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거나 말거나’ 공시 뿌리뽑을 묘약 없나
  • 소성민 기자 ()
  • 승인 1999.12.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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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성실 기업 정보 제재 장치 미약 … “집단소송제가 최선의 방책”

지난 11월 10일 금융감독원(금감원)이 한국종합기술금융(KTB) 권성문 사장(미래와 사람 대주주 · 전사장)과 미래와 사람 임원 2명을 검찰에 고발한 사건은 ‘증권 시장에서 공시의 역할이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다.

금감원은 권사장과 미래와 사람 임원들이 증권거래법 제188조 ‘시세 조종 등 불공정 거래 금지’ 조항을 위반했다고 밝혔다. 주장의 골자인즉 지난해 미래와 사람이 4월 · 8월 두 차례 유상 증자를 성사시키려고 냉각 캔(일명 ‘원더캔’) 신기술과 관ㄹㄴ한 허위 사실을 유포했다는 것이다.

금감원 조사2국이 밝힌 사건의 진상 가운데 ‘공시’와 관련된 내용만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미래와 사람, 왜 고발되었나
첫째, 미래와 사람은 지난해 6월 냉각 캔 제조 기술을 일본에 독점 판매할 권한을 주는 대가로 1백50억원을 받기로 하고 일본의 학원 재벌인 (주)국제개발적문회와 계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미래와 사람은 이 사실을 공시하지 않고 있다가 유상 증자 청약일(8월 4~5일) 직전인 7월 31일 동일한 내용을 다시 계약해 같은 날 공시했다.

둘째, 미래와 사람은 8월 8일 캐나다 BTI 사와 1억 달러에 달하는 냉각 캔 제조 기술 아리선스 계약을 허위로 체결한 뒤 이를  8얼 10일 증권거래소를 통해 공시해 주가를 끌어올렸다. 그리고 나서 8월 11일 5천만 달러를 받기로 하고 BTI와 다시 계약을 체결했다.

미래와 사람이 8월 4~5일 실시된 유상증자 청약 결과 실권주가 전체 증자 물량의 41.7%에 해당하는 1백10만여 주(당시 시세로 백억원 상당)나 발생하자, 이를 소화하려고 실권주 청약 일에 맞추어 허위 사실을 공시했다는 것이다. 금감원 주장대로라면 미래와 사람은 ‘공개 사기’를 한 셈이다. 금감원 조사2국 김용대 조사2팀장은 “미래와 사람이 주가를 조작한 방법은 유언비어를 흘리며 주식을 사고파는 일반적 ‘작전’과는 달랐다. 미래와 사람처럼 지속적 · 반복적으로 공시를 악용한 사례는 전례를 찾아보기 힘들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한 미래와 사람의 해명은 이렇다. 일본의 국제개발적문회와 두 차례 계약한 것은 사실이지만, 6월의 최초 계약 때에는 계약금으로 5억 엔짜리 ‘수형(手形)’을 수표로 오인해 받았다가 어음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계약을 바로 취소했다는 것이다. 그 뒤 7월 말에 이를 해당 어음의 만기가 한 달밖에 남지 않게 되자, 이를 다시 받고 재계약을 체결했다는 해명이다.

미래와 사람은 또 캐나다 BTI사와 맺은 계약에 대해서도 8월 8일 맺은 1억 달러 건이 진짜이고, 8월 11일 맺은 5천만 달러 건은 형식적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나스닥 상장을 준비하고 있는 BTI가 자사 투자자들에게 냉각 캔 기술에 대한 투자비를 낮추어 설명하고 싶어 해 형식만 갖추어 맺어준 계약이라는 설명이다.

미래와 사람의 주장에도 일리는 있다. 하지만 이유야 어떻든 미래와 사람의 공시 때문에 불특정 투자자들이 피해를 본 것은 분명하다. 미래와 사람 주가는 BTI사와 1억 달러 계약을 맺었다는 공시가 나온 디 이틀 연거푸 상한가를 기록했지만(8월 10~11일), 해당 계약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자 즉시 하한가로 곤두박질했다(8월 13일). 하지만 그때는 미래와 사람이 실권주 청약을 성공적으로 마친 다음이었다.

시세 조종 혐의를 받고 있는 공시를 통해 큰 돈을 번 주체는 결국 미래와 사람뿐이었다. 미래와 사람은 사상 유례없는 경제 한파로 인해 기업들이 자금난에 허덕이던 지난해 두 차례 유상증자를 실시해 4백13억원을 끌어 모았다. 이렇게 모은 자금을 밑천으로 미래와 사람은 올해 들어 한국종합기술금융과 (주)인터넷경매 등 유망한 사업체들을 차례로 인수했다.

