게 새로 태어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는 결국 이 보수적인 정보기관의 조직과 인적 구성을 얼마나 바꿀수 있느냐 하는 데 달려 있다. 안기부가 지금까지 대통령의 수족이나 다름없는 통치기구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는 대통령의 의지에 크게 좌우된다. 이와 관련해 이름 밝히기를 꺼리는 한 민자당 의원은 “새 대통령이 멀지않아 안기부를 신뢰하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을 비롯한 중요 임무를 비밀리에 신속히, 그리고 국내외 구분없는 활동무대에서 처리해줄 기관이 안기부밖에 없다는 것을 곧 깨닫게 되리라는 주장이다. 안기부 외부의 인물로 안기부 개편안에 조언했던 한 관계자도 이와 비슷하게 분석한다. “야당 투쟁생활 끝에 여당 대통령후보로 나와 당선된 새 대통령은 3당 합당 이후부터 정보의 위력을 실감했던 사람이다. 그가 정보기관의 소중함을 모를 리 없다.” 이들의 예측이 맞을까. 만약 그렇다면 최근의 안기부 개편논의는 또 한번 스쳐 지나가는 것이 되고 말 수도 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