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볍씨 문익점’의 희망 가꾸기
  • 나권일 기자 ()
  • 승인 1999.11.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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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수확 볍씨 보급에 앞장선 김재식씨

전남 장성군 영천리에 사는 김재식씨(77)는 쌀농사를 짓는 사람들에게 ‘볍씨 문익점’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일본에서 ‘고시히카리’라는 다수확 품종을 몰래 반입해 시험 재배하다가 키가 더 크고 낟알이 많은 돌연변이종을 발견했다. 재래종은 이삭 하나에 낟알이 백 개 안팎인데, 이 돌연변이종은 2백80~3백40개가 달렸던 것. 그는 하늘이 준 선물이라며 품종 이름을 ‘천명(天命)’이라고 지었다.

천명은 수수나 갈대처럼 키가 큰 다수확 품종인데, 올해 볍씨 1.5kg을 8백 평에서 1천8백kg을 거두어 보통 종에 비해 5백~6백kg이나 많은 수확량을 기록했다. 그의 집에는 지금 전국 각지에서 볍씨를 구하려는 사람들의 문의가 쇄도하고 있지만 종자가 없어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김씨가 지금까지 일본에서 몰래 들여와 시험 재배에 성공하거나 종자를 개량해 보급하는 볍씨는 천명을 포함해 ‘방울샘’ ‘오도’ ‘봉황’ 등 25종이나 된다.

김씨가 이렇게 되기까지 알려지지 않은 일화 하나. 현재 해남 옥천농협이 3kg에 7천7백원이라는 비싼 값에 판매하고 있는 ‘한눈에 반한 쌀’ 역시 그가 일본에서 들여온 종자를 개량한 ‘봉황’ 품종이다. 그런데 이 볍씨를 몰래 들여오기 위한 그의 노력은 ‘작전’을 방불케 했다. 90년대 초반 일본의 농업 잡지에서 ‘히도메보레’라는 밥맛 좋은 쌀에 대한 기사를 읽은 그는, 친분이 있던 일본 농과대학 교수엑 그 종자를 보내 달라고 부탁했지만 거절당했다. 일본의 농업 관련법은 어느 현이 개발한 볍씨 품종을 국외는 물론 다른 현으로도 반출하지 못하도록 엄격히 제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직접 일본에 건너가 히도메보레를 재배한 농민의 수확 현장에 달려갔다. 며칠 동안 일을 거들어주면서 볍씨를 주인 몰래 옷 주머니에 가득 넣었다. 그러나 혼자 공항 세관을 통과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그는 일본 여행을 마치고 귀국하는 한국 단체 관광객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들이 세면도구와 주머니에 감춰 들여온 볍씨는 모두 15kg. 그는 장성에 돌아와 갖은 노력 끝에 재배에 성공했고, 밥맛이 좋다는 소문을 들은 해남 옥천농협 관계자의 간청으로 대량 보급하기에 이르렀다.

김씨가 처음부터 ‘농사꾼’은 아니었다. 23년 장성 영천리에서 태어난 뒤 일본에서 청소년기를 보내고 일본 척식 대학을 졸업했다. 미국 공병학교를 마친 뒤 그는 60년 육군대학 행정부장을 역임했고, 박정희 정권 시절에는 수산청장과 전라남도지사를 거쳐 공화당 국회의원까지 지냈다. ‘볍씨 문익점’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이처럼 일본에서 군과 대학 시절을 보낸 데다 공직 생활을 통해 일본인과 두터운 친분을 쌓은 덕분이다. 주위에서 볍씨를 몰래 들여온 것이 정당한 일이냐고 따지면, 그는 일본의 지인들이 도와주거나 묵인했기 때문에 도덕적인 부담은 없다고 말했다.

“쌀농사에 남은 인생 바치겠다”
김씨는 92년 4월 가족의 만류를 뿌리치고 낙향했다. 선친이 지어놓은 오천정(梧泉亭)이라는 정자 옆의 5평 남짓한 슬레이트 한옥이 그의 거처다. 노년을 고향에서 지내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자신이 못다 이룬 ‘부농보국(富農報國)’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그는 69년부터 4년 동안 전남도지사로 일하면서 농민에게 큰 도움을 주지 못한 자신을 자책해 왔다. 신품종 벼를 개발해 식량 증산을 꾀하기보다 혼 · 분식을 장려했던 자신의 어리석음을 반성하기도 했다. 그래서 고향 사람들의 소득을 높이는 방법을 연구하기 위해 직접 농사를 짓는 농사꾼이 되기로 한 것이다.

