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같이 달콤한 잠의 비밀
  • 정도언 (서울의대 교수 · 정신과학) ()
  • 승인 1999.09.02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피로 회복 · 중추신경 발달 · 정보 처리 기능…수면장애, 원인 알면 대부분 완치

 열대야가 유난히 길었던 올 여름을 보내면서 사람들은 새삼 편안한 잠의 고마움을 깨달았을 것이다. 잠은 늘 우리 곁에 있기에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막상 수면 장애에 걸려 보시라. 남들 다 자는 한밤중에 머리 속에 불을 환하게 켜놓고 날밤을 새우는 불면증, 반대로 남들은 다 멀쩡한 대낮에도 잠이 쏟아지는 기면병 등등.

 그렇다면 도대체 잠이란 무엇일까. 인간이 잠을 과학적으로 파악하기 시작한 것은 아직 반 세기를 넘지 못한다. 50년대 초 에야 잠이 나름으로 질서와 구조를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78-79쪽 도표 참조). 즉, 잠에는 꿈 꾸지 않는 잠과 꿈 꾸는 잠이 있으며, 꿈 꾸지 않는 잠에는 깊이의 차이가 있어 마치 4층짜리 지하 건물을 내려갔다 올라갔다 하는 모양이다. 그 깊이는 뇌파의 특성에 따라 제 1 · 2 · 3 · 4 단계 수면으로 분류한다.

 꿈꾸는 잠은 렘(REM:rapid eye movement)수면이라 부른다. 렘 수면 상태에서는 눈알이 빠르게 움직이고, 뇌파가 깨어 있을 때와 비슷하며, 힘쓰는 근육들은 풀어져 있다. 렘 수면은 갓 태어난 아이의 잠에서는 50%를 차지하지만, 점점 줄어들어 청소년기 이후 성인의 잠에서 꿈이 차지하는 비중은 20-25%정도이다. 렘 수면은 90분 정도 간격으로 꿈 꾸지 않는 잠과 그 모습을 바꾸면서 하룻밤에 4-6회 나타난다.

 수면 초기에는 깊은 잠, 즉 3 · 4 단게 수면이 많이 나타난다. 그러나 새벽이 다가올수록 꿈 꾸는 잠이 늘어난다. 새벽에 꾼 꿈을 많이 기억하는 것은 깨어나는 시간에서 가깝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때 꾸는 꿈의 양이 많고 ‘농도’가 진하기 때문이다. 물론 꿈을 다 기억하는 것은 아니고, 꿈의 내용이나 심리 상태에 따라 기억하기도 하고 잊어버리기도 한다.

 잠의 기능은 수면의 단계에 따라 다르다. 깊은 잠은 신체 피로를 회복시키기 위한 것이다. 꿈과 연관된 렘 수면의 기능은 나이에 따라 다소 다르지만, 어려서는 중추신경계의 발달과 연관이 있고, 청소년기 이후에는 주로 정보를 처리하기 위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 정신분석학적으로 해석한다면, 나이와 무관하게 갈등과 원망을 심리학적으로 다루기 위한 목적이 있다. 그래서 ‘꿈 해석’이 정신 분석에서 유용하게 쓰이고 있다.

수면제 자주 복용하면 안되는 이유
 수면의학은 발달 초기부터 잠을 찍어내는 방법, 즉 수면다윈기록법(78쪽 아래 사진 참조)을 개발해 연구 성과를 거두어 왔다. 그 덕택에 정상 수면의 오묘함은 물론이고 수면 장애를 구석구석 들여다볼 수 있게 디었으니 신기할 따름이다. 수면다원기록법은 매우 독특하다. 다른 의학적 검사들이 대개 한 가지만 측정하는 것에 비해 매우 종합적이다. 예를 들면, 뇌파 · 근전도 · 안구 운동 · 호흡 · 심전도 · 코골이 · 수면 체위 · 혈액내 산소 농도 등을 찍어낸다. 따라서 기록을 한 장씩 넘길때마다 수면 의학 전문의 귀에는 인간의 잠이 빚어내는 교향악이 재생되어 들려온다.

 인간은 잠 없이는 살 수 없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 주위에는 수면 장애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이 이외로 많다. 수면 장애 중에서 가장 흔한 것은 불면증이다. 불면증은 한 가지 병이 아니다. 불면증이라는 이름 뒤에는 여러 가지 병들이 모습을 숨기고 있다. 가령 남편과 싸우고 나서 생긴 불면증은 원인이 뻔하다. 그에 비해 만성 불면증의 원인은 매우 다양하다. 그래서 수면다윈기록법으로 잠을 찍어 보아야 원인을 자세히 밝혀낼 수 있다.

