벗은 옷 다시 입어 봐?
  • 런던. 한준엽 편집위원 ()
  • 승인 1999.11.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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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선>지, 29년 만에 누드 걸 사진 퇴출... 여성 ‘환호’, 남성 ‘탄식’

꼭 30년 전인 69년 호주 출신 루퍼트 머독(68)이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한 후 10여 년 만에 세계 언론 황제를 꿈꾸면서 다시 영국 땅에 상륙했다. 그 때만 해도 영국 언론타운 플리트 가는 여성 누드 사진 게재를 엄두도 못 냈다. 빽빽한 기사 위주에 고상한 품격의 흑백 사진을 드물게 곁들이는 전통적인 대형판 전국 고급 일간지 ‘브로드시트’(broadsheet)가 주종을 이루었다.

대학 졸업 후 신문발행 업에 성공한 머독이 <데일리 헤럴드>를 인수하면서 플리트 가는 외부 침입자가 만들어낸 변화의 큰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 신문 제호부터 <선>으로 바꾸고, 크기도 타블로이드판으로 줄였다. 주요 고급 일간지 5개를 제외한 대부분의 신문이 <선>에 뒤질세라 타블로이드판으로 변신했다.

머독의 <선>이 불씨를 댕긴 영국 언론의 타블로이드 붐은 옐로 저널리즘, 또는 포퓰러 저널리즘의 3대 요소, 섹스 · 스포츠 · 센세이션이라는 3S 경쟁을 촉발했다. 이러한 신문사간 경쟁은 절제의 미덕과 국민 계도라는 사명을 생명처럼 지켜온 ‘자유 언론의 메카’ 플리트 가 시대의 막을 내리기에 충분했다.

전라에서 반라로 교체된 ‘페이지 스리 걸’
70년 11월 17일, 영국 언론사에 한 획을 긋는 사진 한 장이 <선>지 3면에 크게 실렸다. 20세인 스테파니 란이 옷을 다 벗은 채 젖꼭지를 내보이며 풀밭에서 고혹적인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은 영국 신문 2백 년 역사에서 독자를 상대로 한 첫 완전 누두 핀업 걸 사진이었다. 그 뒤 <선>의  ‘페이지 스리(3면) 걸’이 불러온 충격과 파장은 예상 외로 컸다. ‘신의 목소리’라고 불리던 영국 언론의 자존심 <타임스>마저 다음 해인 71년 3월 17일, 2백년간 지켜온 불문율을 깨고 유방이 드러난 누드 걸을 앞세운 비스켓 선전 광고를 실을 정도였다.

이처럼 영국 언론의 중심지인 플리트 가를 무너뜨린 머독은 당시 70년 역사에 최고 부수를 자랑하는 <데일리 미러>를 상대로 한판 승부를 벌이고자 했다. <선>은 타블로이드 변신 1년 만에 인수할 때의 두 배인 2백 50만 부 판매를 기록했고, 5년 후에는 영국 내 타블로이드 신문 가운데 판매 부수 1위의 최고 인기 신문으로 떠올랐다. 여기에는 머독의 공격적인 기업 경영과 판매 전략도 무시할 수 없지만, 무엇보다도 남성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페이지 스리 걸’이 절대적인 수훈을 세웠다. ‘페이지 스리 걸’은 당초 준비되지 않은 기사 때문에 빈 면을 채우기 위해 편집진이 임기응변으로 채워 넣은 것. 하지만 이는 곧 <선> 특유의 편집으로 자리 잡아 갖가지 화제를 뿌리면서 영국 미녀의 변천사를 보여 주었다.

전통적으로 섹스에 대해 엄격하고, 특히 포르노에 부정적 시각이 강한 영국 사회가 지난 30년 동안 <선>의 ‘페이지 스리 걸’을 용인해 국가적 제도로까지 정착ㅎ시킨 이유는 무엇일까. 언론 학자들은 <선>을 위시한 타블로이드의 독자층이 거의 남성이었다는 점에서 그 해답을 찾고 있다. 즉 여성의 사회 진출이 미미했던 70년대 이후부터 80년대 말까지 신문 가판대나 뉴스 에이전트 가게에서 노동자와 샐러리맨 독자는 출근길에 가정 내 여성의 눈초리를 피해 ‘페이지 스리 걸’이 미소 짓는 <선>을 아낌없이 사서 읽고 버렸다는 설명이다. 88년 무려 판매 부수 4백20만부를 돌파하는 신기록을 세웠던 <선>은 9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4백만부 선 아래로 완만한 하강 곡선을 그리고 있다. 그러면서도 지난해 3백81만 부를 발행해 전체 타블로이드 신문 시장의 33%를 점유함으로써, 최대 경쟁지 <데일리 미러>(24%)를 1백50만부나 앞서 당분간 <선>은 부동의 1위를 계속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선> 경영진과 편집 관계자들은 35년 역사를 가진 <선>이 오늘날 영국 내 일간 신문 최고 부수로 올라서기까지 ‘페이지 스리 걸’을 지켜내기 위해 시련과 투쟁의 가시밭길을 헤쳐 왔다. 먼저 70년 대 초, 웨스트 요크셔 주 소워비브리지 시의회가 시 도서관 구독 신문 명단에 <선>을 추방했다. 시 당국의 조처에 <선>은 기자를 현지에 특파하고, ‘페이지 스리 걸’ 출신 특공대 몇 사람을 동원해 <선> 추방을 결정한 60~70대 시의회 의원들을 시대의 흐름에 처진 고루한 위선자들이라고 몰아붙였다.

