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찍으면 끝장이다” 사진 현장 무질서
  • 문정우 기자 ()
  • 승인 2006.05.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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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잉 취재로 ‘피의자=죄인’…부상 등 불상사 잇따라 공정 경쟁 전통 세우고 편집장은 무리한 요구 말아야

언론 매체가 급격히 증가하면서 매체 간의 경쟁이 더욱 치열해지고 있다. 특히 취재현장의 제일선에서 뛰는 사진기자들 간의 경쟁은 이제 단순한 몸싸움 차원을 넘어 취재 자체를 위협할 지경에 이르고 있다.

90년 봄 정호용씨가 대구 서갑구 보궐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발표했을 때, 선거사무실에 모인 기자 1백여명과 정씨의 운동원 사이에 몸싸움이 벌어져 사무실 집기가 박살나고 카메라 수십대가 부서졌다. 그때만 해도 취재현장에서 간혹 일어날 수 있는 일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됐으나 그 뒤 비슷한 형태의 크고 작은 사고가 잇따랐다.

지난해 김영삼 대통령이 민자당 대통령후보로 확정된 후 얼마 뒤 기자회견을 가졌을 때도 늦게 도착한 방송사의 기자들이 밀치는 바람에 김대통령이 아끼던 도자기가 박살나기도 했다. 남북고위급 회담이 열렸을 때는 판문점을 지나 서울로 향하는 북한 대표 일행을 취재하던 방송사 취재 차량이 차량 통행을 방해해 북한 대표가 타고 있던 차가 교통사고를 일으켜 수행원들이 부상당한 일도 있다.

포토라인 선정·공동취재 제도 활용 절실

얼마 전 정주영 국민당 전 대표가 검찰에 소환되던 날은 밀고 밀치는 아수라장 속에서 정대표가 카메라에 이마를 부딪쳐 상처를 입었다. 이 날 사진기자 50여명은 검찰청 입구 계단에서 V자 형태로 늘어서 정대표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정대표 주위에 국민당 의원과 취재기자 들이 몰려 시야가 가려지자 사진기자들이 일제히 정대표쪽으로 돌진하는 바람에 충돌이 일어났다. 또 지난 2월8일 입시부정 혐의로 경찰에 출두하던 광운데 교무처장은 취재기자 1백30여명에게 이리저리 밀리다가 입술이 찢어져 피를 흘렸다.

취재현장에서 이같은 불상사가 계속 일어나자 지난 2월26일 한국신문편집인협회·한국사진기자회·한국TV카메라기자회는 공동으로 한국언론회관에서 전국 신문·방송·통신 사진부장 세미나를 열었다.

이날 세미나에서 이병훈씨(<조선일보> 사진부장)는 “이대로 가면 취재진이나 경찰에 가려 취재 대상은 보여주지 못하고 수라장이 된 취재현장만 보여줄 수밖에 없을지 모른다. 그런 일을 막으려면 사진기자들의 자체 노력 못지않게 취재원?사진편집자?수사기관의 협조와 이해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부장은 이어 취재현장의 질서를 잡으려면 취재에 들어가기 전에 사진기자들끼리 포토라인을 정하고 또 공동취재(풀) 제도를 적극 활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포토라인이란, 현장에 있는 모든 기자가 서로 몸을 부딪치지 않고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공통의 대상을 취재할 수 있는 선을 의미한다. 또 공동취재란 몇개 사의 기자가 대표로 취재해 취재한 결과를 모든 신문사가 공유하는 방식을 말한다.

취재현장을 뛰는 李相魯 기자(MBC 카메라취재부)는 “현재와 같은 무질서한 취재환경 속에서 만들어진 방송이나 신문의 영상은 국민이 냉정하고 건전한 판단을 내릴 수 없도록 만든다??고 지적했다. 이기자는 ??떼밀고 떼밀리는 아수라장 속에 있는 피의자의 모습을 고스란히 안방에 전달함으로써 피의자는 변론의 기회도 갖지 못하고 법원이 아닌 독자나 시청자에 의해 유죄판결을 받게 된다??고 말했다.

