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계 ‘부익부 빈익빈’ 심각하다
  • 노순동 기자 (soon@sisapress.com)
  • 승인 1999.11.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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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자 24% “상반기 방송 출연료 0원”... 방송사, 시청률 높이려 ‘스타 모시기’경쟁

한국방송공사(KBS)의 한 중견 프로듀서는 최근 ‘황당한 경험’을 했다. 연기자가 촬영을 하다 말고 사라져 이튿날까지 종적이 묘연했던 것이다. 부랴부랴 대본을 고쳐 방영에는 차질이 없었지만 식은땀이 절로 흘렀다. 사연인즉 드라마와 광고 촬영이 겹치자 매니저가 프로듀서에게 일정 조정을 요구했고, 그것이 여의치 않자 미련 없이 광고 촬영장으로 향한 것이다. 그 프로듀서는 “겉보기에는 연기자에게 무소불위의 힘을 휘두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시실과 다르다. 최근 들어 부쩍 연출자와 연기자의 역 관계가 달라졌음을 느낀다”라고 털어놓았다.

하지만 다음 사례는 정반대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이게 만든다. KBS 2TV <도전 지구 탐험대> 촬영 중 말라리아에 감염되어 사망한 탤런트 김성찬 씨는, 보상 문제를 놓고 아직까지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다. 방송국이 아니고 외주 업체인 다큐비전(대표 박 철)이 제작하는 프로그램에 출연했다가 당한 일이어서, 유족이 김씨의 죽음을 보상받을 길이 막연한 것이다. 촬영 중 발생한 사고에 대해서는 1차적으로 제작사가 책임져야 하지만, 외주 업체가 너무 영세한 탓이다. 김씨의 유족은 프로그램을 편성한 한국방송공사에 ‘도의적인’책임을 묻겠다고 나섰다.

김성찬 씨가 ‘죽을 곳’에 간 이유
한국방송연예인노동조합(노조)은 오는 16일 한국방송공사 앞에서 보상을 촉구하는 집회를 열 예정이다. 노조는 엉뚱한 곳에 책임을 묻는 것으로 비치기 쉽지만, 결코 무리한 요구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앞으로 방송국이 외주 비율을 늘려 갈 터인데, 이번 기회에 사고에 취약한 출연자의 안전을 보장하는 관례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외주 제작의 경우 방송국이 연기자의 출연료를 보장하는 ‘어정쩡한’ 계약 관계를 맺고 있는데, 이런 관행은 외주 업체가 얼마나 열악한가 하는 점을 반증한다. 문제는 대다수 연기자가 이런 열악한 환경을 문제 삼을 만한 형편이 못 된다는 것이다. 이경호 노조위원장은 ‘제작진의 안전 불감증이나 계약서 조항을 들먹이기 이전에, 위험한 작업 조건을 거부할 수 없는 연기자들의 열악한 지위를 돌아보자’고 제안한다. 김씨의 동료들은 ‘그가 왜 그토록 외진 곳까지 가서 목숨을 걸고 촬영해야 했을까’라고 착잡한 심경을 토로한다.

연출자와 연기자 간에 역관계가 역전되었다는 자탄 한 켠에, 연기자의 생존권을 보장하라는 요구가 터져 나오는 풍경은 얼핏 어울려 보이지 않지만 독법이 어려운 것은 아니다.

열쇠는 부익부 빈익빈이다. 연예계처럼 재능의 작은 차이가 엄청난 소득 격차로 이어지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곳도 드물다. 여기에는 성패 여부를 예측하기 어렵다는 문화 산업의 특징도 아울러 작용한다. 제작자가 불안정한 시장에서 위험을 줄이는 방법은, 인기를 얻고 있는 연예인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다. 방송 평론가 원용진 씨에 따르면 <공포 체험> <몰래 카메라> 등 스타를 괴롭히는 가학적인 프로그램이 붐을 이루는 것은, 그나마 그런 접근이 시청률을 안전하게 보장하기 때문이다.

연기자 구속하는 방송사 공채 제도
그렇다면 비인기 연예인의 생존권을 보장하라는 것은, 이미지를 팔아먹고 사는 연예인들로서는 시자의 요구를 무시하는 억지가 아닐까? 최근 생존권 보장 방안으로 캐스팅 할당제를 들고 나온 한국방송연예인노동조합은, 부익부 빈익빈도 정도 문제라고 지적한다.

노조 판단에 따르면, 현재 이러한 현상은 제작시스템의 안정성을 위협할 정도에 이르렀다. 상반기에 방송 출연료 수입이 전혀 없었다는 사람이 응답자의 24%에 이른다. 대다수 연기자가 최저 생계비 수준에도 못 미치는 수입으로 생활한다면 어떻게 질 높은 프로그램이 가능하겠는가. 또한 캐스팅 할당제는, 스타에 의존하는 시청률 경쟁을 지양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처럼 질주하는 방송사의 시청률 지상주의가, 프로그램의 질과 연기자의 생존권을 두루 갉아먹고 있다는 문제의식인 셈이다. 여기에 생존권 보장 요구의 설득력을 더하는 요인이 더 있다. 바로 수십 년간 지속되어 온 방송사 공채 제도이다. 방송사가 나서서 연예인을 뽑고, 일정 기간 독점 관리하는 공채 제도는 세계적으로 유례가 드물다. 공채로 선발된 인력은 2년 동안 신분을 보장받는데, 보장은 때로 구속이 된다. 출연 작품이 없을 경우 매달 50만원 정도 월급을 받으면서도 전속 계약에 묶여 다른 곳을 기웃거릴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특채를 통해(실제로는 연출자의 일반적인 낙점이다) 언제든지 젊고 재능 있는 연기자가 수혈되는 데 비해, 공채 출신 연기자는 해가 갈수록 출연료가 높아져 그만큼 출연 기회가 줄어든다. 연기자도 방송사도 시장의 요구와 관리의 울타리 속에서 운신할 폭이 좁은 것이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공채 제도를 없애라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으나, 이미 공채 출신 인력이 두텁게 포진한 상황에서는 신규 채용을 않더라도 기존 인력을 소화하라는 압력이 줄어들기는 어렵다. 한국방송공사의 경우 노조가 제공한 연기자 목록을 캐스팅할 때 참고 자료로 활용하고 있는데, 노조는 그 폭을 늘리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할당제 요구에는 캐스팅 과정에 대한 불신도 큰 몫을 하고 있다. 얼마 전 노조는 ‘한국 방송 연예인의 의식 구조 및 실태’에 관한 조사 결과를 발표해 파란을 일으켰다. 대부분의 응답자가 캐스팅 방식을 개선해야 한다고 답했는데, 실력보다 프로듀서 · 작가와의 관계에 의해 결정된다는 응답자 비율ㅇ 높아 제작진과 출연자 사이에 불신의 골이 깊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게다가 상반기에 ‘방송 출연 소득이 전혀 없었다’는 이가 응답자의 24%에 이른 것은 출연료 인상보다 출연 기회를 늘려야 한다는 이가 압도적으로 많은 이유를 짐작케 했다. 설문 결과는, 해마다 캐스팅을 둘러싼 잡음이 끊이지 않는다는 점 때문에 설득력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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