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야스 · 캉캉… 그 선물을 아십니까
  • 박성준 기자 (snype00@sisapress.com)
  • 승인 1999.09.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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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 선물 변천사/50년대 달걀 · 참기름 인기…최근엔 상품권 · 현금 주류, 4백만원짜리 양주도 등장

한가위 선물용으로 한 병에 4백만원이나 하는 초호화판 양주가 시중에 나와 화제가 되고 있다. 서울 갤러리아백화점 등 일부 백화점이 이번 추석을 겨냥해 내놓은 프랑스산 최고급 포도주‘샤토 마고’가 바로 그것이다. 놀라운 일은 또 있다. 최근 몇년 동안 선물용으로 인기를 얻었던 상품권 단위가 이번 추석을 고비로 마침내 백만원대로 껑충 뛰었다.

  추석이 되면 사람들은‘고향에 계신 부모님을 위하여’‘오랫동안 뵙지 못했던 이모님을 위여’배 한 상자, 굴비 한 두름을 장만한다. 워낙 오래 지켜온 풍습이어서 명절 때 선물 장만하기는 이미 몸에 밴 습관처럼 익숙해 있다. 하지만 해가 갈수록 선물 마려은 전에 없더‘결단’을 요구한다. 샤토 마고와 백만원짜리 상표권은 딴 세상 사람들 얘기라고 치부하더라도, 웬만큼 괜찮다 싶은 것은 10만원대를 훌쩍 넘어버리기 일쑤다. 추석 선물 값에 일반 서민들은 입이 딱 벌어질 지경이다.

60년대 후반 구두 티켓 · 과자종합세트 가세
  미처 다물지 못한 입일랑 잠깐 놔두고 이번에는‘내가 주고받았던’선물에 얽힌 기억들을 더듬어 보자. 춥고 배고팠던 50~60년대, 우리에게 선물은 어떤 의미가 있었는가. 고도 성장 덕분에 주머니 사정이 비교적 넉넉해질 무렵인 70년대 경제 호황기에 우리는 명절 선물로 어떤 것을 주고받았던가. 혹은 꼭 명절 때가 아니더라도 누구에게나 가끔씩 있게 마련인 특별한 날에 우리는 그 특별함의 의미를 더욱 선명하게 가슴에 새기기 위해 무슨 일을 했던가.

  이야기를 한국전쟁 이후부터 시작하자. 57년 1월 국내 최초의 필터 담배‘아리랑’이 등장하고 59년에는 그 이름도 새삼스러운 칠성사이다가 출시되었지만, 50년대 말은 그야말로 헐벗고 굶주렸던 시대였다. 서울의 청계천이 아직 복개되기 전 서울에서 힘겨운 삶은 살아냈던 사람들은, 개천가에 군복 물들이는 집, 이른바‘염색소’가 즐비했다고 기억한다.

  이유는 간단했다. 당시 생활 물자는 딱 두 갈래 경로를 거쳐 나왔다. 군대에서 흘러나온 군수품과, 주로 미국에서 구호 물자로 들어온‘구제품’이 그것이다. 특히 군용품은 이 시절 서민들을‘머리 끝에서 발 끝까지’지배했다. 군복 · 군화 · 군용 수통과 군용 천막, 하다 못해 숟가락과 밥그릇까지도 군수품에 의존해야 했다. 당연히 품질 좋은 미제 구제품, 예컨대 밀가루 · 설탕 등은 없어서 못구하는 인기 최고의 품목이 되었다.

  이 무렵의 선물이란 기껏해야 달걀 한 꾸러미나 참기름 한 병이 고작이었다. 달걀은 짚으로 만든 꾸러미에 보통 10개씩을 담아 팔았다. 당시에는 변변한 양계장도 없었고, 대부분은 집에서 부업으로 닭을 치던 무렵이었으므로 달걀을 낱개로 구하기도 어려웠던 시절이다. 그 시대를 살지 않은 사람에게 달걀 한 꾸러미를 선물이라고 내놓는 풍경은 낯설다. 그러나 달걀 한 꾸러미는 당시로서는 훌륭한 선물이었다. 다 먹고 나면 달걀을 담았던 짚을 수세미 대용으로 썼으니, 달걀 꾸러미는 버릴 데라고는 없는‘100% 재활용 상품’이었다.

