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S 한글코드 교체 움직임
  • 남문희 기자 ()
  • 승인 1992.04.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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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준 ‘완성형’을 실용 ‘조합형’으로…문화부 공식 제안

 컴퓨터를 처음 샀을 때 먼저 확인해 볼 게 있다. 컴퓨터 자판으로 ‘똠방각하’를 두들겨 화면에 ‘똠’자가 나타나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똠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일단 KS제품을 산 게 된다. 즉 국가에서 인정하는 정품을 샀다는 얘기다. 그러나 앞으로 다음과 같은 일을 감수해야 한다. 컴퓨터에서 한글을 2천3백50자밖에 사용할 수 없다는 현실이다.

 지난 87년 개정돼 그 뒤 정부가 컴퓨터에서 사용할 KS표준 한글코드로 지정한 KSC56001-1987에는 한글이 완성된 글자로 2천3백50자 들어 있다. 현대 한글로 사용할 수 있는 글자 수가 이론적으로 초성 19자, 중성 21자, 종성 27자를 서로 곱한 1만1천1백72자라고 하니 사용가능한 한글의 20%밖에 들어있지 않은 것이다. 나머지는 4천8백88자의 상용한자와 1천1백28자의 특수문자가 들어있다. 따라서 KS표준 코드만 지원되는 컴퓨터를 산 사람은 싫으나 좋아나 이 범위 안에서 문자 생활을 해야 한다.

한글 20%밖에 들어 있지 않은 ‘완성형’
 한글코드를 표준화하려는 움직임은 이미 80년대초부터 있어왔다. 기존의 표준시안을 87년 개정해 만든 것이 KSC5601이다. 당시만 해도 문자 수의 제한이 그다지 큰 문제로 대두되지 않았다. PC 보급이 그리 많지 않은 상태였고 사용분야도 한정돼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80년대 후반 이후 PC 보급이 1백50만대까지 확대되고 사용 범위도 넓어지면서부터 문제점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시인이 컴퓨터를 사용해 시를 쓸 때 의성어 의태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려 해도 KS코드에서는 이것이 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다. 또 소설가가 컴퓨터로 소설을 쓸 때 각 지방의 독특한 사투리를 구사하려고 하는데 역시 해당 글자가 나타나지 않는다. 이러한 사례는 의성어나 의태어 방언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지난 90년 월드컵 때 독일 축구선수 중 ‘푈러’라는 선수가 있었다. 그런데 신문사의 CTS 시스템에서 지원하는 한글에는 ‘푈’자가 들어 있지 않아 당시 신문사들에서 조그만 소동이 일어났다고 한다.

 문자를 주로 상대해야 하는 인쇄 출판 언론 등의 분야에서 빠진 글자가 나타나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안 나오는 글자는 따로 사식글자를 따붙여야 하기 때문에 별도의 시간과 비용이 든다. 최근에는 KSC5601이 KS 표준코드라는 이유 때문에 이를 지원하는 컴퓨터 업체들이 점차 늘어나는 추세여서 이런 문제는 더욱 심각해질 전망이다.

 KS코드 문제는 글자 수가 부족하다는 데 그치는 것만은 아니다. 더 큰 문제는 이것이 한글 소프트웨어 산업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는 점이다. 컴퓨터에서 한글을 사용하는 원리는 크게 두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현행 KS코드처럼 완성된 글자에 코드값을 부여해 컴퓨터에 저장해두는 방법이다. 이를 완성형 한글코드라 한다. 또하나는 초성 중성 종성에 코드값을 부여하고 한글의 글자구성 원리인 모아쓰기 규칙을 컴퓨터에 입력해놓는 방법이다. 이를 조합형이라 한다.

 그런데 현재의 KS코드처럼 완성형 한글이 문제가 되는 것은 한글관련 소프트웨어의 개발이나, 최근 활발하게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 인공지능 컴퓨터 분야에서다. 예를 들어 요즘 개발이 한창 진행중인 한글 철자검색기의 경우를 보자. 철자검색기란 컴퓨터가 스스로 틀린 글자를 바로잡을 수 있도록 고안된 소프트웨어이다. 자판을 잘못 두드려 ‘학교는…’이라고 써야 할 것을 ‘학교은…’이라고 쳤다고 해보자. 이것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받침없는 글자 뒤에는 ‘는’이라는 조사가 와야 한다는 사실을 컴퓨터가 알고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초성 중성 종성에 대한 정보와 함께 이것이 어우러져 하나의 글자가 되는 원리가 컴퓨터에 입력돼 있어야 한다. 조합형 한글코드에서는 이것이 가능하나 완성형 한글코드에서는 불가능하다.

 인공지능 컴퓨터 분야에서도 마찬가지 일이 일어난다. 인공지능 컴퓨터 중 한글과 관련된 분야는 한글을 영어나 일본어로 자동번역하는 기계번역시스템, 사람의 말을 이해하고 발음하는 음성인식과 합성, 필기체 글자를 읽어내는 문자의 인식과 합성 등이다. 음성인식 분야를 예로 들어보자. 우리말의 ‘독립’은 발음할 때는 ‘동닙’으로 된다. 컴퓨터는 이 말을 다시 ‘독립’으로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앞글자의 받침 ㄱ과 뒷글자의 첫소리 ㄹ이 부딪치면 자음접변 형상에 의해 발음이 바뀐다는 사실이 이미 입력돼 있어야 한다. 즉 字□에 대한 정보와 이것의 결합규칙이 컴퓨터에 미리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도 조합형은 이것이 가능하지만 완성형은 마찬가지로 불가능하다.

