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사 연구방향 ‘방어’에서 ‘공세’로
  • 김해ㆍ남문희 기자 ()
  • 승인 2006.05.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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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관가야 실체 3세기말 북방계 기마민족”

신경철 교수 ‘가설’놓고 고고학계 대논쟁


 금관가야를 지배한 계층의 무덤으로 알려진 김해 대성동 고분군은 김해시 중심부에서 서쪽으로 약간 떨어진 곳에 있다. 1㎞ 거리에 김수로왕릉과 가야시대의 생활터로 알려진 봉황대 유적이 있어 위치상으로는 이곳이 금관가야의 중심부였을 것이라는 판단을 가능케 한다. 그러나 대성동 고분군의 겉모습은 현대식 아파트들에 빙 둘러싸인 조그마한 구릉에 지나지 않는다. 한 시대를 풍미한 주인공들의 무덤이라고 생각게 할 대형 봉분이나 다른 어떤 상징물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 이곳 땅 속에는 한국 고대사에서 ‘전설적인 왕국’으로 불리는 금관가야의 주인공들이 아직 그 정체가 완전히 파악되지 않은 채 잠들어 있다. 이들의 정체에 대한 의문은 지난 90년 6월부터 92년 3월까지 세차례 발굴 조사를 맡았던 신경철 교수 (경성대ㆍ고고학)가 그동안의 발굴성과에 기초해, 이곳의 주인공들이 3세기말 북방계 기마민족들에 의해 대대적으로 교체되었고, 새로 등장한 기마민족들이 금관가야의 문을 연 주인공이라는 파격적인 주장을 펼침으로써 더욱 중폭되고 있다. 이같은 주장을 계기로 현재 고대사학계에는 금관가야의 실체를 둘러싼 대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금관가야의 실체에 대한 기존의 통념을 뒤엎은 신교수의 주장은 이곳 대성동 고분군을 발굴할 당시 직접 목격한 당혹스러운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지난 70년대부터 경남지역의 가야고분 발굴을 주도해 가야 관련 분야에서는 가장 앞서가는 학자로 알려진 신교수는 그 이전의 가야 고분에서는 발견하지 못한 기묘한 구조에 충격을 받았다. 땅 속에 있는 수많은 무덤들이 서로가 서로를 파괴하는 양상으로 중첩돼 있는 것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뒷시대의 무덤이 앞시대의 무덤을 파괴하는 양상을 띠고 있었다. 앞시대 무덤의 주인공들을 부정하기 위해 계획적이고 의도적으로 자행되었다는 인상을 짙게 풍겼다.

 ‘무덤 파괴’가 집중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3세기말과 5세기초였다. 흥미로운 것은 첫 번째 무덤 파괴가 일어난 3세기말을 전후해 무덤 주인공의 성격이 확연히 구분된다는 점이다. 3세기말 이전 무덤의 부장 유물이 주로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들이고 무기류가 빈약해, 대체로 중국 사서에 등장하는 진한시대의 ‘拘耶韓國’ 사람들일 가능성이 높은 데 비해, 3세기말 이후 무덤에서는 철제창검ㆍ철제갑주(갑옷)ㆍ기마용 마구ㆍ동복(청동솥:기마민족 특유의 이동용 취사도구) 들이 나온 데다, 무기를 구부려서 매장하는 습속이나 순장한 습속으로 보아 북방계 기마민족 계통 사람들의 무덤일 가능성이 높게 나타난 것이다.

 무덤 파괴 현상과 연관시켜 보면 3세기말에 갑자기 등장한 이들 북방계 기마민족이 전 시대의 지배계층을 누르고 새로운 지배계층으로 등장했다는 해석이 가능해진다. 따라서 구야한국 다음에 세워진 금관가야의 주인공은 바로 이들일 것이라는 학설의 물적 근거가 마련된 셈이다.

 김해의 양동리, 동래의 복천동 등 비슷한 시기에 발굴을 진행하고 있던 가야 고분들과 비교해 볼 때 이러한 무덤 파괴 현상이 3세기말 김해 일대의 고분들에서 시작해 점차 주변의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었음이 확인되기도 했다. 이는 3세기말 김해 지역으로 일거에 내려온 북방 계통의 새로운 지배층이 점차 그 주변 지역으로 영향력을 확대해갔다는 것으로 해석됐다.

 그렇다면 3세기말 김해 지역으로 갑자기 남아해온 이들 기마민족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이와 관련해 신교수가 주목하고 있는 집단은 당시 중국 동북 지역에 자리잡고 있던 부여족이다. 그것은, 한국 민족을 형성하는 고대 종족 중 당시까지 순장 풍속을 유지하고 있던 것은 부여족뿐이였고, 무엇보다 대성동에서 발굴한 각종 기마형 유물을 제작한 곳이 당시 부여족이 살고 있던 중국 길림성 일대로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삼국지 위지동이전≫ 같은 중국 사서에는 서기 285년 부여족의 주력이 선비족 계통의 모융씨로부터 공격을 받아 지금의 함경북도 일대에 있던 옥저로 피신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는 부여족의 민족이동설을 뒷받침하는 문헌사료로 평가되기도 했다. 즉 옥저로 피신한 부여족의 주력 부대가 고대사회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자원인 철 생산지로 널리 알려진 김해의 구야한국을 향해 해상루트로 남하했을 것이라는 가설이다.