이기자는 취재현장의 질서를 바로잡을 수 있는 포토라인을 선정하거나 공동취재가 정착하기 위해서는 몇가지 전제 조건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선 기자들이 공정하게 경쟁하겠다는 의식을 갖고 전통을 세워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대한항공 007편이 사할린 해역에 격추됐을 때 일본 와카나이 관제탑에서 한국 기자들이 일본 기자들과 한데 뒤섞여 취재했다. 그때 일본 기자 중 한명이 앞으로 나서서 허공에 금을 그었는데 그것이 바로 포토라인이 되었다. 일본 기자들은 누구도 그 포토라인을 침범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의 두개 방송사만은 예외였다. 왜 두 개 방송사 기자만 포토라인을 침범했을까. 이기자는 “그 때는 sbs가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희화적으로 표현했다.

두번째로 지적된 것은 현장에서 생기는 고충을 고려하지 않는 편집책임자들의 경직된 태도이다. 포토라인은 사진기자 누구에게나 공평한 기회를 주지는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편집책임자들이 가장 좋은 각도에서 찍은 사진만 요구한다면 포토라인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 만약 현재와 같이 편집책임자들이 사진 기자들을 다그친다면 포토라인을 준수하기는 고사하고 검사의 방문을 박차고 들어가 조사를 받는 피의자를 향해 플래시를 터뜨리는 과잉 취재조차 고칠 수 없다는 것이다.

기자들이 포토라인을 지키지 못하도록 만드는 중요한 요소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검찰이나 경찰의 비협조와 취재방해이다. 수사기관들은 지금까지 자기네 필요에 따라 피의자를 노출하거나 빼돌렸다. 피의자를 노출하지 않으려다 기자들에게 들통이 나면 카메라를 뺏거나 폭행하기도 했다. ‘수서 비리????정보사터 부정 사건?? 때는 철저하게 피의자의 방패막이 역할을 했으나 시국 사건이나 간첩단 사건 때는 기자들이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피의자들을 카메라 앞으로 내몰았다.

수사기관의 ‘과잉 보호?추태 연출??도 문제

똑같은 대통령선거법 위반 사건인 김기춘씨 사건과 정주영씨 사건을 처리하는 검찰의 태도도 대조적이었다. 김기춘씨를 소환 했을 때는 철저한 경비로 김씨가 품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최대한 신경썼으나 정주영씨의 경우는 그대로 방치해 추태가 연출되도록 했다. 그 때문에 정주영씨가 다친 다음 정씨측에서는 “검찰에서 의도적으로 혼란을 조장했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형이 확정되지 않은 피의자에 대한 보도원칙이 정해져 있지 않은 것도 문제점으로 지적됐다. 현재는 검찰이나 경찰의 자의적 판단에 따라, 혹은 사진기자들의 요령에 따라 피의자의 사진이 선별적으로 공개되는 형편이다.

공인인 경우, 혹은 공적인 이익과 관련이 있는 피의자의 경우에만 공개한다는 등의 원칙이 확립돼 있지 않기 때문에 시청자나 독자는 필사적으로 점퍼를 뒤집어쓰거나 신문지로 얼굴을 가리는 피의자들의 볼썽사나운 모습을 자주 접하게 된다. 또 재판이 끝나기 전에는 모든 피의자가 무죄라는 원칙을 무시한 채 피의자에게 수의를 입히고 포승줄로 묶는 현재의 제도 아래서 만약 피의자의 사진이 공개된다면 피의자의 인권은 언제나 침해될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 언론은 아직 미국 NBC나 일본 NHK처럼 화면을 조작하는 단계에는 이르지 않았으나, 그같은 일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취재현장에서 공정하게 경쟁하는 전통을 확립할 필요가 있다. 또 수사기관이 그들의 편의에 따라 취재 통제의 고삐를 늦췄다가 풀었다가 하면서 언론을 이용하는 ‘한국적 상황??도 뜯어고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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