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 시절 강제 노동 밀린 임금 내 놓아라”
  • 프랑크푸르트 허광 편집위원 ()
  • 승인 1999.12.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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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대전 노역자들 독일 정부 · 기업에 보상 요구 … 협상 진행 중

어느 기업주가 정당한 사유 없이 노임 지불을 차일피일 미룬다면? 사회는 그를 ‘악덕 기업주’라 부를 것이다. 노임 체불 기일이 어느 한계를 넘어선다면? 근로자들은 법에 호소하고, 기업주는 구속된다. 그런데 어느 기업주가 한두 달이 아니라 수십 년이 넘도록 임금 지불을 거부하고도 버젓이 행세할 수 있다면? 그 뿐만이 아니라 임금을 지불할 이유가 없다고 버틴다면? 또 그 나라 정부가 이런 기업주에게 법적 책임을 묻기는커녕 기업의 ‘양심’에 기대어 임금 지불을 ‘호소’하고 있다면? 그리고 이런 상황이 21세기로 넘어가는 마지막 고비에 유럽 한복판에서 벌어지고 있다면 누구도 믿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독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실제 상황이며, 바로 이 ‘체불 노임’을 둘러싸고 근 1년 동안 독일과 미국을 오가며 국제 협상이 진행되고 있다. 이 체불 노임의 실체는 무엇이며, 또 이를 둘러싼 국제 협상의 내막은 어떠한가?

독일 히틀러 정권은 2차 세계대전 때 점령 지역에서 납치한 민간인들을 강제노동소로 보냈다. 역사가들은 강제노동소로 끌려간 인원을 6백만 ~ 1천2백만 명으로 추산한다.

그런데 강제노동소는 ‘집단 수용소’와 다르다는 점을 새겨 둘 필요가 있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를 통해 잘 알려졌듯이, 집단 수용소에 끌려간 사람들은 히틀러가 처음부터 죽이려고 한 집단이다. 여기에는 나치스 체제에 저항한 공산주의자와 정치범, 또 나치스가 인종주의 선전을 위해 제물로 삼았던 6백만 유태인, 그리고 나치스 체제에 저항할 힘이 없었는데도 반사회적인 집단으로 낙인 찍혀 희생된 동성애자 · 정신병자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들은 수용소 가스실에서 또는 생체실험실에서 죽는 순간까지 강제노동을 했다. ‘노동을 시켜 죽인다’는 나치스 구호는 바로 이들에게 적용되었다. 그 결과 집단수용소에서는 히틀러가 항복하기까지 약 절반만이 목숨을 건졌다.

강제노동에 끌려간 인물들은 이 점에서 다르다. 그들은 나치스의 전시 경제 체제에 절대 필요한 노동력이었다. 나치스는 이들을 기업에 임대하는 형식으로 전시 경제에 투입했다. 다시 말해 이들은 나치스가 소유하는 ‘노예’였고, 기업은 이들을 ‘사용’하는 권리만을 가졌다. 만약 사망자가 생기면 기업은 노예 소유주인 나치스가 자기네 과실이 아님을 입증하고 보상해야 했다. 강제노동이라고는 하지만 노임이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기업 측이 노예 노동자들의 ‘의식주 비용’과 심지어 ‘노동자 감시 비용’까지 계산해 임금에서 공제했기 때문에, 기업의 회계 장부는 적자로 기록되기 일쑤였다.

흔히 독일(서독)의 전후 경제 부흥을 ‘라인 강의 기적’이라고 치켜세우며 독일인이 근면성을 타고났다고 말한다. 그러나 전후 부흥은 강제로 동원된 노동자의 희생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 사실을 외면하면 독일의 전쟁 범죄를 숨기는 논리에 빠져들게 된다.

정치적 계산 탓에 전후 보상 문제 표류
노예 노동자들은 전쟁이 계속되는 한 필요한 존재였기에 대부분이 살아남았다. 그러나 전후 50년이 지나는 동안 많은 수가 사망하고, 현재 생존자는 백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 이들 중 일부가 올해 초부터 미국 측 변호사를 내세워 ‘노예 노동 보상’을 요구했고 그에 따라 국제 협상이 시작되었다.

그러면 이 같은 협상이 왜 이제야 시작되었을까? 전후 보상 문제는 독일 통일과 함께 유럽의 대표적인 논쟁거리였다. 이는 전후 보상 문제가 미해결 상태로 있었다는 것을 말하는데, 이렇게 된 이유는 두 가지 조약 때문이다. 그 하나는 53년 독일이 서방 연합국과 맺은 ‘런던 채무 협정’이다. 이 협정ㅇ서 서방은 독일의 전후 보상을 ‘평화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미루었다. 즉 독일이 평화조약을 통해 먼저(전승국에 대한) ‘배상’ 문제를 해결할 때까지 (전쟁 범죄 희생자 개인에 대한) ‘전후 보상’은 유보한다는 것이다.