 대부분의 불면증은 쉽게 낫는다. 잘 낫지 않는 것은 무조건 수면제나 진정제를 복용하기 때문이다. 열이 나는 원인을 밝히지 않고 해열제에만 의존하는 꼴이다. 수면제를 복용할수록 스스로 잠을 청할 수 있는 힘이 줄어든다. 농사 욕심으로 화학 비료를 마구잡이로 쓰면 땅의 힘이 떨어지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우울증 때문에 불면 증상이 나타나면 우선 우울증을 치료해야 한다. 잠들기 전에 다리가 저려서 잠을 못 이루면 다리 증상을 치료해야 한다. 다른 병을 치료하느라 먹고 있는 약물이 불면 증상을 일으켰다면 약의 양을 줄이거나 중단해야 한다.

 불면의 늪에 빠진 사람들은 빼앗긴 잠을 되찾으려고 지나치게 노력하지 말아야 한다. 그럴수록 더 잠이 달아나기 때문이다. 밥을 안먹으면 시장기가 도는 것처럼 잠을 못 잤으면 당연히 졸려야 한다. 여러 날 밤을 새고도 잠이 오지 않는다면 ‘노력하면 노력할 수록 나빠지는 악순환’의 고리에 걸렸다는 증거다. 이럴 때는 정신을 가다듬고 빨리 수면의학 전문의를 찾는 것이 비법이라면 비법이다. 불면의 고통은 자살하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심할 수 있지만 제대로 치료받으면 쉽게 낫는다.

 잠이 안와서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잠이 너무 쏟아져서 어려움을 호소하는 사람도 많다. 대표적인 병은 기면병이다. 기면병 환자의 잠은 마치 방에 달린 전깃불을 끄는 것과 같다. 잠이 갑자기 어둠처럼 쏟아져 스스로 조절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길을 걷거나 운전을 하다가, 회사에서 결재를 하다가, 보초를 서거나 수능 시험을 보다가, 심지어 성행위 중에도 잠들어 버린다. 주위 사람들로부터 게으르다. 잠이 많다, 의지가 부족하다고 손가락질 당하기 쉽고, 학생이라면 선생님에게 야단 맞는 단골이 되기 십상이다.

코골이 중에 숨 7백-8백 번 멈추는 사람도…
 기면증의 또 하나 특징적인 증상은 탈력 발작이다. 힘쓰는 근육의 힘이 갑자기 풀어져 주저앉거나 얼굴 표정이 풀려 버린다. 대개 웃거나 놀라거나 화날 때나타나며, 그 원인은 꿈 꾸는 잠의 특징인 근육 풀림이 대낮에 촉발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고통인 병이지만 약물 치료를 하면 정상 생활을 할 수 있어 조기 진단이 중요하다.

 코골이에 동반되는 수면무호흡증 역시 사람을 졸리게 만든다. 코를 골면 깊은 잠이 방해받고 산소 공급이 떨어지므로 피로가 회복되지 않기 때문이다. 코골이를 놀림감으로나 생각하는 사회는 이미 의료 선진국이 아니다. 코를 심하게 고는 사람들에게서 심장과 혈관 게통의 장애, 즉 뇌졸중 · 고혈압 · 심근경색 등이 더 흔하게 나타난다는 것은 의학 교과서에 나오는 사실이다. 수면다윈기록법으로 검사해 보면 하룻밤에 무려 7백-8백 번 숨을 멈추는 사람도 적지 않다.

 수면무호흡증 치료는 어떻게 할 것인가. 환자들이 숨쉬는 길은 오래된 빨대처럼 자꾸 음압이 걸려 꺾인다. 따라서 제일 보편적이고 효과적인 치료 방법은, 가정용 의료기를 이용해 숨쉬는 길이 막힘 없이 통하도록 양압을 걸어주는 방법이다. ‘코골이 수술’은 코골이를 줄이는 효과가 미약하다. 치과에서 시술하는 구강내 장치 역시 보조적 방법이다.

나쁜 잠버릇 치료하려면
 수면 중에 마치 축구라도 하듯이 다리를 자꾸 떨어 잠을 깊이 못 들거나 깨어나는 병도 있다. 다리 근육을 반복적으로 수축시키는 병으로 빈혈 · 요독증 · 임신 중에도 나타나는데, 대개는 원인을 잘 모른다. 잠이 들기 전에 종아리 깊은 쪽이 미묘하게 가려워서 잠을 못 이루는 병도 있다. 모두 약물 치료로 호전시킬 수 있다.