한국만 국제표준 따라 ‘한글 특성’ 무시
 이밖에도 완성형으로 한글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면 개발과정이 복잡해져 결국 소비자가 그 비용을 부담하는 등이 문제가 발생하고, 반면 코드 체계가 비슷한 일본의 소프트웨어가 손쉽게 국내시장에 진입하는 문제가 발생하기도 한다.

 따지고 보면 사실 문제는 간단하다. 한글을 부분적으로밖에 사용할 수 없고 또 훈민정음의 창제원리에도 맞지 않는 완성형 한글코드 대신 조합형 한글코드를 KS표준으로 제정하거나, 아니면 완성형과 조합형 두 개의 코드를 복수로 KS표준으로 제정해 사용자의 선택에 맡기면 되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이미 오래 전부터 전문가들 사이에 계속 제기돼왔다. 그러나 그동안 이것이 묵살돼 온 것은 처음 KS표준을 결정할 때의 판단착오를 인정하기 싫어하는 관계 당국이나 관련자들의 자존심 때문이라는 지적이 많다.

 현재 KS코드로 지정돼 있는 KSC5601은 제정 당시에 두가지의 뚜렷한 목표가 있었다. 하나는 국가간의 정보통신에 사용될 수 있는 통신용코드를 만들자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당시 정부에서 추진중인 행정전산망에 쓸 수 있는 한글코드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문제가 복잡해진 것은 국제간의 정보통신용에 쓸 목적으로 만든 한글코드를 개인용 PC의 정보처리용으로, 그것도 KS 표준코드로 지정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KS코드로 지정되게 된 것은 국내 표준코드와 국제표준코드는 서로 같아야 한다는 일부 관계자들의 집착과 당시 정부에서 추진중이었던 행정전산망 코드로 이것을 채택했기 때문이다.

 KS코드 비판론자들은 바로 이 과정에서 판단이 잘못이 있었다고 지적한다. 예를 들어 미국이나 일본 같은 경우에도 국제코드와 국내코드는 같지 않은 게 일반적인 현실이다. 현재 국제 표준코드로 사용되고 있는 것은 84년 이후 ISO(유엔 산하 국제표준화기구)에서 채택해 쓰고 있는 ISO-2022지만 실제로 미국이나 일본 내에서 이 코드 자체가 사용이 불편해 별도의 코드를 만들어 쓰고 있는 형편이다. 우리나라만 한글 특성을 무시하면서까지 국제표준을 따르려다 보니 현재와 같은 문제점을 낳게 됐다는 지적이다.

 또하나는 행정전산망용으로 쓰이는 한글 코드에 굳이 KS표준이라는 지위를 부여할 필요가 있었는가 하는 의문이다. 행정전산망에 쓰이는 한글은 그다지 많은 글자가 필요하지 않아도 되게 때문에 따로 행정전산망용 코드를 하나 정해 사용하면 그만이다.

 KS 표준코드가 확산되면 될 수록 이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높아져갔다. 지난 89~90년에는 신문지상이나 컴퓨터 전문잡지 등을 통해 완성형 주장자들과 조합형 주장자들 사이에 치열한 지상논쟁이 전개되기도 했다. 완성형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대게 공업진흥청 체신부 등 표준코드 제정에 깊이 관여했던 부처들과 이의 제정과정에 참여했던 교수 및 코드 전문가들이고, 조합형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일반 PC사용자·컴퓨터 프로그래머·국어학자·인공지능형 컴퓨터 개발자 등 주로 민간의 PC 사용자와 연구자를 중심으로 구성돼 있다.

 정부부처에서도 문화부가 생겨 어문정책을 담당하면서부터 조합형 코드로 KS표준이 다시 제정돼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특히 초대 문화부장관으로 컴퓨터에 해박한 이어령씨가 임명되면서 이런 움직임은 활발하게 전개됐다. 3월 31일 문화부는 2년간의 연구결과를 토대로 KS표준을 조합형 한글코드로 바꾸자고 공식으로 제안했다. 앞으로 5월중에는 공청회 등의 방식을 통해 이 제안을 공론화할 방침이다.
 
관계당국 ‘체면’ 때문에 고수할 수도
 지난해 말부터는 완성형과 조합형을 둘러싼 대립구도에도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최근 세계적으로 국제 표준코드를 새롭게 제정하려는 움직임이 본격화되면서 기존의 KS 완성형코드를 더 이상 고집할 명분이 없어졌다는 점과 완성형코드를 주장하던 사람들 중에도 상황변화를 인정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전반적인 대세는 조합형코드 쪽으로 기울고 있는 상황인데, 이런 사정을 극명하게 보여준 것이 지난 3월13일부터 15일까지 서울 교육문화회관에서 열린 한글코드 관련 워크숍이었다.

 이 모임은 ISO의 국내 기구인 JTCL(연합기술위원회·의장 한국과학기술원 전길남 박사) 산하 ‘한글코드전문가 소모임’ 주최로 ISO에 제출할 새로운 코드시안을 확정하기 위해 이루어졌는데, 투표결과 조합형의 원리를 바탕으로 한 ‘정음형 코드체계’가 압도적인 표차로 최종시안으로 확정됐다.

 그러나 이 전문가 소모임의 결정사항이 최종안으로 채택되기 위해서는 앞으로 JTCL 및 공업진흥청의 정보산업부회 등 넘어야 할 벽이 많은 실정이다. 특히 이런 결정 과정에 열쇠를 쥐고 있는 공업진흥청의 경우, 조합형 한글코드가 우수하다는 점을 내심 인정하면서도 그동안의 체면 때문에 기존의 KS 완성형코드를 고수하려 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대두되고 있기도 하다. 만약 그럴 경우 조합형 한글코드를 강력히 주장하는 세력과 일대 격돌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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