낙향한 그는 적지 않은 난관에 부딪혔다. 92년에는 쌀이 남아돌게 되어 농민이 쌀농사에 애착이 없었다. 그는 1년에 네댓 차례씩 일본을 방문해 농사 기술을 배우며 볍씨를 몰래 구해 왔다. 수확량은 적어도 품질 좋고 밥맛 좋은 쌀 품종을 들여와 보급했지만, 농민들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쌀농사는 희망이 없다’고 거절하기 일쑤였다. 당황한 그는 마지막으로 집안 일가 8명을 불러 “제일 나쁜 논을 50평도 좋고 백 평도 좋으니 한번 시험해 달라”고 통사정했다. 그리고 자신도 직접 문중 논을 빌려서 쌀농사를 시작했다.

그가 종자를 개량한 품종은 ‘밥맛 좋은 쌀’로 소문이 났고, 전남 지역 농협이 집단 재배해 현재 브랜드 쌀로 판매되고 있다. ‘꿈의 쌀’ ‘한눈에 반한 쌀’같은 히트 상품들이 바로 그가 어렵게 재배에 성공해 퍼뜨린 쌀이다.

그는 볍씨 보급을 하면서 자신의 아호를 딴 ‘老農 농사공부방’도 함께 열고 있다. 벌써 7천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기술을 익히고 종자를 얻기 위해 공부방을 다녀갔고, <쌀농사>와 <쌀농사 수첩> <벼 직파 재배> 따위 책도 펴냈다.

그는 또 직접 PC로 작업해 열흘에 한번씩 <농민의 행복을 찾아서>라는 A3 용지 크기 회보도 발간하고 있다. 매달 받아보는 일본의 <현대 농업>지와 <농업 신문>에서 유익한 내용을 가려 뽑고 7년 농사꾼 생활의 경험을 담는다. 벌써 190호나 발행된 회보는 농사 공부방 회원뿐 아니라 원하는 이 누구에게나 보내주고 있다.

영천리 사람들은 올해 김씨의 공적으 기리는 불망비를 세웠다. 생전에 불망비가 서 쑥스럽다는 김씨는 “다수확 품종이나 기능성 쌀 같은 고품질 쌀이 아니라면 무엇으로 농민의 소득을 높일 수 있겠는가?”라고 묻는다. 밥맛 좋고 수확량 많은 쌀을 보급하고, 쌀 자급률을 높여야 통일이 되어서도 8천만 명이 먹을 식량을 댈 수 있다는 말도 빼놓지 않는다.

김씨는 “요 위에서나 병원 침대에서 죽지는 않겠다. 논두렁이나 밭두렁에서 일하다가, 또는 농부들과 농사일을 토의하다가 죽고 싶다”라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그의 허름한 집 현관에는 그가 직접 쓴 글이 걸려 있다. 누구라도 자신의 주검을 발견하는 사람은 장기기증운동본부에 바로 연락하고, 화장한 뒤 무덤은 봉분이 아닌 평장(平葬)으로 해 달라는 주문이다. 그는 전남대 의대에 장기 기증을 약속했다. ‘농민의 행복을 찾아서 말년을 헤매다가 아쉬움만 남기고, 이 자리에 누워서도 농민의 행복과 풍년을 기원하노라’. 죽음을 준비하고 있는 그가 직접 지었다는 묘비명이다.

김씨는 내년 ‘천명’에 이어 새 볍씨 ‘희망’으로 다수확 기록에 다시 도전할 계획이다. 그는 지난해 이미 ‘희망’ 볍씨 42알로 벼 3kg을 생산했다. 그에 따르면 희망은 우리나라 쌀농사의 혁명을 일으킬 수 있는 다수확 품종이다.

도연명의 <귀거래사>가 부럽지 않은 노농 김재식씨는 ‘천명’과 ‘희망’ 두 품종으로 식량 증산과 부농 보국이라는 꿈을 실현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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