 잠이 들면 나타나는 이상한 증상들도 있다. 악몽 · 야경증 · 몽유병 · 이갈이 등이다. 중추신경계의 발육이 미숙한 아이들에게서 잘 나타난다. 자라면서 대개 없어지지만, 청소년이나 어른이 되어서도 이같은 증상이 나타나면 본격적인 치료가 필요하다. 어린이에게서도 증상이 너무 심하거나 자주 나타나면 치료해야한다. 수면다원검사를 해야 어느 수면 단계에서 어떤 식으로 나타나는지를 자세히 알 수 있다.

 어른에게서 주로 나타나는 병으로 렘 수면 행동장애가 있다. 꿈 꾸는 잠인 렘 수면에서는 정상적으로 힘쓰는 근육들의 힘이 풀리기 때문에 어떤 내용의 꿈도 행동으로 옮길 수 없다. 그러나 병적상태에서는 꿈에서 근육의 힘이 남아 있어 꿈이 보호 장치 없이 행동화한다. 예를 들어 강도와 싸우거나 강도로부터 도망가는 꿈을 꾸다가 이를 행동으로 옮긴다면 자신이나 옆자리 배우자가 다칠 것이다. 심한 병이지만 진단만 내려지면 약으로 조절 할 수 있다.

 생체 시계 문제 때문에 고통을 받기도 한다. 흔히 겪는 것은 장거리 비행에 따른 시차 장애이다. 서울에서 뉴욕으로 가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뇌속의 생체 시계각 비행기 속도를 따라잡지 못해, 대낮에 뉴욕에 내렸지만 몸은 아직도 한밤중이니 졸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멜라토닌을 며칠 동안 사용해서 극복 할 수도 있으나, 그보다는 도착지에서 낮 시간에 햇볕을 쪼이고 기를 쓰고 돌아다니는 것이 약을 쓰는 것보다 좋다.

 생체 시계의 문제점 중 또 한가지는 수면 각성주기가 지연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밤 10시에서 아침 6시가 취침 시간인데, 어떤 사람은 오전2시가 되어야 잠이 오고 아침 10시까지 자야 피로가 풀린다. 이런 사람들을 치료하기 위해 요즘 쓰는 최신 방법은 5000룩스 이상의 강렬한 빛을 아침 이른 시간에 1시간정도 쪼여 생체 시계의 리듬을 앞으로 당기는 것이다. 이것을 광치료라고 한다.

청소년의 수면 부족이 학교 폭력을 부른다?
 수면의학이 수면 장애 진단과 치료에만 공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청소년들이 충분한 잠을 자고 있는지에 관한 본격적이고 체계적인 연구가 미미하다. 초등학교 · 중학교 · 고등학교로 갈수록 등교는 일찍, 하교는 늦게 한다. 게다가 컴퓨터 게임이나 인터넷처럼 청소년들이 밤잠을 설치며 할 수 있는 흥미로운 일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 결과 한참 성장기인 청소년들의 수면이 상대적으로 박탈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문제는 잠을 자는 중에 성장 호르몬 분비가 제일 활발하다는 것이다. 그 외에도 잠을 조절하는 생체 시계는 호르몬 분비 및 면역 체계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청소년들의 수면이박탈되는 것이 점증하는 학교 폭력이나 청소년 범죄와 전혀 무관할까. 이 질문에 대해서는 아직 아무도 대답할 수가 없다.

개인의 수면 건강, 국가 경쟁력에 도움
 선진국에서는 이미 수면의학이 의학의 영역에만 ‘고고하게’ 머물러 있지 않고 경제적 · 사회적 · 국가적 논점이 되었다. 미국은 90년대 들어 국립수면연구원을 설립해 수면의학을 산업 경쟁력과 국방력을 높이기 위한 도구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막대한 연구비와 시설 투자가 병행되고 있음은 물론이다.

 구체적인 예로 광활한 미국 대륙을 횡단하는 대형 트럭 운전자들의 수면을 연구해, 사고를 예방하고 물류 손실을 방지하는 대책을 마련 중이다. 교통 사고 발생률을 줄이기 위해 운전자들의 수면 장애를 대규모로, 쉽게 진단하는 방법도 강구하고 있다.

 그러면 국내 사정은 어떠한가. 교대 근무자의 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는 산업화 과정에서 교대근무를 어떤 방법으로 해야 하는지에 관한 산업계의 관심조차 미미하다. 인사 관리자나 근무자편의에 따라 작성된 교대 근무 방식이 과연 근무자의 건강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가에 관해 전혀 논의가 없는 것이다. 고속도로 등에서 일어나는 교통 사고는 대개 운전자 과실이나 차량 정비 불량을 원인으로 삼을 뿐, 아무도 운전자의 수면 장애에 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수면의학은 매우 중요하다. 개인의 수면 건강뿐 아니라 산업 경쟁력과 국가 경쟁력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21세기 한국의 입장은 무엇인가.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