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마하티르, 마지막 승부수
  • 황인원(호주 국립대학 박사과정. 말레이시아 전공) ()
  • 승인 1999.11.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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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反 총리’ 정서 무마하려 11월 말 조기 총선... 국회 의석 3분의 2 얻지 못할 수도

지난 11월 10일, 2000년 정부 예산 심의를 하던 말레이시아 국회가 전격 해산 되었다. 이틀 뒤 마하티르 정부는 오는 11월 29일 제 10대 총선거를 치르겠다고 발표했다. 무려 1년간 소문으로만 무성했던 총선이 눈앞의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지난 10월 말까지만 해도 말레이시아 정가에서 11월 총선설이 상당히 유력하게 거론되어 왔다. 하지만 11월 말~12월 초로 예정된 대학 입시와, 12월 중순부터 시작되는 회교 금식 기간인 라마단을 한 달여 남기고 있어 2000년 총선설도 힘을 얻어 가고 있었다. 때문에 마하티르 총리의 전격적인 국회 해산은 역시 마하티르다운 결정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 한다.

하지만 이번에 총선 시기를 결정하기까지 마하티르는 고민을 많이 했다. 작년 9월 안와르 전 부총리가 ‘부도덕한 성생활과 부패’라는 이유로 구속된 이후 급격히 변화한 정치 상황에서, 마하티르는 정부 · 여당에 유리한 총선 시기를 선뜻 결정하지 못한 채 무려 1년을 보낸 것이다.

일각에서 “정권 교체 가능성 있다”
그러다 보니 총선 시기가 전적으로 총리 개인의 결정에 따라 정해지는 말레이시아 정치 상황에서 모든 국민이 다 예측하는 선거 시기를 오히려 ‘마하티르만이 모른다’는 우스갯소리가 심심치 않게 회자되고는 했다. 그만큼 마하티르는 지난 1년간 심각한 정치적 딜레마에 빠져 있었다. 아니 차라리 정치적 몸살을 앓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지난 40여 년 간의 선거 결과에서 보듯이, 사실 이제까지 말레이시아의 선거는 말레이계 정당인 통일말레이 국민 기구를 중심으로 한 연립 여당 국민전선의 장기 집권을 정당화 해 주는 하나의 의례적 행사였다.

주요 언론 매체를 소유하고 국가 기구를 선거 기구로 활용해 온 상황에서, 연립 여당은 독립 이후 아홉 차례 선거에서 한 차례도 국회의 3분의 2 의석을 놓친 적이 없다.

더욱이 가장 최근에 실시된 95년 총선에서 연립 여당은 경제 성장과 마하티르가 누려온 대중적 인기에 힘입어 구회 의석의 5분의 4가 넘는 승리를 차지했다. 이는 말레이시아 선거 사상 최대의 승리였다. 지난 18년간 마하티르에게 선거는 4~5년마다 자신의 집권을 재신임해 주는 하나의 정치적 축제였다. 1년 전까지는 마하티르가 20세기 말을 자신의 마지막 축제로 장식하며 새 천년을 맞이할 것이라는 데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듯했다.

하지만 지난 1년간 급변한 말레이시아의 정치 상황은, 총선 시기에 대한 소문의 잔치를 넘어 사뭇 심각하기만 하다. 현재 다가오는 선거에서 연립 여당이 승리할 것이라는 데에 여당은 물론 야당들조차 이견을 제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난 40여 년간 연립 여당이 누려온 3분의 2 국회 의석이 이번 선거에서 무너질 것이라는 예측들이 젊은 유권자 층을 중심으로 점점 확산되어 가고 있다. 일각에서는 아주 조심스럽게 정권 교체 가능성도 제기하고 있다.

야당, 40년 만에 처음으로 연합 성공
이를 뒷받침하듯이 지난 수십 년간 적대적이고 분열적 관계였던 중국계 · 말레이계와, 다인종 진보 정당을 망라한 말레이시아의 주요 야당들이 현재 야당 연합인 대안전선을 결성해 다가오는 선거를 준비하고 있다. 지난 90년 이들이 서로 다른 야당 연합 2개를 결성해 선거에 임한 적이 있었으나, 이번처럼 하나의 야당 연합 결성에 성공한 것은 40여 년 말레이시아 정치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야당 연합은 지난 4월 신설된 국민정의당 당수로 안와르의 부인을 추대하고, 연립 여당과의 1 대 1 대결을 위한 야당 단일 후보에 마하티르의 정치적 희생양이 된 옥중의 안와르를 지난 9월 야당 연합의 단일 총리 후보로 추대하기로 전격 합의했다. 야당 연합이 선거에서 승리하면, 현재 공정하지 못한 재판 절차에 의해 감옥에 가 있는 안와르에게 공정한 재심 기회를 제공한 뒤 그를 차기 총리로 추대하겠다는 것이다.

