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선 체제 급발진하는가
  • 이철현 기자 (leon@sisapress.com)
  • 승인 2006.05.09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정몽구 현대·기아차그룹 회장 구속을 계기로 아들 정의선 사장이 ‘그룹 운전대’를 예상보다 빨리 잡을 것으로 보인다. 정의선 체제는 안착할 것인지, 정사장의 친위대는 누구인지, 어떤
자동차는 ‘첨단 공학기술의 꽃’이라고 일컬어지건만, 이 자동차를 양산하는 현대·기아차그룹의 경영지배구조는 중세 봉건시대를 연상케 하고 있다. 정몽구 현대·기아차그룹 회장(MK)이 구속되자 주요 계열사의 거의 모든 의사 결정이 일시적으로 중단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외아들 정의선 기아차 사장 행보가 회사 안팎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마치 봉건 영주에게 불상사가 발생하면 가신들이 적자를 옹립하며 혼란을 수습하는 식이다. 김학주 삼성증권 리서치센터장은 “(MK 구속 사건을 계기로) 정의선 사장으로 그룹 경영권을 이전하는 작업이 당초 계획보다 빨라질 것이다”라고 전망했다.

MK는 일본 센코쿠(戰國) 시대 다이묘(大名)가 영지를 통치하듯 그룹을 이끌어왔다. MK는 ‘현장 경영’이라는 명목으로 크고 작은 주요 계열사 현안을 직접 챙겼다. 권한 이양에 인색했다는 평이 나올 만하다. 삼성그룹에 이학수 부회장이라는 2인자가 있는 것과 달리 현대차그룹에서 이런 존재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물론 현대차그룹에도 부회장급 경영인이 여덟 명이나 있다. 하지만 이들은 전문 경영인이라기보다는 가신(家臣)에 가깝다는 평을 그룹 내에서 듣고 있다. 각자 배정된 자기 영지를 관리할 뿐 그 이상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김동진 현대차 부회장·설영흥 중국사업 담당 부회장·이전갑 기획총괄부회장·정순원 로템 부회장·이용도 현대제철 부회장·김원갑 현대하이스코 부회장·한규환 현대모비스 부회장·김평기 위아 부회장은 주요 현안을 MK에게 보고하고 회장의 지침에 따라 업무를 처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 전직 현대차 고위 임원은 “2인자는커녕 혹시 실세로 비치지나 아닐까 극도로 몸을 사리며 전전긍긍할 정도다”라고 말했다. <시사저널>이 몇 해 전 ‘현대차 이끄는 실세 3인방’이라는 기획을 추진할 때도 3인방으로 거론된 이들은 펄쩍 뛰며 취재를 거부했다. 심지어 MK보다 언론에 자주 나오는 것조차 ‘불경죄’로 여길 지경이다. 정회장과 동고동락했던 박정인 전 현대모비스 회장 같은 무게 있는 인사마저도 언론의 주목을 받는 것을 조심스러워했다.

정사장 역시 언론에 자주 노출되는 것을 꺼린다. 하지만 꺼리는 사유는 전문 경영인들과 판이하다. 지분 상속이 아직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세습 경영자라는 이미지가 두드러지는 것을 피하고 참여연대를 비롯한 시민단체의 비판과 견제를 의식해서라는 것이 그룹 안팎에서 나오는 얘기다. 정사장은 일찌감치 후계자로 낙점받아 체계적으로 경영 수업을 받아왔다.

그는 1999년 현대차 구매담당 이사로 입사한 이후 국내 영업본부·기획실·기획총괄본부 등에서 두루 경험을 쌓았다. 2003년에는 기아차 기획실장을 맡아 슬로바키아 공장과 중국 제2공장 건설 작업을 주도했다. 2004년 말까지 현대차 기획총괄본부 부본부장·기아차 기획실장 부사장을 거쳐 2005년 초 기아차 사장에 올랐다. 정사장은 지금 현대차 기획총괄·기아차 해외사업·현대모비스 기획·정보기술 담당 사장을 맡고 있다. 핵심 계열사 세 곳의 경영에 공식적으로 관여하고 있으므로 그룹 차원의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는 이는 사실상 정사장뿐이다.

