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개점휴업, 더 이상 안 된다
  • 박상기 <시사저널> 편집위원 ()
  • 승인 1999.11.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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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건 정국’의 정치 파행

‘언론 대책 문건’을 둘러싼 여야 정쟁이 갈수록 광포해지고 있다. 어디까지 가야 막가파식 싸움이 끝날지 종잡기 어려운 지경이다. 어설픈 첩보에 첩보가 꼬리를 물고, 문건 관련 가지의 진술 한마디에 희비가 엇갈리는 ‘정치 난장’이 계속되고 있다.

여야가 죽기 살기로 매달리는 이 싸움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 ‘빨치산 수법’ 어쩌고 하며 상대당 총재에게 악담을 퍼붓고, 또 이를 문제 삼아 ‘정치 퇴출’로 보복하려는 수준의 정쟁은 이미 정치이기를 포기한 추태이다.

옛날 어느 바닷가에 큰 조개 한 마리가 입을 쩍 벌리고 햇볕을 쬐고 있었다. 이를 본 도요새가 몰래 다가가 덜컥 조개의 속살을 쪼았다. 깜짝 놀란 조개는 껍질을 오므려 도요새의 부리를 물었다. 조개와 도요새의 사투가 벌어진 것이다. ‘방휼지쟁(蚌鷸之爭)’이라고 하는 이 싸움은 종내 둘 다 망하는 것으로 끝난다. 마침 지나가던 어부가 이를 발견하고 조개와 도요새를 한꺼번에 줍는 어부지리(漁父之利)를 누렸다. 그때서야 악에 받친 자신들의 싸움이 죽음에 이르는 길이었음을 깨달았지만 이미 늦은 것이다.

국민회의와 한나라당의 정쟁은 방휼지쟁을 연사케 한다. 국회를 뛰쳐나가 장외 투쟁에 열을 올리는 쪽이나, 집권당으로서 포용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고소와 사법 처리로 맞서는 쪽이나 피를 보고야 말겠다는 살기만 번득인다. 그러나 지금의 여야 정쟁은 조개와 도요새 싸움보다 더 부정적이다. 이득을 취할 어부가 없기 때문이다. 여당과 야당이 국가 정책이나 민생 법안을 놓고 정책 대결을 벌이는 싸움이라면 당연히 어부지리는 국민 몫일 것이다. 좀더 국가의 미래에 합당한 정책, 좀더 민생 현안을 해결하는 데 효율적인 법안을 주장하는 쪽에 국민의 지지를 모아주면 싸움은 자연스레 끝나게 된다.

국민이 분노하는 것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싸움이 그러한 생산적인 정치 공방이 아니라, 철저히 당리당략에서 비롯된 정당 간의 정략적 당쟁이라는 데 있다. 언론 대책 문건으로 야기된 쟁점의 핵심은 언론 자유라는 헌법적 기본권이 부당하게 정치권력에 억압받고 있는지를 규명하는 것이다. 김대중 정권의 심부에서 언론 장악 음모가 시도되었는지, 문일현 기자가 작성한 문건이 그러한 의도의 결과물인지를 가려내는 것일 뿐이다.

새해 예산 · 5백여 법안 표류
그런데도 ‘언론 정국’의 전선을 무한 확대해 지역감정에 불을 지르고 ‘색깔 논쟁’으로 치닫는 것은 지지 기반이라는 미명 아래 전 국민을 정쟁 일선에 내몰려는 불순한 책략이다. 일단 문건 파동에 대한 검찰의 수사가 본격화하고, 검찰의 수사를 감시할 여론이 눈을 부릅뜨고 있다. 그래도 진상 규명이 미진할 경우 국정 조사와 특검제 실시 등 합리적 절차에 의한 상황 대처 방법이 없지 않다.

저치권이 국회를 개점 휴업 상태에 빠뜨려, 더 이상 국정을 파행시키는 언론 정국을 이어갈 이유도 명분도 부족하다. 92조9천억원에 달하는 새해 예산과 5백여 건이나 되는 각종 민생 · 개혁 법안을 내팽개친 채 군중 집회와 사법처리로 으르렁거릴 여유가 없다. 도 · 감청 시비로 제도화 필요성이 시급해진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은 언제 할 것이며, 인권법 · 국가보안법 · 부패방지법 등 여러 개혁 법안에 대한 논의는 어느 세월에 하겠다는 것인지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정치인 자신들의 명운이 달린 정치개혁법안 협상에서조차 전혀 진전을 보이지 못하는 그들이, 또 이 문제로 얼마나 국정을 마비시키고 국가를 어디로 표류케 할지 겁이 난다. 여와 야는 하루라도 빨리 국회를 정상화해 예산안과 민생 · 개혁 법안을 심의해야 한다. 정치 파행이 내뿜는 독가스로 온 국민을 질식하게 만들 작정이 아니라면, 거리나 법정이 아니라 국호의사당을 정치의 중심으로 돌려놓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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