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 체첸, 푸틴을 위해 싸운다?
  • 모스크바 · 이건욱(자유기고가) ()
  • 승인 1999.11.11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러시아도 체첸 강공 주도… 차기 대권에 유리한 고지 점령

체첸 반군의 다게스탄 침공과 모스크바 시내 연쇄 폭탄 테러로 촉발된 러시아 · 체첸 간의 전쟁이 한달 넘게 계속되고 있다. 전쟁 초기만 해도 러시아 연방군은 체첸의 테레크 강 주변을 점령해 안전지대를 구축한 뒤 폭격과 포격으로 반군 세력을 압박한다는‘온건한’전략을 세웠다. 그러나 군부의 강경한 입장과 크렘린측의 정치적 의도가 맞물려 강공책으로 선회한 것으로 알려졌다.

 러시아 연방군은 체첸 수도 그로즈니에 강력한 공격을 퍼붓고 있으며, 발레리 마닐로프 국방부 제1참모장은“현재 상황만으로도 1~2개월 이내에 군사 작전을 끝낼 수 있다”라고 밝혔다. 지난 10월18일 런던에서 가진 기자회견을 통해 그는 △반군에 대한 후방 지원을 차단하고 △테러를 노리고 침투하는 체첸 반군을 봉쇄하며 △집결한 반군을 섬멸하고 △식량 등 반군을 지원하는 사회기반을 제거할 목적으로 체첸의 동부 · 서부 · 북부에 안전지대를 넓혀 가는 작전을 펼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그로즈니에 진입하거나 체첸을 전부 장악할 필요가 없으며, 포격과 공습이 나머지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기자 회견과 달리 러시아 연방군은 그로즈니 중심부를 미사일로 공격하는 등 폭격과 포격을 가하고 있으며, 이에 맞서 체첸군은 시내 곳곳에 참호를 파고 요새를 구축하는 등 언제 있을지 모를 지상군 침공에 대비하고 있다. 아슬란 마스하도프 체첸 대통령은 지난 10월17일 러시아에 협상을 제안했고, 19일에는 이번 전쟁의 발단이 된 테러범들을 공개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러시아가 강공책을 고수하자 마스하도프 대통령은 일전을 각오하고 있다고 한다. 지난 10월26일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은 체첸 사태 발발 이후 한 달여만에 처음으로 기자회견을 갖고, 이번 작전을 진두지휘한 블라디미르 푸틴 총리를 칭찬하면서 체첸 공격을 공식으로 승인했다. 이와 함께 러시아는 반군 지도자 샤밀바사예프의 목에 현상금 백만 달러를 걸었다고 국방부 관계자가 밝혔다. 그에 따르면, 연방군의 겐나디 트로셰프 장군은“러시아의 특수부대원이든 체첸인이든 누구든지 바사예프의 목을 베어오면 백만 달러를 주겠다”라고 약속했다.(아래 상자 기사 참조).

 군사 전문가들은 이번 전쟁의 목적이 테러 세력을 섬멸하는 데 있으므로, 굳이 테러 주동 세력이 아닌 마스하도프가 지배하는 그로즈니와 그 외곽 지대를 심하게 공격할 필요는 없으며, 대신 샤밀바사예프 등이 게릴라전을 펼칠 남부 산악 지대에 전투력을 집중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체첸 반군은 산악 지대로 들어가 게릴라전을 벌이는 동시에 몇몇 러시아 주요 도시에 테러를 가하는 전술을 계획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따라 러시아 연방군은 산악 지대와 국경에 포위망을 구축하고, 서두르지 않고 조심스럽게 압박하는 전략을 쓸 것이 예상된다. 하지만 1~2개월 내에 상황이 끝날 것이라는 마닐로프 제1참모장의 말과 달리, 2~3주 후부터 시작되는 겨울 기간에는 전선이 교착될 것이므로 내년 봄이나 되어야 본격적인 섬멸 작전이 시작되리라고 군사 전문가들은 예상한다.