 신교수는 대성동 고분군 발굴을 토대로 세운 가설을 90년대 이후 경남 일대에서 활발하게 전개한 가야시대 고분 발굴의 성과를 망라해 더욱 체계적인 이론으로 다듬었고, 지난해 5월 김해시가 주최한 국제학술심포지엄, 6월 고려대가 주최한 가야사 관계 국제학술심포지엄에 차례로 제기했다. 신교수의 가설은 이후 학계에 커다란 논쟁점으로 등장했다.

 신교수의 이론에 대한 학계의 반응은 전반적으로 부정적이었다. 반대의견 중 임효택 교수(동의대 박물관장)가 제기한 반론은 저기 가야의 실체를 규명하는 데 대성동 고분군과 비슷한 정도의 비중을 가지고 있는 김해 양동리 고분군에 대한 발굴 성과를 토대로 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임교수가 반박한 요지는, 신교수가 3세기 말에 집중적으로 일어났다고 파악한 무덤 파괴 현상이 양동리 고분군에서는 이미 그 전에도 부분적으로 나타나고 있고, 그 이후에도 똑같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즉 무덤 파괴는 신교수의 주장처럼 새로운 지배계층이 등장했음을 의미한다기보다 당시 가야인들의 장례풍속과 관련된 것이라는 지적이다.

 

3세기말 가야는 격동기

 북방계 기마민족의 유물도 3세기말에 갑작스럽게 나타난 것이 아니라, 양동리 고분군에서는 이미 2세기 말부터 들어왔다는 점이 확인되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북방계 유물이 유입된 것도 새로운 지배계층의 등장에 따른 것이 아니라 기존 지배계층이 필요에 따라 주체적으로 들여온 것이라고 한다. 임교수는 신교수의 주장이 “설득력이 부족하다”고 비판하면서도 북방계 유물이 쏟아지기 시작한 3세기말이 당시 가야에게 격동의 시기였다는 점에 대해서는 공감을 표시하고 있다.

 신교수는 이런 반론에 대해 지배계층의 무덤이 파괴되기 시작한 때는 3세기말부터라는 점, 그리고 북방문물 유입은 교역에 의해서 가능하다 치더라도 당시 다른 동아시아 일대에서는 이미 전시대의 유물로 사라져 버린 순장 풍속이 김해 지역에 갑작스럽게 모습을 나타낸 것은, 이런 풍속을 그때까지 지니고 있던 북방민족이 이동해온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면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고 반박한다.

 이러한 비판과는 별도로 학계가 신교수의 견해에 대해 전반적으로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는 것은, 김수로왕 및 금관가야의 개국 연대를 3세기말로 내려잡고 있는 그 주장의 파격성뿐 아니라, 내면적으로는 신교수의 주장이 1948년 일본의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가 주장한 ‘기마민족정복설’의 논리 구도와 유사한 점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에가미의 기마민족정복설은 국내 학계로부터 ‘제2의 임나일본부설’이라는 비판을 받아왔던 터이다.

 

“우리 시각에서 당시 역사상 재구성하자”

 신교수는 이에 대해 자기의 이론은 김해지역에 대한 고고학 발굴 성과를 토대로 한 것으로서, 고고학적인 뒷받침이 전혀 없는 에가미의 가설과는 별개 이론이라는 입장이다. 그는 “임나일본부설은 가야 지역에서의 유물 발굴 성과로 인해 이미 일본 학계에서도 믿지 않는 분위기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이상 논의할 가치가 없는 임나일본부설에 매달릴 것이 아니라, 유물발굴을 토대로 우리의 시각에서 당시의 역사상을 재구성하는 일이다”라고 주장한다.

 대성동 유물 발굴을 토대로 하여 볼 때 당시 가야와 왜의 관계는 “가야에서 일어난 정치적 긴장이 왜의 정치세력 관계를 뒤흔들어 놓을 정도로 가야가 주도권을 장악한 관계였다”고 신교수는 말한다. 이는 기마민족이 도래한 시기라고 추정한 3세기 말 이후 갑자기 일본 전역의 고분 양식이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으로 통일되었다는 점에서도 유추 해석할 수 있다고 한다. 가야에서 전개된 긴박한 정세에 자극받은 일본의 여러 세력 집단이 여기에 대응하려고 갑자기 결집하기 시작한 결과라는 것이다.

 이처럼 금관가야의 실체에 대한 신교수의 새로운 시작은 그것의 옳고 그름은 차후로 미루더라도, 가야사에 대한 한국 고고학계의 연구 방향이 최근 기존의 방어적인 연구단계에서 ‘역사상에 대한 포궐적 재구성’ 이라는 공세적 단계로 치닫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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