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랑 몰린 인사동 허리 끊어질라”
  • 박성준 기자 (snype00@sisapress.com)
  • 승인 1999.11.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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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른자위 땅 건설업자에 팔려... 무분별한 개발 우려

‘차 없는 거리’를 실시한 이후 급격한 변화를 겪으며, 개발이냐 보존이냐 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진통을 거듭하던 서울 인사동 길에 새로운 문제가 터졌다. 인사동 길 경관의 핵심 위치에 자리 잡고 있는 영빈가든(한식점)과 그 주변의 땅(관훈동 50번지 일대 · 103쪽 지도 참조)이 최근 한 개발업자 손에 넘어갔기 때문이다. 이곳에는 영빈가든 외에 동서표구(표구상) · 아원공방(공예품점) · 사보당 · 보원요(도자기점) 등 인사동을 상징하는 이른바 ‘작은 가게’들이 몰려 있다.

문제의 땅은 원래 국내에서 손꼽히는 출판사인 박영사 안중만 사장의 소유였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 땅을 최근 안사장으로부터 매입한 곳은 법인 등록도 되어 있지 않은 정체불명의 건설 회사(ㅇ건설)이다.

상인들의 공동 매입 제안 묵살 당해
안씨와 건설업체 사이에 계약이 성사되었다는 소문이 알려지자 해당 상인들은 ‘인사동 작은 가게 사람들 모임’을 만들어 땅 매매 당사자에게 ‘매매 계약 재고’를 호소하고 있다. 계약이 예정대로 진행될 경우 문제의 땅에 세 들어 살고 있는 상인들은 10~20년간 정든 인사동을 떠날 수밖에 없으며, 자칫 개발업자의 욕심에 의해 무분별한 개발이 이루어지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영빈가든 일대 땅은 모두 합쳐 4백50평 정도이다. 그 중 3백50평을 영빈가든이 한 덩어리로 빌려 쓰고 있으며, 나머지 백 평은 가게 건물 10여 개로 쪼개진 상태이다. 얼핏 보기에는 대수롭지 않은 규모처럼 보이지만. 땅의 소재지가 인사동 길이라는 점으로 시각을 좁히면 사정은 달라진다. 이 땅은 인근 경인미술관 터(옛 박영효 대감집)와 더불어 단일 필지로는 인사동 일대에서 가장 크다. 지주 대붑ㄴ이 drht에 소유하고 있는 땅은 수십 평 단위가 고작이어서, 작은 가게 8백여 개가 빼곡히 들어찬 인사동 길 특유의 경관에 이 땅이 핵심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땅은 한때 ‘경찰국장’으로 알려진 윤기병 씨 소유였다가 약 20년 전 안중만 씨의 선친이자 박영사 창립자인 안원옥 씨가 매입했다. 세입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안씨와 세입자는 지금까지 줄곧 좋은 관계를 유지해 왔다. 안씨는 임대료와 보증금을 비교적 헐하게 매겨 세입자의 부담을 덜어 주었으며, 세입자는 이에 화답해 임차료를 연체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최근깢 인근 상인들 사이에서는 안씨 당에 세든 이웃들을 두고 ‘복 받은 사람들’이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그러나 안씨와 세입자의 밀월 관계는 지난 9월 막을 내릴 위기에 처했다. 9월에 안씨가 사람을 보내 세입자와 임대 재 계약서를 작성하면서 ‘계약 기간을 1년으로 하되, 만약 땅이 팔리게 되면 가게를 비워 달라’는 조항을 넣었던 것이다. 계약 조건에 직접 삽입되지는 않았지만 잠정적으로 가게를 비울 날짜는 2000년 3월 31일로 잡혔다. 이는 지난 9월 시점에 안씨와 건설업체간 매매 협상이 상당히 진척되었음을 암시하는 예이다.

