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계‘주권 선언’
  • 노순동 기자 (soon@sisapress.com)
  • 승인 1999.09.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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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비정부기구‘문화 개혁을 위한 시민연대’출범

한국 최초의 문화 비정부기구(NGO)가 떴다.‘모이지 않아서 얻어진 것은, 자유라기보다는 일종의 공백 상태이다. 그 공백을 점령하는 것은 획일을 강요하는 문화, 상업적 이윤을 관철하는 문화다.’(성기완, 시인 · 대중음악 평론가)

  지난 9월18일 출범한‘문화 개혁을 위한 시민연대’(문화연대:공동대표 도정일 · 이문구 · 조세희 외)의 취지를 드러내는 말이다. 출범식이 열린 기독연합회관에는 문화계 명망가들이 설레는 표정으로 모여들었다. 소설가에서 건축가까지, 현장 활동가로 이름을 날리던 이들부터 이론가까지 망라했다. 민예총 등 기존 문화 단체가 문화 이전의 시대, 즉 문화보다 정치가 급박했던 시절 큰 몫을 해왔다면, 문화연대는‘문화 발전’을 사회적 의제로 끌어올리겠다는 포부를 갖고 있다. 조직표도 다르다. 장르별 창작자 모임이 아닌 시민 운동 기구이기 때문이다. 발기인은 총 2백96명, 창작자 · 기획자뿐 아니라 일반 시민까지 회원으로 삼고 있다.

문화연대, 정부의 반개혁적 행태 맹공
  연대 기구의 필요성이 처음 제기된 것은, 지난 5월로 거슬러올라간다. 영화계에는 스크린 쿼터 축소를 둘러싼 위기감이 커지고 있었고, 민 · 관 갈등에 치여 광주비엔날레가 홍역을 치르던 때였다. 스크린 쿼터 비상대책위원회와 광주비엔날레 비상대책위원회는 대책을 숙의하면서 공동 대응할 필요성을 절감했다. 두 사안에 고루 관여했던 심광현 교수(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 미술 평론)가 핵심 활동가로 뛴 것은, 이런 배경 때문이다(왼쪽 상자 기사 참조).

  준비 과정에서 정부에 의해 진행된 일련의 문화계 인사는 누적된 불만에 기름을 부었다. 문화연대는 출범 일성으로 이에 대한 분노를 터뜨렸다. 지난 11일 가진 발기인대회에서 반개혁적인 문화단체장 인사에 대해 비난 성명서를 발표하면서 박지원 문화관광부장관 퇴진을 강도 높게 요구한 것이다.

  이와 관련해 문화부 공보관이 공개적으로 불만을 표한 것은, 문화계와 담당 부처 사이에 시각차가 크다는 점을 여실히 드러낸‘사건’이었다. 공보관은 기고문을 통해‘30년의 행정 경험을 갖춘 사람이 전문가가 아니면, 누가 전문가인가. 그들의 경험과 식견을 활용하는 것이 국가적으로 도움이 된다’라고 주장했다.

  발기인으로 참여한 이들의 목소리에는 다양한 문제 의식이 담겨 있다. 무엇보다 문화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세간의 분위기가,‘과시성 행사’가 폭주하는 것으로 이어진 현상이 못내 못마땅한 기색이다. 화가 주재환씨는“모래 위의 집과 다름없는 각종 엑스포를 보라.‘새 천년’‘밀레니엄’어쩌고 하면서 얼치기 문화 거간꾼의 허영을 위한‘삼페인 사업’에만 돈뭉치를 쏟아붓고 있다”라고 개탄했다.

  조혜정 교수가‘문화 정의’가 필요하다고 역설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그는“70년대에는 정치 정의가, 80년대에는 경제 정의가 논의의 초점이었다면 지금은‘문화 정의’에 관한 논의가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문화 정의란, 참여를 전제로 한다. 그런 점에서 조교수는‘관 · 조직 · 상업 자본’이라는 말만 나오면 무조건 귀를 막는 문화계의 타성도 고쳐야 한다고 말한다. 문화의 공공성을 깨닫는다면, 문화패도 좀더 똑똑하고 부지런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분야에서는 개혁을 흉내라도 내고 있지만, 유독 문화 영역은 사각 지대에 방치되어 뒷걸음질치고 있다는 위기감도 크다. 창립대회에참여한 김혜준씨(한국영화연구소 정책실장)는, 그동안 견제력을 발휘하지 못한 문화계의 무능을 꼬집었다.‘전문가’라는 미명 아래 전임 관료를 문화 단체장으로 내려보내는데도 이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크지 않았던 탓에 문화부가‘관행’을 고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구체적인 시민의 권리를 찾아주는 일이 급선무라는 지적도 나왔다. 이는 문화연대가 내세운‘나의 문화 환경을 확실히 바꾸자’는 표어와도 일치한다.

권력을 금기시하면 엉뚱한 권력에 휘둘린다
  앞으로 문화연대는 걸림돌이 되는 제도와 법규를 고치는 작업에 역점을 두고, 시민이 겪는 일상적인 불편함을 없애는 데 주력할 계획이다. 이를테면 △이중삼중으로 부담하는 국립공원 입장료 △쥐꼬리 만한 도서 구매 예산 △터무니없이 비싼 사진 기자재 소비자가격 등을 개선하는 일과 △경복궁내 경찰 시설 이전 △사간동 국군통합병원 부지를 이전하고, 이지역을‘박물관 구역’으로 만드는 일 △인사동을 평일에도 차 없는 거리로 만드는 일 등이 문화연대의 일거리다. 엉뚱한 곳에 돈을 쓰는것만 막으면 예산을 늘리지 않고도 문화 행정의 효율을 높일 수 있다는 문제 의식을 가지고 예산 씀씀이에도 적극 관여할 계획이다. 이에 따라 출범하자마자 국회 문화관광위원회 감시 기구로 이름을 올려놓았다.

  지금 문화계는, 권력을 금기시하다 보면 엉뚱한 권력에 휘둘리게 된다는 것을 절감한 기색이다. 문화연대에 조건부 지지를 보내는 문화 평론가 서동진씨가 대표적인 예다. 그는“데카당한 문화 예술인에게 문화 NGO란 기것해야 시류를 타보려는수작에 지나지 않을지 모르지만, 문화연대가‘연대해야 할 벗’을 제대로 찾는다면 제 몫을 다할 수 있다”라고 말한다. 새로운 권력은 시민으로부터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魯順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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