서방은 당시 동서 냉전이 격화하는 상황에서 서독이 안정되지 않고는 서유럽 전체가 정치 위기에 빠진다는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서독의 채무 부담을 면제하고 전후 보상도 여기에 종족 시킨 것이다(최근 제3 세계의 채무 면제를 주장하는 논자들은 런던 협정을 논거로 댄다. 서방이 패전국 독일의 채무도 면제했는데 제3 세계의 채무 면제를 거부한 이유가 없다. 문제는 채권국의 정치적인 의지에 달려 있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독일은 평화조약 체결 때까지라는 일종의 시한부 조건에 따라 전후 보상을 줄곧 거부했다. 그러면서도 독일 정부는 이스라엘과 서방에 대해서는 60년대까지 일정 부분 보상을 했다. 이것은 유태인 학살국이라는 이미지를 씻기 위해서, 또 유럽연합(EU)에 가입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조처였고, 그 규모도 보잘것 없었다.

특히 이스라엘에 대한 보상은 대부분 무기 지원으로 대신해 실제 희생자에 대한 보상 조처라고 보기는 어렵다. 반면 동유럽에 대해서는 평화조약 체결 때까지 전후 보상을 미룬다는 원칙을 바꾸지 않았다. 전후 보상이 동유럽 정권 유지에 ‘악용’될 수 있다는 정치적 계산에 따라 서방 역시 독일 편에 선 것은 물론이다.

그런데 평화조약을 체결하는 시점은 독일 통일과 일치한다. 독일을 대표하는 단일 정부만이 전체 연합국과 평화조약을 협상할 수 있다는 논리 때문이다. 독일(서독) 정부는 동서독이 통일되는 시점에서 ‘평화조약 협상’이 아닌 ‘2+4’ 협상을 고집했다. 그 한 가지 이유는 폴란드와 같이 전쟁 배상을 요구하는 동유럽 국가가 협상에 참가하는 것을 처음부터 막기 위해서였다.

실제로 ‘2+4’ 조약에서는 독일의 전쟁 책임을 언급하는 조항을 볼 수 없다. 독일은 ‘2+4’ 조약을 통해 더 이상 전쟁범죄국으로서 치러야 할 의무가 없다고 선언한 셈이고, 연합국은 여기에 ‘무언의 동조’를 보낸 것이다. 당시 독일 통일을 막을 수 없는 대세라고 본 서방은 독일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기에 급급했고, 소련 역시 독일의 경제 원조에 매달리고 있던 때여서 ‘평화조약 체결’이나 ‘전쟁 배상, 전후 보상’ 문제를 담은 런던 협정은 효력이 없었다.

그러면 독일의 전쟁 칙임 문제는 완전히 잊힌 것일까? 국가간 전쟁 배상 문제에서는 적어도 그렇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독일은 2차 세계대전 결과 폴란드 땅이 된 옛 독일 영토를 포기한다고 약속하는 대신 폴란드가 전쟁 보상 요구를 포기한다는 ‘교환 조건’을 내걸어 이를 관철했다. 동유럽에서 독일의 비위를 거스르면서까지 전쟁 배상 요구를 할만한 정부는 이미 오래 전에 없어졌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독일, 더 이상 보상 미룰 명분 없어
그러나 강제노동문제가 걸린 ‘전후 보상’의 경우는 다르다. 첫째, 독일이 통일되고 런던 협정이 사문화함으로써 독일이 전후 보상을 연기할 구실도 없어졌다는 사실이다. 물론 ‘전쟁 배상’의 경우에도 이 점은 마찬가지지만, 앞서 폴란드를 예로 들었듯이 배상을 요구할 나라가 없다는 점이 문제다. 이에 반해 전후 보상은 희생자 개인에 대한 보상을 다루는 것이므로 강제 노동 희생자들은 이제 독일 정부와 기업을 상대해 보상 요구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둘째, 독일 통일이 냉전 붕괴로 이어졌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동서 간 대결이 종식됨으로써 그동안 서방 내부에서 동유럽에 대한 전후 보상을 거부하던 세력도 사라졌다. 따라서 독일은 ‘2+4’ 조약을 통해 전쟁 책임을 사문화했지만 강제 노동 희생자는 통일 이후 본격적으로 보상을 요구할 조건을 갖추게 되었다.