정의선, MK의 ‘의사 전달자’ 구실만 할 수도

그럼에도 현대차그룹은 ‘MK가 석방될 때까지 계열사 독립경영체제 방식으로 그룹을 이끌어갈 것이며 정의선 사장은 기아차 대표이사로서 역할을 수행할 뿐’이라며 정사장의 역할 확대론을 일축했다. 경영권 세습 과정에서 발생한 비자금 조성이 총수 구속이라는 사태까지 발생시킨 것을 감안하면, 정사장이 전면에 나서는 것이 또 다른 역풍을 맞을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또 정사장이 이제 36세에 불과해 그룹 경영을 맡기기에는 아직 젊지 않느냐는 소리도 나온다. 이와 같은 지적이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평온한 시절 얘기다. 지금은 오너이자 최고경영자가 자리를 비운 비상 시국이다.

현대차그룹은 지금까지 ‘글로벌 톱5’라는 경영 목표를 이루기 위해 국내외에서 대규모 사업을 벌이고 있다. 세 개 해외공장 건설 프로젝트가 최고경영자의 의사결정을 기다리고 있으며 투자 규모가 5조원이 넘는 당진 일관 제철소 건설 계획도 추진되고 있다. 그룹 차원의 대형 프로젝트에 관한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이는 MK가 유일하다. MK가 중대 현안에 대해서는 옥중에서 결재할 것이라는 추론이 그럴듯해 보이는 것은 이런 정황 때문이다.

회장 유고 국면에서 정사장은 과연 어떤 역할을 하게 될까. 현대차 안팎의 관측을 종합하면 그는 MK와 주요 계열사 부회장단과 사장단이 참여하는 경영협의체 사이를 연결하는 고리 역할을 할 것으로 점쳐지고 있다. 가령 현대차그룹은 MK가 구속되자 기아차 미국 조지아 주 공장과 현대차 체코 노세비체 공장 착공식을 무기한 연기한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정사장이 아버지를 두 차례 면회하고 나서 다시 추진 일정이 잡힌 것이다. 두 차례 면회에서 구체적으로 무슨 말이 오갔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룹 경영과 관련한 주요 현안에 대한 MK의 지침이 전달된 것으로 추정된다.

MK의 영어 기간이 그리 오래가지 않으리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기는 하다. 검찰 수사가 일단락되면 조만간 보석으로 나올 것이라는 이런 관측은 한국 자동차 산업에서 MK가 차지하는 위상이 만만치 않은 데다 각계에서 탄원서가 이어지고 환율 급락·고유가라는 악재가 잇따르고 있다는 경제 현실에서 비롯한다. MK가 조만간 구치소에서 나온다면, 정사장은 다시 기아차 해외담당 사장이라는 본래 자리로 돌아갈 수 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구속 기간이 길어지고 실형까지 받는 사태로 치닫는다면, 정사장이 그룹 경영 전면에 나설 수밖에 없으리라는 관측이 힘을 얻고 있다. 과거 SK그룹이 손길승·최태원  ‘투톱 체제’라는 과도기를 거친 것처럼 김동진 부회장이나 이전갑 부회장이 정사장과 함께 그룹 공동대표를 맡을 수는 있으나 역시 무게중심은 정사장에게 치우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전직 현대차 고위 임원은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여 회장께서 오랫동안 나오지 못하면 정의선 사장밖에 대안이 없다. 현대 일가는 다른 기업과 달리 왕회장(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시절부터 회사 최고경영자는 정씨여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뿌리깊다”라고 말했다. 

그 탓인지 벌써부터 ‘정의선 체제’를 뒷받침할 인사들이 오르내린다. 우선 ‘진골’ 출신들이 꼽힌다. 정사장 친인척 관계인 정씨 일가 3세 경영인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초고속 승진을 거듭해 지난해 초부터 일제히 계열사 사장에 올랐다. 정사장과 연배가 비슷한 3세 경영인들은 정사장만은 못해도 주요 계열사 핵심 부서를 돌며 경영 수업을 받아왔다. 이들이 정의선 체제의 친위대 구실을 하리라는 추측이 나온다.