영국 사회에 큰 화제를 불러일으킨 이 사건은 오히려 <선>의 판매 부수 증가를 부추겼지만, 여권 단체와 포르노 및 음란물 추방 운동 단체들을 자극해 <선> 불매 캠페인이 일어나도록 했다. 그 이후 86년에는 현 노동당 내각의 국제 개발 담당 장관인 클레어 숏 의원이 주도해, 타블로이드 여성 누드 사진 게재 금지 법안이 의회에 상정되기까지 했다. 그러고도 ‘페이지 스리 걸’은 살아남았다.

그러나 타블로이드 역사의 신화, 또는 영국 사회의 한 제도로까지 정착했던 ‘페이지 스리 걸’이 새 밀레니엄 진입의 막바지 고비에서 이제 서서히 사라질 운명을 맞고 있다. 지난 10월 22일 <선> 독자들은 새롭게 변한 ‘페이지 스리 걸’을 만났다. 얇은 브래지어와 한 조각 천으로 중요한 곳을 가린 테이스티 타라가 ‘새 밀레니엄 걸’이라는 제목으로 3면에 등장한 것이다. 다음 날부터 영국의 언론들은 옷 입은(?) ‘페이지 스리 걸’을 놓고 ‘29년 만에 찾아온 또 한 번의 조용한 혁명’이라고 논평했다.

누드 사진 추방에 앞장선 ‘머독가 여성들’
<선>의 과감한 변신은 외부 공격에 의해서가 아니라 아이러니컬하게도 머독 언론 제국 내부, 즉 머독가와 <선> 편집진 및 경영진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 먼저 머독가의 여성. 로퍼트 머독의 어머니와 올해 초 이혼한 전 부인 안나 머독은 초기부터 ‘페이지 스리 걸’을 강력히 반대해 왔다. 이들에 뒤질세라 국제 언론계의 신세대이자 새로운 실권자로 떠오르고 있는 머독의 장녀 엘리자베스 머독, 그리고 최근 루퍼트 머독과 결혼한 중국 태생 웬디 덩이 누드 걸 추방에 발동을 걸었다. 이들 머독가 여인들이 보내는 지지와 후원에 힘입어 차기 편집인으로 떠오르고 있는 현 부편집인 레벡카 웨이드는 지난 1년 동안 ‘페이지 스리 걸’ 폐지에 앞장서 왔다. 웨이드 부편집인은 2000년대에도 <선>이 타블로이드 계에서 최고 인기와 최고 부수를 지키기 위해서는 여성 독자를 확보한ㄴ 것이 관건이라고 주장한다. 특히 젊은 여성 독자를 끌어들이려면, 여성을 성적 쾌락의 대상으로 바라본 남성 위주의 신문에서 탈바꿈해야 한다고 소유주 머독을 포함한 경영진과 편집진을 끈질지게 설득해 왔다.

1년 동안 신문의 미래를 좌우할 ‘페이지 스리 걸’ 찬반 논쟁이 일단 폐지 쪽으로 기울자 <선>은 시험적으로 ‘페이지 스리 걸’에 옷을 입히고 있다. 그러나 경영진은 다른 신문의 반응과 움직임에도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예상대로 옐로 페이퍼 <데일리 스타>가 발 빠른 움직임을 보였다. 30년 동안 여체의 신비와 아름다움의 전령사라고 자처해 온 <선>이 ‘판매 부수에 연연해야 하는 비겁하고 비열한 겁쟁이 신문으로 추락했다“고 비아냥거리며, 본격 ’페이지 스리 걸‘의 전통은 <데일리 스타>가 이어 가겠다고 기염을 토하고 있다. 이에 대해 <선> 경영진은 앞으로 신문 판매에 미칠 부정적 영향을 감안해 언제라도 옷 벗은 ’페이지 스리 걸‘이 부활할 수 있다고 맞섰다. 그럼에도 영국 사회는 아쉬움과 함께 안도감을 내비치며 ’페이지 스리 걸‘과의 결별을 기정사실화 하고 있다. 이미 10월 초 열린 <선>의 인터넷 웹 사이트에서 여성 누드 사진을 없애고, 내년 상반기부터 싣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선>의 판매부수는 88년을 기점으로 완만한 하락세를 보이고 있다. 그래서 여성 독자가 느는 것보다 <데일리 스타>등으로 빠져 나가는 기존 남성 독자가 더 많을 경우, 머독도 자신의 왕국내 여성들에게 더 이상 인내심을 보이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예측도 있다. 지난 10월 22일 이후 <선>이 아직도 ‘페이지 스리 걸’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완전 누드 사진을 두세 차례 실은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궁극적으로는 디지털 미디어 시대에 타블로이드는 물론 새 미디어와 생존 경쟁을 벌여야 할 <선>이 어떤 전략을 들고 나올지에 ‘페이지 스리 걸’의 운명이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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