당시 국제 정세 변화와 관련해 주목할 만한 또 한가지 사건이 있다. 독일 정부는 90년대 초반 발틱 국가들이 러시아로부터 독립을 선언하자 이 지역에서 과거 나치스와 친위대 SS에 참석했던 인물을 찾아 연금을 지급하기 시작했다. 독일 정부가 해외 나치스 요원의 ‘공로’를 인정하고 이들을 지원한다는 사실은 국제적인 경계를 사기에 충분했다. 노예 노동 생존자들은 동유럽에서 벌어지는 이같은 사태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이들은 통일 후 독일 정부의 방침이 확실해지자 미국과 독일 변호사의 힘을 빌려 국제적인 여론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이 같은 흐름 속에서 나온 새로운 반응은 3년 전 독일 연방헌법 재판소가 내린 판결이다. 헌법재판소는 96년 5월 나치스 시대 강제 노동 희생자는 3년 이내에 보상을 청구할 수 있다고 판결했다. 그 후 98년에 출범한 슈뢰더 정부는 적 · 록 연정 정책 합의문에서 강제 노동 보상을 적극 추진한다는 방침을 밝혔다. 이 문제를 둘러싸고 국제 협상이 올해 초부터 시작된 배경이다. 이 협상에는 독일 정부와 기업 대표, 강제 노동 희생자들을 지원하는 미국 · 독일 변호사, 미국과 동유럽 정부 대표들이 참가하고 있다. 독일 정부가 협상에 참여하고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노예 노동자의 소유주였던 ‘제3 제국’의 책임을 물려받고 있기 때문이다.

슈뢰더 정부 “30억 마르크 부담하겠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연합국의 의뢰를 받아 미국의 한 연구소가 49~51년에 작성한 보고서에 따르면, 강제 노동자들을 ‘고용’한 기업은 2천4백98개다. 그 후 독일 재무부가 넘겨받은 추가 확인 작업은 69년에 중단되었다. 놀라운 사실은, 그 사이 문을 닫은 기업이 있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강제 노동에 보상할 뜻이 있다고 나선 기업이 현재 16개밖에 안된다는 점이다.

슈뢰더 정부는 30억 마르크를 정부가 부담하기로 제안하고 기업 측 참여를 재촉하고 있지만 반응은 신통치 않다. 독일의 경제사연구소가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강제 노동자가 받아야 할 임금은 현재 가치로 따져 9백94억 마르크. 여기에 50년 간의 이자 계산은 빠져 있다.

반면 독일 16개 기업이 제시한 보상액은 40억 마르크이다. 이 중 절반은 어느 기업이 부담할지 미정이고, 그 중 절반은 기업 운영비로 계상해 세금을 면제받는다. 변호사들은 독일 기업에 최ㅗ한 백억 마르크를 요구하고 있다. 40억 마르크에서 한 푼도 더 낼 수 없다고 버티던 기업 측은 본에서 열린 지난 6차 협상(11월 17~18)에서 60억 마르크까지 물러서, 협상이 깨질 고비를 넘겼다.

독일 기업이 두려워하는 것은 협상이 깨질 경우 미국 법원을 통해 집단으로 소송이 제기되고, 그에 따라 기업 이미지가 훼손된다는 것이다. 이런 걱정은 미국 시장에 의존하고 있는 수출 기업일수록 크다.

그래서 이들은 1년 전 보상 문제에 대비해 연대 기구를 만들고 ‘최소 비용으로 최대 안전’을 확보한다는 전략을 짰다. 협상 초기부터 최대 보상액을 정해놓고 ‘농업 부문의 강제 노동은 보상 대상이 아니다’ ‘소수 민족 대표는 협상에 들어올 수 없다’고 고자세로 나온 이유가 여기에 있다. 슈뢰더 총리가 독일 정부 협상 대표로 박탈한 람스도르프(전 자민당 당수)는 ‘동유럽 노동자가 독일 농촌에서 일한 것은 자연스러운 역사’라고 발언해 동유럽 대표들의 비난을 자초하기도 했다. 독일 정부 역시 기업 전략에 보조를 맞추고 있는 것일까?

또 한 가지 눈여겨 볼 점은, 이번 협상을 분석하는 독일 언론의 시각이다. 예를 들어 람스도르프의 발언에 일침을 놓은 유태인 기구에 대해 독일의 대표적인 보수 일간지 (FAZ)는 ‘이른바 유태인 조직’이라는 경멸조 표현을 거침없이 쓰고 있다.

또 주간지 <슈피겔>은 변호사들이 소송 수임료를 노리고 협상에 나서고 있다는 뜻으로 ‘변호사 옷을 입은 상어’라고 묘사했다. 도일 언론은 미국의 변호사를 공격해 강제 노동 희생자들을 우회적으로 깎아내리는 ‘독일식 민족주의’에 물들어 있다.

본의 6차 협상은 ‘3주 이내에 마지막 협상을 갖는다’는 결론을 내고 끝났다. 그 마지막 협상이 어떤 절충안으로 끝나든 독일 측의 기본 전략이 반영되는 한 전후 보상 문제는 여전히 미래의 과제로 남게 될 것이다.

이 점에서 미국 민주당이 지난 11월 4일 제출한 법안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법안에 따르면 ‘나치 독일과 그 동맹국’의 점령 지역에서 강제 노동을 한 희생자나 그 유족이 미국 연방 법원에 보상 소송을 청구할 수 있으며, 소송 제기 기한은 2010년이다. 강제 징용 역사를 안고 있는 우리가, 독일의 보상 사례와 함께 검토해 보아야 할 법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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