  참기름도 마찬가지였다. 지금도 더러 가짜 소동을 빚곤 하지만 50년대 말~60년대 초에는 가짜 참기름이 판을 쳤다. 그래서 시골 농가에서 짜낸 진짜 참기름은 시골집에서 서울로 보내는 최고의 선물이었다. 게다가 다 먹고 난 참기름 병은 집안 살림에 없어서는 안될 훌륭한 용기 구실을 했다. 일반 서민들에게 50~60년대란‘선물’이든, 선물을 마련할‘돈’이든, 선물이 말로만 존재했던 시절로 기억된다.

  경제 기적의 고동 소리가 울리기 시작하던 60년대 말~70년대 초로 접어들면서 상황은 조금 변했다. 서울에서 나고 자라 지금은 어느덧 중년의 나이에 접어든 이 아무개씨는 당시 일어났던 변화의 한자락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오늘날에도‘선물의 대명사’로 굳건히 자리르 지키고 있는‘구두 티켓’에 얽힌 얘기 한 토막.“60년대 말 우리나라 구두 제조업체가 해외에서 열린 기능 올림픽 대회에 참가해 처음으로 입상했다. 당시로서는 엄청난 쾌거였다. 그 뒤로 구두 회사가 구두 티켓을 발행하기 시작했다. 이 상품은 70년대 초 · 중반 선물용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다”라고 이씨는 회상한다.

  비록 경공업 분야에 국한된 것이기는 하지만 사회가 본격적인 대량 생산 체제로 진입하면서 선물 문화 또한 큰 변화를 겪었다. 60년대 초까지 백화점은‘있는 사람들’만 드나들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삼성이 동화백화점을 인수하여 신세계백화점으로 간판을 바꿔 달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60년대 후반부터 백화점 매장에는 기성복‘댄디’가 등장하고, 명절 때는 선물용으로 특별히 마련된 종합 선물 세트가 얼굴을 내밀었다. 대략 이 때부터 명절 때 고향을 찾는 귀성객의 짐보따리 내용이 바뀌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이제 공장에서 찍어낸 상품을 바리바리 싸들고 고향을 향한 귀성 열차에 몸을 실었다.

 ‘촌스럽기 그지없는’빨간색 겨울 속옷은 이 당시 귀성 선물의 압권이다. 일명‘메리야스’로 통했던 이 겨울 속옷이 대단한 히트를 치게 된 데에는 나름으로 배경이 있다. 70년대 초반 이 상품이 나올 무렵‘빨간색 속옷을 입으면 무병 장수한다’는 소문이 나돌아다. 경제 성장에 가속도가 붙었다고는 하지만 이 무렵은 여전히 등 따숩고 배 부른 것이 최고였던 시절. 사람들은 메리야스가 몸을 따뜻하게 해줄 뿐 아니라, 부모님 무병 장수까지 보장해 준다는 소문에 너도나도 메리야스를 찾기 시작했다.

70년대 어린이에겐 운동화 선물‘최고’
  69년 미니 스커트가 유행하자 때를 맞춰 팬티 스타킹도 위세를 떨치기 시작했다. 70년대 초반‘캉캉’이라는 상표로 처음 등장한 팬티 스타킹은 여성들에게는 최고의 선물로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팬티 스타킹은 추위를 거뜬히 견디게 해줄 뿐만 아니라, 한겨울에도 치마를 입고 다니며 패션을 마음껏 뽐내게 해주는‘보배’였기 때문이다.

  어른들 사이에서 메리야스와 캉캉 스타킹, 식용유 · 설탕 · 조미료 선물 세트, 구두 티켓 등이 오가는 동안 아이들은 운동화나 옷가지,‘모나미 크레파스’따위 학용품을 선물로 받았다. 70년대 중 · 후반을 경남 고성에서 초등학생으로 보낸 최 아무개씨는 고무신만 신고 다니다가 처음으로‘베신’(운동화)을 선물로 받고 기뻐했던 추억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당시는 운동화는커녕 흰색 고무신 신고 다니는 모습도 보기 힘들었다. 도시 아이들과 달리 시골 아이들은 검정색 통고무신을 신고 다니는 게 보통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베신이 생겼다. 나는 그 신발을 받고는 너무 기쁜 나머지 머리맡에 모셔두고 잠을 이루지 못했다”라고 최씨는 말한다.

