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뒤통수 치는 정부
  • 소성민 기자 ()
  • 승인 1999.11.11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율배반적‘LPG · 승합차 정책’으로 혼란 · 피해 극심

액화 석유 가스(LPG:Liquefied Pet-rolem Gas)의 대체 에너지는 LBG(Liquefied Blood Gas; 액화 혈액 가스)? 10월23일 LPG 가격을 대폭 올려 왜곡된 수송 연료 가격 체계를 바로잡겠다는 정부 방침이 정해지자, 이를 비나하는 네티즌들의 목소리가 PC통신에 쇄도했다. 한 시민(ID '아그니')은, 분노로 피가 끓을 때 발생하는 증기를 액화한 LBG야말로 한국에 너무도 풍부한 천연 자원이라면서, 앞으로 이를 이요한 자동차를 개발할 일만 남았다고 '피끓는' 조크를 던졌다(10월26일 천리안).

 분노하는 시민 대다수는 이미 LPG용 승합차를 구입한 사람들이다. 이들이 화를 내는 가장 큰 이유는 싼 연료비 하나 믿고 무리해서 LPG용 승합차를 장만했다가 뒤통수를 맞았기 때문이다. 5년만 타면 승용차 한 대 값을 절약할 수 있다고 생각해 빚까지 내어 LPG용 승합차를 구입한 사람이 부지기수이다. 이들은 지금껏 자동차 회사의 판촉 활동을 방관해 온 정부가 왜 갑자기 LPG 가격을 대폭 올리겠다고 하는지 의아해 한다.

 사건의 발단은 96년 12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건설교통부는 자동차관리법 시행규칙을 개정해 2000년 1월1일부터 7~10인승 승합차를 승용차로 분류하기로 결정했다. 승합차는 승용차와 달리 안전도 검사에서 충돌 시험을 비롯한 8개 항목을 면제받기 때문에 교통안전을 관장하는 건교부가 승합차를 안전 검사가 철저한 승용차로 바꾸어 교통사고 피해를 줄이려고 신설한 시행규칙이었다.

 문제는 이 시행규칙과 상충하는 건교부 고시 하나가 그 전부터 존속되어 왔다는 점이다. 89년 건교부는 환경 오염을 낮추자는 취지로 7~10인승 승합차에 대해서는 LPG를 연료로 사용할 수 있도록 규정한‘LPG 사용자동차 및 관리 기준’이라는 고시를 마련했다. 이 고식 바뀌지 않는다면 2000년부터 생산되는 10인승 이하 승합차는 승용차로 분류되기 때문에 LPG를 연료로 쓸 수 없게 된다.

 10인승 이하 승합차가 승용차로 분류될 경우, 올해 선풍적 인기를 끌거나 그럴 것으로 예상되던 기아자동차의 카렌스 · 카니발, 현대자동차의 트라제, 대우자동차의 레조 등 LPG를 연료로 사용하는‘RV(Recreation Vehicle;레저용 차량)’붐이 시들 것은 불 보듯 뻔하다.

 경제 한파에서 이제 막 벗어나려는 자동차 회사들은 발목을 붙잡히는 셈이고, 내년 상반기까지 줄을 선 LPG용 승합차 구매 계약자들에게는 꿈에서 깨어나라는 경고나 다름없는 조처이다. 그렇다면 정부는 왜 그같은 사실을 빤히 알면서도 2000년을 겨우 두어 달 남겨 놓은 시점에서‘딴죽’을 건 것일까.
 
정부, 정책 실패 책임 국민에게 떠넘겨
 10인승 이하 승합차에 LPG를 쓸 수 있도록 한정한 건교부 고시는 10년짜리 한시 조항이어서 별도 조처가 없을 경우 올해 2월 자동 폐기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별도 조처가 생겼다. 규제 개혁 위원회가 차종을 구분해 연료를 사용하도록 귲어한 현행 법규가 규제 철폐라는 시대 요구에 맞지 않는다고 지적한 것이다.

 한 달 뒤인 3월, 해당 고시가 그대로 산업자원부 소관인‘액화 석유가스의 안전 및 사업관리법 시행 규칙’으로 이관되었다. 산자부는 산하 연구기관인 에너지 경제연구원에 용역을 주어 대안을 모색해왔다. 그래서 지난 9월 마련한 대안이‘에너지 가격 제도 개선 방안’이었다.

 이 방안을 토대로 에너지경제연구원은 현행 휘발유 · 경유 · LPG가격을 단계적으로 3대 1.7대1로 조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제안을 내 놓았다(76쪽 상자 기사 참조). 이때만 해도 2000년 초부터 10인승 이하 승합차를 예정대로 승용차로 분류하고 그에 따라 LPG 사용도 금하겠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10월 하순에 접어들어 정부가 그같은 방침을 정했다는 소식이 흘러나오자 문제가 커졌다, 정부의방침은 한마디로‘법대로’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올해 1~8월에 LPG용 승합차가 5만6천여 대나 쏟아져 나올 수 있도록 승인한 것도 정부였다.

 이율배반적인 행정에 업계나 소비자들이 거세게 반발했다. 그러자 정부는 자동차관리법 시행규칙을 1년 연기하는 대신, 모든 문제가 왜곡된 에너지 가격 체계에서 말미암았다며 경유와 LPG값을 대폭 인상하겠다는 방침을 제시했다. 차종간 연료 사용 규제를 철폐해 어떤 차종도 경유나 LPG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자동차 관리법 시행규칙이 공포된 뒤 3년 동안 아무런 대안도 내놓지 않은 정부가 며칠 사이에 세금을 많이 걷어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처방을 내린 것이다. 실정(失政)에 대한 부담을 자동차 업계와 소비자에게 떠넘긴 셈이다.
 