이 때부터 안씨 땅에 세 들어 사는 ‘인사동 열두 가게’ 주인들이 공동으로 대안 찾기에 나섰다. 그 결과 문제의 땅을 세입자가 공동을 사들여 현재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각자 가게를 운영해 보자는 안이었다. 때마침 영빈가든은 대전 부근에 땅이 있어 이를 팔면 땅 매입 자금(전체 규모 1백10억원)을 마련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문제는 이들이 제 값을 쳐주고 땅을 사겠다는데도 안씨가 이를 거절한데 있다. 세입자 측은 영빈가든을 중심으로 박영사의 담당 이사를 찾아가 사정을 설명하고 기왕 땅을 팔 요량이면 자기네들에게 넘겨 달라고 요청했으나, 안씨 측은 잔금 결제(45억원 가량)가 불확실하다‘는 이유로 퇴짜를 놓았다. 결국 협상은 깨지고 안씨는 건설업체외 손을 잡았다.

시민단체도 ‘열두 가게 살리기’ 나서
지난 10월께 ㅇ건설과 정식으로 매매 계약을 체결한 것으로 알려진 안씨 측은 ‘매매 계약은 사유 재산권 행사 차원에서 합법적으로 이루어졌다’는 말만 되풀이하면서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고 있다. 실제로 매각을 담당한 박영개발 정 아무개 이사는 매매 계약을 맺은 이후 ‘휴가’를 이유로 아예 자리를 비웠다.

안중만씨 땅이 팔렸다는 소식이 인사동 바닥에 알려지자 땅 매각 문제는 인사동 전체의 문제로 번져 적지 않은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문제의 땅은 안국동에서 종로 통으로 이어지는 인사동 길 허리 부분이다. 이곳에 규모가 큰 현대식 건물이 들어서면, ‘역사 · 문화가 살아 숨쉬는 서울의 개펄’이라고 불리는 인사동 길의 허리가 끊길 것이 불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 때문에 당사자라고 할 인사동 열두 가게는 물론이고, 이웃 상인과 시민단체들도 무분별한 개발을 막기 위해 필사적으로 뛰고 있다. 11월 9일 ‘인사동 제 모습 찾기 모임’(가칭)이 발족된 것도 한 사례이다. 문제의 열두 가게 외에 공화랑 · 관훈갤러리 · 문우서림 등이 참여하는 이 모임은, 발족을 즈음해 안중만씨 땅 매각 사실에 걱정을 나타내는 성명을 발표했다. 아울러 이 모임은 오는 11월 말부터 내년 8월까지 시행될 ‘인사동 역사문화 탐방로 조성 공사’에도 심각한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서울시가 추진하는 이 계획에는 인사동 입구 은행나무를 베어내고, 인사동 길을 대대적으로 보수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인사동 사람들은 이 같은 계획이 궁극적으로 인사동을 해체시키리라고 걱정하는 것이다.

‘걷고 싶은 도시 만들기 시민연대’(도시연대) · 종로연대 등 시민단체도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열두 가게 살리기’ 서명운동을 상인들과 공동으로 벌이고, 서울시 관계자를 찾아가 ‘적극 중재’를 요청하는 등 사태 악화를 막기 위해 백방으로 뛰고 있는 것이다. 도시연대 최정한 사무총장은 인사동 경관 보존을 상인 문제가 아니라 서울 시민 전체의 자존심 차원에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서울 시내에서 유일하다시피 한 전통 문화 거리를 자본의 논리에만 내맡겨 없애 버린다면, 이는 문화 시민으로서 책임을 방기하는 수치스러운 일이라는 것이다.

인사동 길은 ‘차 없는 거리’실시 이후 갈수록 혼탁해지고 있다. 또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안씨 땅 건너편은 현대식 고층 건물들이 낡고 오래된 옛 단층집들을 밀어내고 주인 노릇을 한 지 오래다. 인사동 사람들은 특히 이처럼 ‘좋지 않은 변화’가 바로 가나화랑 · 박영사 대표 등 명색이 인사동 출신이고, 한국 문화 산업을 대표한다는 사람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는 점에도 분노하고 있다. 인사동에서 미술품 매매로 성장한 가나화랑은 인사동 입구에 ‘합필(合筆)’개발‘ 방식으로 현대식 건물을 지어 인터넷 카페 등을 들인 외에, 최근 인사동 네거리 가까운 곳에 또 다른 고층 빌딩을 올려 주변 상인들로부터 따가운 눈총을 받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믿었던‘ 안중만 씨마저 세입자들의 제안을 뿌리치고 건설업자에게 땅을 넘긴 것이다. 인사동의 운명은 지금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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