옥중 후보라는 한계와 야당 내부의 일부 비판적 시각에도 불구하고, 안와르를 총리 후보로 추대한다는 합의는 이번 선거에 임하는 야당 연합의 자세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더욱이 지난 6년간 준비된 총리 후보로서 부총리를 맡아 국정 수행 능력을 검증받은 안와르는, 야당 연합의 수권 능력에 대한 일반 국민의 불신을 상당히 누그러뜨리는 효과가 있다. ‘18년 장기 집권한 마하티르’와 ‘정치적 희생양 안와르’의 대결 구도로 선거를 단순화할 수 있다는 가능성 역시, 연립 여당에게는 여간 부담스럽지 않다.

국민들, 아들 · 측근에 대한 특혜에 불만
97년 7월 이후 말레이시아의 경제 위기 상황도 연립 여당에 불리한 또 하나의 요소이다. 특히 전체 인구의 30%에 달하는 중국계의 투표 성향이, 전통적으로 경제 상황에 상당히 민감하다는 점이 마하티르 정부의 부담감을 높이고 있다. 비록 회복세에 들어선 최근의 경제 상황이 상당 부분 연립 여당에 유리하게 작용하겠지만, 과거같이 경제 성장에 따른 정치적 특수를 기대하기는 아직 이르다.

더욱이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 금융 없이 경제 위기를 탈출해 세계적으로 관심을 모아온 마하티르 식의 경제 위기 대응 방식도, 정작 말레이시아 내에서는 지난 1년간의 급변한 국내 정치 상황에 파묻혀 그다지 눈길을 끌지 못했다. 상당수 국민은 오히려 경제 위기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마하티르의 아들을 비롯한 몇몇 마하티르 측근들에게 베푼 특혜적 구제 금융에 불만을 표출하고 있다.

하지만 지난 1년간 변화한 정치적 대결 구도와, 경제 상황만이 마하티르가 총선 시기를 결정하는데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니다.

지난 8월 필자와 콸라품푸르에서 만난 라이스야팀 전 외무장관은 86년 선거 당시의 유사한 경제 위기 상황을 제시하며, 현재 마하티르를 괴롭히는 것은 오히려 경제 외적인 것이라고 했다.

마하티르 집권 초기에 5년간 부총리를 지낸 무사히탐 역시 “현재 연립 여당의 세력이 상당히 약해진 것은 사실이나, 이것이 반드시 야당 혹은 야당 연합에 대한 국민의 지지와 신뢰 수준이 높아져서 그런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지금 마하티르의 딜레마는 지난 1년간 통일말레이국민기구의 전통적지지 기반이었던 말레이계 사이에서 광범위하게 확산되어 온 ‘마하티르의 잔인성’과 ‘안와르에 대한 동정’에 기반을 둔 반(反) 마하티르 정서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불과 1년 전과 비교하면 현재 말레이계를 중심으로 퍼지고 있는 마하티르에 대한 불신과 적대감은 도시와 시골, 젊은 층과 기성세대를 막론하고 일반인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심하다. 하지만 이것이 반드시 지난 40여 년간 말레이계의 정치적 후견자 노릇을 해 온 통일말레이국민기구에 대한 반대표로 이어지리라고 보는 것은 아직 무리이다.

마하티르는 지금까지 홀로 서기로 버텨왔다. 이것이 지난 10여 년간 그를 아시아의 어느 정치지도자보다 ‘제3 세계 저치 대변인’으로서 폭넓은 대중적 지지를 받게 했다. 이번 경제 위기 때에도 한국 등 다른 국ㄱ들과 달리 강력한 자본통제정책이라는 ‘경제적 홀로 서기’로 세계의 눈길을 끌었다.

하지만 집권 말기에 이른 마하티르에게 지금 가장 절실한 것은 과연 그가 이번에 ‘정치적 홀로 서기’에 성공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말레이시아와 함께 경제 위기를 겪은 태국 · 필리핀 · 한국 · 인도네시아에서 나타난 정권 교체 혹은 정치 지도자 몰락이라는 공통 현상이, 18년 장기 집권한 마하티르에게는 남의 얘기로만 여겨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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