미래와 사람이 발표한 공시의 가장 큰 문제점은 성사 가능성이 매우 불투명한 계약 내용을 마치 당장이라도 실현할 수 있는 것처럼 과장해 발표했다는데 있다. 미래와 사람도 공시에 문제가 있었음을 일부 시인했다. 이 회사 관계자들은 “결과적으로 (공시를) 잘못한 셈이 되었다. 우리 예상보다 일이 훨씬 더디게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시중에 떠도는 것처럼 가짜 계약을 맺었던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공시는 정확하고 신속해야 한다. 유언비어가 난무하는 증권 시장에서 기업이 자기 이름을 걸고 발표하는 공시만큼 확실한 투자 정보는 없기 때문이다. 삼성증권 리서치센터 김군호 투자전략팀장은 “투자 방향을 제시하는 우리들도 공시를 매우 중시한다. 기업 정보를 많이 입수하지만 그 정확성에 대해서는 우리 역시 일반 투자자와 마찬가지로 판단하기 힘들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현실은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다. 증권거래소 상장공시부에 따르면, 올해 들어 11월 16일까지 집계된 상장 법인들의 ‘불성실 공시’ 건수는 63건에 달한다. 같은 기간의 전체 공시 건수 6천1백55건에 비하면 1% 남짓한 비율이지만, 한건 한건이 투자와 직결되는 정보라는 점을 감안하면 결코 작지 않은 숫자이다.

불성실 공시의 유형은 공시 불이행 · 번복 · 변경의 세 가지로 나뉜다. 이 가운데 특히 공시를 번복하거나 변경하는 경우는 주가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불성실 공시 63건 가운데 번복이 6건, 변경이 11건이나 된다.

코스닥 시장은 사정이 더 나쁘다. 코스닥 증권시장 공시팀에 따르면, 올해 초부터 11월 16일까지 전체 공시 건수 6천여 건 가운데 불성실 공시로 지목된 경우가 1백4건에 달한다(번복 15건 · 변경 5건). 그렇지만 불성실 공시를 제재하는 수단은 고작해야 ‘매매 거래 정지’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증시 관계자들은 매매 거래 정지가 기업보다 투자자에게 더 불리한 조치여서 벌칙 취지에 맞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집단소송제, 재계 반대로 국회에서 ‘낮잠’
상장 기업들이 불성실하게 공시하는 행위를 막기 윟 자본주의 선진국들은 대게 ‘집단소송제’를 채택하고 있다. 집단소송제란, 피해자들이 개별적으로 소송을 벌이기 힘든 경우에 대표자가 피해자 전원을 대표해 배상액을 일괄 청구하는 소송방식을 일컫는다. 승소할 경우 배상금이 피해자들에게 귀속되는 점이, 혜택이 기업에 돌아가는 현행 ‘주주 대표 소송제’와 다르다.

한국에도 현재 국민회의가 작성한 집단소송제 입법안이 국회에 제출되어 있지만, 제계의 거센 반발에 부딪혀 계속 계류되어 있는 상태이다. 재계의 반대 논리는 집단소송제가 남용될 경우 기업 활동을 하는 데 타격을 크게 입을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참여연대 경제민주화위원회 위원장 장하성 교수(고려대 · 경영학)는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남용이 무서워 집단소송제를 못하겠다는 이야기는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겠다’는 말과 똑같다. 남용 여부를 누가 판단하는가. 기업 경영자? 금감원 관리? 이는 바로 법원이 판단해야 할 문제다. 시장 경제에서 가장 바람직한 피해 구제 방법은 당사자가 직접 관여할 여건을 마련하는 것이다”

금감원 공시 관계자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다. 금감원 기업공시국 정용선 공시심사실장은 “공시주의를 달성하는 가장 바람직한 방법은 형사 책임보다 민사 책임을 묻는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미국은 한국처럼 복잡한 공시 의무 조항 없이도 기업들이 충실하게 정보를 공개한다. 그릇된 정보를 발표했다가 투자자에게 손실을 끼칠 경우, ‘징벌적 손해 배상’에 따라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막대한 배상금을 물어야 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소송이 무서워서라도 정확하지 않은 정보는 공개할 수 없다.

한국에서는 소송까지 가더라도 투자자들에게 손해액만큼만 배상할 뿐이다. 시세 조종 혐의가 적발될 경우 시세 차익의 3배까지 벌금을 물릴 수 있는 처벌 주항이 90년대 초에 신설되었지만, 적용된 사례는 별로 없다. 그만큼 경제 사범에 대한 처벌이 관대한 것이다.

공시는 ‘기업의 양심’ 이라고 일컬어진다. 또 그것은 자기네를 믿고 돈을 맡기는 투자자들에 대해 기업이 지는 의무이다. 기업 정신이 비뚤어지는 것을 예방하고 징계하는 집단소송제라는 대안이 있는데도, 정작 그것을 앞장서서 반대하는 세력 역시 기업들이다. 한국 기업 양심의 현주소가 그런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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