난민 돕기 위해 유엔 대표단 파견
 전쟁이 지속되면서 체첸의 난민 문제가 심각한 사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전쟁을 피해 인접국인 잉구셰티아로 피난민이 몰려들고 잇는데, 그 수가 20만 명을 넘어섰다. 난민들은 텐트 · 식량 등이 부족해 심각한 상황에 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루슬란 아우셰프 잉구셰티아 대통령은 러시아 정부에 긴급 구호를 요청했으며, 알렉산드르쇼이구 러시아 재해대책본부장도 난민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10월23일부터 잉구셰티아로 가는 국경은 완전히 봉쇄되었고, 이에 따라 하루 3천명에 달하던 난민의 이동이 중단되었다.

 러시아 연방보안국은 테러 요원들이 난민 사이에 숨어 러시아로 침투하고 있다며‘반군 지도자 샤밀 바사예프가 러시아 내부 목표물을 공격하라고 명령했기 때문에 국경 봉쇄가 불가피하다’고 전했다. 하지만 루슬란 아우셰프 잉구셰티아 대통령은“민간인들이 러시아 연방군의 공격 때문에 피해를 많이 보고 있으며, 이러한 참극이 방송 매체를 통해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막기 위해 러시아가 국경을 봉쇄했다”라고 비난했다. 그는 난민이 대부분 노약자 · 부녀자 · 어린이라며, 국경 봉쇄는 심각한 인권 침해라고 주장했다.

 이에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은 10월28일 러시아 · 체첸 전쟁에서 발생한 피난민을 돕기 위해 11월 초 대표단을 파견하겠다고 밝혔다. 아난 총장은 대변인 성명을 통해 유엔 대표단이 잉구셰티아를 비롯한 체첸 접경 지역을 방문할 수 있도록 러시아가 허용했다고 말했다. 아난 총장은 또 이날 러시아 연방군이 체첸 수도 그로즈니의 80%를 봉쇄하는 등 체첸 전역에 격렬한 공격을 가한 데 대해 “체첸 사태가 민간인들에게 미칠 피해를 매우 우려하고 있다”라며 양측에 자제를 촉구했다.
 
러시아 정치권, 특별한 논평 없어‘눈길’
 이번 전쟁이 일어나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 현재 가장 설득력 있는 분석은 체첸 반군의 다게스탄 침공과 모스크바 아파트 폭탄 테러가 원인이라는 것이다. 이는 러시아 정부가 공식으로 밝혔듯이, 이번 군사 행동이 테러 세력 섬멸이 목적이지, 94~96년과 같은 전면전은 아니라고 한 데서 알수 있다.

 단지 이상한 것은 94~96년 체첸 전쟁 때 신랄하게 정부를 비난했던 정치권이 이번 전쟁에 대해 특별한 논평을 내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이번 전쟁의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모스크바 아파트 테러여서 일반 국민이 이번 군사 작전에 대해 그다지 크게 비난하지 않고 있으며, 러시아 정부가 국회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 전쟁 대신‘대테러작전’이라는 이름으로 군사력을 사용했기 때문에 정치권이 간섭할 명분이 적어서 그런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정치권이 이번 전쟁을 지지하건 반대하건 결과는 푸틴 총리에게 유리할 뿐이라는계산이 이미 섰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번 전쟁의 최대 수혜자는 단연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총리이다. 옐친 대통령의 후계자인 그는 체첸 반군의 테러에 강력하게 대응하고 군과 경찰을 완전히 장악함으로써 강력한 차기 대권 주자로 떠올랐다. 여론 조사 결과 그는 겐나디 주가노프 공산당 당수와 예브게니 프리마코프 전 총리 등 쟁쟁한 경쟁자들을 제치고 1위를 차지해, 내년 6월에 있을 대통령 선거에서 대권을 거머쥘 가능성이 더욱 커졌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