사촌·매형이 핵심으로 떠오를 듯

그 대표 인물이 MK 셋째 사위이자 정사장의 매형인 신성재 현대하이스코 사장이다. 신사장은 자동차 주요 소재인 냉연강판을 생산하는 현대하이스코를 이끌고 있다. 이 회사는 현대차 그룹에서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신사장은 한보철강 인수 작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MK 둘째 사위인 정태영 현대카드·현대캐피털 사장은 현대차그룹 금융부문을 맡고 있다. 매사추세츠 공과대학(MIT) 경영대학원 슬론스쿨을 졸업하고 1987년 현대종합상사에 입사했다. 현대정공 기획 관리 재정 담당 전무와 현대·기아차 구매총괄본부 부본부장을 지냈다. 정태영 사장은 종로학원 정경진 회장의 맏아들로 가업을 이어받아 학원 사업 경영도 부업으로 겸하고 있다.

정의선 사장 사촌인 정일선 BNG스틸 사장은 법정관리 기업이었던 삼미특수강을 인수해 경영을 정상화하는 과정에서 뛰어난 업무 추진력을 보여주었다. 또 정회장의 맏딸 정성이씨는 종합광고대행사 이노션의 대주주이자 경영에 참여하고 있다.

이들 친인척 인사와 달리 전문 경영인 가운데 정의선 체제를 뒷받침할 만한 인사로 주목받는 이는 아직 없다. 워낙 잦은 인사로 자주 바뀌었기 때문에 정사장과 오랫동안 호흡을 맞추어온 인사를 사내에서는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정사장과 정의선 사장의 경영 수업을 도맡은 개인 교사로 분류되는 인물도 없다. 조남홍 기아차 국내영업 담당 사장이 정사장과 함께 기아차를 이끌고 있지만 호흡을 맞춘 지 10개월밖에 되지 않는다.

정의선 사람으로 꼽히는 인사는 아직 없지만 정의선호가 출범하면 MK의 가신으로 분류되는 상당수 고위 인사들은 정리될 것으로 점쳐지고 있다. 잦은 인사 탓이기는 하지만 비자금 조성과 사용에 관한 정보를 누설해 이번 사태를 촉발시킨 데 대해 책임을 물어야 하고 비슷한 사태가 재발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조직과 인사 시스템에 전면적인 손질을 가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무엇보다도 회사 안팎에서 비난의 초점이 되고 있는 핵심 인사에 대한 ‘숙청’이 불가피하리라는 소문이 돌고 있다. 또 정의선 사장은 그가 좋든 싫든 전문 경영인 역할과 이사회의 기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경영지배구조 개선안을 들고 나오지 않을 수 있으리라는 전망도 있다. 세계 7대 자동차그룹을 독단적으로 이끌던 ‘MK식’ 경영 방식이 한계에 부딪혔기 때문이다(딸린 기사 참조).

정의선 체제가 순조롭게 출범하려면 우선 난제 하나를 해결해야 한다. 기존 주주를 설득하는 작업이다. 현대차는 외국인 지분이 50%를 넘고 MK 지분이 5%밖에 되지 않는다. 따라서 기존 주주에게 정의선 사장이 MK의 대안이라는 것을 납득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러자면 정사장은 경영 능력을 입증해야 한다.

재계와 증권가에서는 정사장이 현재 추진하는 세계 생산거점 전략과 올해 신차 출시 계획을 깔끔하게 마무리 짓고 내수 위축과 환율 하락에 따른 영업 실적 악화를 개선해야 하는 당면 과제가 놓여 있다는 것이다. 경영권 편법 승계라는 비난 여론을 무마해야 하는 정사장으로서는 이래저래 실적 개선이라는 전공 필수 과목에서 A학점을 받아야 한다. 즉 오너의 아들이 아니라 ‘전문 경영인’으로서 발군의 실력을 보여야 하는 것이다. 사실 아버지 MK도 처음에는 그랬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