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서방 ‘골칫덩이’카다피의 선택
  • 김춘옥 국제부장 ()
  • 승인 1992.04.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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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통합의 꿈’ 유엔 결의안 대응 관심거리

 1988년 12월21일 오후 7시3분. 프랑크푸르트를 떠난 후 런던에서 마지막 승객을 태우고 뉴욕으로 향하던 팬암항공사 소속의 한 여객기가 런던에서 북서쪽으로 4백42km 떨어진 스코틀랜드 상공을 날고 있었다. 승객좌석에 미리 장치돼 있던 폭발물이 터지면서 곤두박질한 비행기는 록커비라는 작은 마을로 떨어졌다. 승무원을 포함, 대부분이 크리스마스와 연말연시 휴가를 보내기 위해 본국으로 돌아가던 미국인 탑승자 2백59명 전원과 마을주민 11명 등 2백 70명의 생명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로부터 몇 달 안돼 미연방수사국(FBI)은 이 폭발사건이 리비아 국가혁명평의회 의장이자 국가원수인 무하마르 엘 카다피의 지시 아래 일어났음을 입증할 자료를 수집했다. 압델 알 메그라히와 알 아민 피마라는 두 리비아인이 12월20일 트리폴리를 떠나 말타를 거쳐 프랑크푸르트에서 사고 비행기에 탑승한 후 런던에서 내린 사실도 밝혀냈다.

 지난 3월20일부터 유엔 안보리에서는 대 리비아 제재심의가 시작됐다. 팬암 폭파용의자의 신병 인도를 목적으로 한 미국 영국 프랑스의 실력행사였다. 두명의 테러리스트를 인도하라는 미측의 요구에 잘도 버텨오던 카다피 대령은 26일 “유엔 관할의 국제사법재판소의 명령이 없다면 두명의 용의자를 인도할 수 없다”고 다시 강경자세를 보였다. 다음과 같은 발언도 했다. “두 용의자를 무조건 아랍연맹(AL)에 인도하겠다던 23일의 뉴욕주재 리비아 대사의 제안은 정확성을 결여했다”, “두 용의자를 영국이나 미국으로 인도하는 것은 리비아의 주권을 침해하는 일이다.”

 미국이 선거를 의식해서 하는 행동이라는 리비아의 항의도 있으나 미국과 영국 프랑스가 이처럼 강경하게 나오는 것은 ‘국제사회의 골칫덩어리’ 카다피 대령을 표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막의 풍운아’ ‘사막의 使者’. 아랍고유의상에 터번을 두르고 리비아인 모두가 주택을 갖기 전까지 천막에서 살겠다는 약속대로 간이 천막생활을 하면서 절대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그는 지난 23년 동안 서방이 가장 싫어하고 두려워해온 인물이다.

 84년에 런던주재 리비아 대사관 앞에서 총격사건이 벌어졌을 때는 영국인 여성경찰 1명이 사망하고 11명의 시민이 부상당했다. 이 사건으로 영국과는 아직도 단교상태에 있다. 85년 미군이 자주 출입하던 서베를린의 한 디스코테크가 폭발한 것도 리비아 테러단의 ‘현혁한 공과’였다. 89년에는 사하라 사막을 날고 있던 프랑스항공기를 격추시켜 1백71명을 사망케 했다. 팔레스타인 인민해방전선(PELP)과 아일랜드공화군(IRA)에게 리비아는 오래 전부터 무기를 지원해왔다. 서방과 돈독한 관계를 갖고 있는 국가나 정부도 리비아에게는 눈엣가시다. 라이베리아의 반군을 지원해서 친미 사무엘 도정권을 전복시켰다. 과격하기로 소문난 케냐의 테러단체 뫄케냐를 지원해 다니엘 모이정권을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 서방정보통은 수없이 많은 리비아의 행위를 폭로해왔다. 그러나 파르하트 주한 리비아 대사를 비롯해 리비아는 서방의 악의적 선전이라고 거듭 주장하고 있다.

 1969년 9월1일. 이탈리아 식민통치에서 벗어나 18년간 지속됐던 이드리스왕정을 무너뜨리고 무혈 혁명에 성공한 27세의 카다피 대위의 혁명과업은 “이슬람세계의 통합과 이스라엘의 말살”이었다. 그의 알 파티흐 혁명(녹색혁명)은 공산주의라는 正과 자본주의라는 反을 통한 合의 결과였다. “대서양에서 아라비아해까지” 아랍의 통일을 꿈꾸던 나세르지지 시위에 참여했던 이유로 그는 61년 고등학교에서 퇴학당했다. 나세르의 이집트가 영·불·이스라엘로부터 협공을 받았을때였다. “서방제국주의의 침략과 분열정책으로 아랍세계는 갈갈이 찢어졌고, 이스라엘은 제국주의를 등에 업고 아랍통합을 저해하는 장애물이다”라는 확신 아래 그는 정치적 민족주의와 회교신비주의를 결합시키면서 냉전시대의 나세르이념을 국제정세에 적용시켜 왔다.

 그에 대한 리비아 국민의 존경심은 아직은 절대적인 듯하다. 혁명당시의 동지 5명이 혁명평의회 의원으로 아직도 함께 일하고 있다. 아직도 차도르를 걸치고 다니는 아랍국가에서는 드물게 여성의 활발한 정치참여를 유도해 문교장관과 문공차관이 여성이다. 4백만명이 조금넘는 인구 가운데 1백40만명이 무상으로 대학교육까지 받고 있다. 주택보급률 98%에 식량과 철강이 충분한 나라. 카다피는 비동맹·완전중립·평화공존원칙을 표방하여 아랍통합을 8차례나 시도해 리비아 국민의 자존심을 드높여주었다.

 그러나 과거에는 그가 서방의 두려움의 대상이었지만 이제는 그가 서서히 서방 특히 미국을 두려워하는 징조가 보인다. 그 시작은 86년 4월 레이건 대통령이 베를린 사건 보복으로 트리폴리의 그의 거처를 공습했을 때부터였다. 그의 이동거처가 완전파괴됐을 뿐 아니라 조카마저 잃은 이 공습 이후 카다피는 미국이 자신을 테러와 제3세계의 비재래식 무기확산을 응징하는 본보기로 삼으려 하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있다고 워싱턴 전략문제국제연구센터의 허버트 슐러박사는 지적했다. 따라서 카다피는 캠프데이비드협정을 체결해 적국으로 분류했던 이집트와 89년에 국교를 재개하고, 91년에는 마그레브(아프리카 북부 아랍국가 연합)연합의 의장국으로서 아랍세계와의 유대강화에도 앞장섰다. 또 작년 4월에는 미국과의 수교의사를 비쳤다.

 유엔을 앞세운 서방세계의 압력에 굴복해 두 용의자를 인도한다는 것은 그에게 나세르가 주창했던 ‘민족주의’ ‘사회주의적 범아랍주의’의 평생신념을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나세르주의자 카다피가 끝까지 나세르와 같은 인생을 살고자 각오한다면 문제는 다르다. 격동의 인생을 마치기 얼마전 평생의 이념을 수정한 바 있는 나세르는 카다피를 만났을 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당신은 나의 젊은 시절을 회상시킨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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