  역시 70년대에 충북 청원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박 아무개씨의 선물 추억은 곧장 엄격하면서도 자상함을 잃지 않았던‘그 시절’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으로 이어진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박씨가 아버지로부터 받은 선물은 별난 것이었다. 박씨는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대전으로 나가 선물 대용으로 이 때 처음‘외식’이라는 것을 해보았다. 외식 장소는 다름 아닌 호떡 가게였다. 아버지가 큰 마음 먹고 외식 한번 시켜준 것이 고작 호떤 몇 개 사주는 정도였지만, 박씨는 이 무렵 아버지로부터 평생 잊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선물을 받았다. 공고 선생님이었던 아버지가 아들을 위해 손수 선반을 돌려 만들어 준 모형 자동차가 바로 그것이다.“자동차에는 도르레를 이용한 바퀴가 달려 있었다”라고 박씨는 기억한다.

  70년대 말~80년대 초의 격변을 거치고 사람들의 피부에 기름기가 서서히 돌면서 선물 주고받기 양상은 또 한번 변화를 겪었다. 81년 해외 여행 자유화 조처가 시행된 이후부터는 위스키 · 양담배 · 외제 화장품 등 이전까지 일부 부유층에서만 나돌던 외제 상품이 물 밀듯이 들어와 시도 때도 없이 선물 목록에 올랐다.

  한 중년 직장인은 외제 바람이 몰아칠 무렵을 이렇게 회상한다.“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국세청에는‘양담배 전문가’가 있어 멀리서 보이는 불빛이나 연기 모양만 보고도 양담배 여부를 귀신같이 가려내 단속했다. 또 그 무렵에는 아직 양주도 귀한 시절이어서, 세계에서 가장 흔하게 팔리는 양주인 조니 워커 레드만 꺼내놓고서도‘특별한 술’이라고 어깨에 힘을 줄 수 있었다.”

선물 교류 풍속에도‘부익부,빈익빈’
  명절과는 별 상관이 없지만 냉장고 · 세탁기 사용이 보편화하면서 집들이 선물도 양상이 바뀌었다. 오랫동안 이 방면에서 왕좌를 내놓지 않았던‘UN 팔각 성냥’등 통성냥과 양초는, 하이타이 · 두루마리 휴지에 그 자리를 양보했다. 나이키 · 프로스펙스 등 당시로서는 꽤 비싼 편이었던 고급 운동화가 선물용으로 팔려나가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 무렵이다.

  그리고 마침내 21세기를 코앞에 둔 1999년. 선진국 대열을 향해 숨가쁘게 내달으며 성장을 구가했던 한국 경제는 97년 말‘IMF 체제’라는 사상 유례 없는 대재난을 만나 비틀거리다 가까스로 정신을 가다듬고 있는 중이다.

  시련과 고통, 성취와 만족을 골고루 맛보는 동안 선물에 대한 개념도 변천을 거듭해 왔다. 체면 치레를 중시하는 성향 때문에 선물을 주고받는 풍습에도‘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고스란히 나타나던 때가 있었다.

  물론 달라지지 않은 모습도 있다. 화폐가 귀하던 시절 서민들에게는 선물보다 현금이 최고였다. 아들 내외나 손주 며느리가 노부모 · 노할머니에게 선물 대신 용돈을 주는 모습은 명절 때면 어디서든 흔히 목격되는 풍경이다. 그러나 똑같이 선물 대신 현금을 주는데도 미묘한 상황 변화가 감지된다. 과거에는‘이 돈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판단에서 돈을 건넸지만, 지금은 상대편에게 어떤 선물을 해야 할지, 상대편이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마땅히 결정하지 못해 현금을 건네는 것이다. 상품권의 대유행은 바로 이같은 배경을 깔고 있다.

  그러나 기왕 정성을 들일 바에는 선물을 고르고, 그 중 한번쯤은 지나치게 분에 넘치지 않는 범위에서‘호사’를 부릴 법도 하다. 40대 중반의 직장인 김 아무개씨의 일화는 이같은 호사가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 잘 보여준다. 김씨는 71년 고등학생이었을 때 외국 출장에서 돌아온 형으로부터‘홀바인 물감’24색짜리를 선물로 받았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당시에도 홀바인 물감은 꽤 값 나가는 물건이었다. 김씨는 얼마 전 자녀가 나란히 초등학교 5 · 6학년에 진급할 때 자신이 받았던 것과 똑같은 홀바인 물감을 선물했다.“28년 전 선물을 받았을 때 기쁨이란 거의 환상적이었다. 나는 두고두고 그 때를 잊지 못했고 그와 같은 경험을 자녀에게 똑같이 나누어주고 싶었다.”

  명절 선물이든 생일 선물이든, 선물은 진정‘마음을 담아 주고, 정성이 깃들어 있을 때’선물로서 빛을 발하지 않을까.
朴星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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