산자부 · 건교부, 서로“네 탓”타령
 산자부는 그 책임을 건교부 탓으로 돌렸다. 산자부 가스산업과는“2000년부터 LPG를 못 쓰게 하려 했다면 상충하는 시행규칙과 고시를 건교부가 미리 손질해야 했다. 올해 LPG용 승합차들이 생산될 수 있도록 계속 형식 승인을 내 준 곳도 건교부 아니가”라고 지적했다.

 건교부는 항변한다. 건교부 자동차관리과는“3월부터 고시를 이관해 간 산자부는 무엇했는가. 연료 사용문제는 원래 산자부 소관 아닌가. 건교부가 형식 승인을 내 주었다지만 그런 식으로 따지자면 산자부는 연비 승인, 환경부는 배출 가스 인증을 맡고 있지 않은가”라고 항변했다.

 서로 발뺌하지만 두 곳 모두 책임을 면할 길이 없다. 건교부는 올해 2월가지 시행규칙과 충돌하는 고시 내용을 전혀 손질하지 않아 결국 문제가 야기될 소지를 키웠다. 또 내년부터 10인승 이하 승합차를 승용차로 바꿀 것을 정한 자동차관리법 시행규칙을 개정해 달라고 자동차 업계가 올해 3 · 7월 두 차례나 건의했지만 뚜렷한 답변을 하지 않았다.

 산자부 역시 올해 3월 문제의 불시가 된 고시를 고스란히 이관받고서도 아무런 조처를 취하지 않았다. 연료를 관장하는 산자부가 특히 비난받을 대목은, 97년부터 자동차 업계가 한국 자동차공업협회 명의로 산자부장관에게 수 차례 건의서를 냈는데도 대책을 세우지 않았던 점이다. 자동차 업계는 10인승 이하 승합차가 승용차가 되더라도 계속 LPG를 연료로 쓰게 해 달라고 건의해 왓다.

 무사안일한 행정의 직접 책임은 건교부와 산자부에 있지만, 재정경제부나 행정자치부가 보이‘방관 속의 방관’또한 지나칠 수 없다. 자동차 관련 세금을 통해 재경부는 국세(특소세 · 취득세)를, 행정부는 지방세(등록세 · 자동차세 · 공채 · 면허세)를 걷는다. 휘발유 차량을 몰던 국민이 계속 LPG용 승합차로 몰린다는 것은 세수가 감소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재경부 소비자세제과는“올해 RV붐이 불기 전부터 현행 에너지 가격 체계에 문제가 많다고 생각했다. 특히 LPG는 면세유인데, 면세 받을 이유가 없는 사람들까지 몰고 다니지 않는가”라고 말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들 역시 아무런 무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정부가 명확한 대책을 세우지 않자 자동차 업계는 계획대로 LPG용 승합차 개발을 추진했다. 이 대목에서 업계 또한 비난을 면하기 힘들다. 만일 정부가 당초대로 모순되는 조항을 손질하지 않을 경우, 소비자를 볼모로 삼아 정부에 압력을 가하겠다는‘복안’을 갖고 있었다고 의심받을 수 있다.

 정부는 올해 안으로 산자부 · 건교부 · 재경부 · 환경부 4개 부처로 공동기획단을 구성해 내년 상반기가지 최종 대책을 마련할 계획이다.
 
자동차 회사, 판매량 급감해‘울상’
 ‘청정연료’라는 LPG 사용을 권장해야 할 환경부마저 뜨악한 표정을 짓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한국산 승합차에 쓰이는 LPG가 부탄이어서 환경오염을 줄이는 효과가 휘발유보다 뛰어나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외국, 특히 LPG를 많이 사용하는 네덜란드 같은 나라는 부탄보다 탄소 함유량이 적은 프로판을 주로 쓴다.

 환경부 교통공해과는“LPG용 승합차가 경유차량을 대신한다면 LPG값을 많이 올리는 데 반대하겠지만, 지금처럼 휘발유 차량을 대체하는 상황이라면 곤란하다”라는 입장이다.

 LPG용 승합차 붐으로 즐거운 비명을 지르던 자동차 업계는 요즘 뚝뚝 떨어지는 판매량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10월18일 첫 출시된 현대의 트라제XG는 하루 7백~1천1백 대 팔리던 것이 LPG 가격 문제가 발생한 뒤부터 3백~4백 대로 뚝 떨어졌다.‘카3형제’로 불리는 카렌스 · 카니발 · 카스타로 급속히 옛 명성을 회복한 기아의 LPG용 승합차들 역시 판매량이 급감하고 있다. 대우는 열악한 재정 형편에서도 3천억원이나 쏟아부어 만든 레조를 아직 시판조차 하지 못한 상황이어서 설상가상이다.

 내년 3~4월 이전에는 LPG 가격 인상 폭이 공개되지 않을 조짐이어서 업계는 물론 소비자들의 혼란이 계속될 전망이다. 핑퐁 게임 하듯이 책임 떠넘기기에만 급급한 정부와 팔고 보자는 상술만 발휘한 자동차 제조회사 사이에서 국민만 속을 끓이고 있다.      

蘇成玟 기자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