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자연의 공생 국학 속에 해답 있다
  • 경북 안동 · 박성준 기자 ()
  • 승인 1999.11.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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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 국제 학술 대회, 생태론 대한 모색

 프랜시스 베이컨과 존로크는 서양 문명사 측면에서 보면 과학의 진보를 가능케 한 일등공신으로 꼽힌다. 이들의 경험주의 철학은 서양인의 사유 전통에서 만물을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근대 합리주의 사고의 실마리를 찾아준 것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만약 그들이 타임 캡슐을 타고 과학 문명에 의해 생태계가 마구잡이로 파괴되는 20세기 말 상황으로 옮겨온다면 사정은 달라질 것이다. 그들은 졸지에 자연의 역적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베이컨은 자연을‘인간의 노예로 만들어 착취해야 할 대상’으로 보았고, 로크 역시 자연을 인간의 노동에 의해‘순치하고 정복해야 할 대상’으로 보았다. 이쯤되면 제아무리 위대한 철학자라도 오늘날 서양 생태론자의 거센 공격 앞에서 살아남기 힘들다.

 그렇다면 동양의 경우는 어떤가. 서양의 철학자 보다는 형편이 나은 편이다. 뒤늦게 자본주의를 받아들였고, 사유방식 면에서도 동양이 생태주의면에서 서양보다 훨씬 더 많은 희망과 가능성을 제시할 것으로 판단되어 왔던 것이다.

생태론, 동양이 서양보다‘희망적’
 과연 이같은 판단은 옳은가. 동양 학문. 특히 국학의 전통안에 서양에 도움을 줄 만한 자연친화적 유산이 있는가. 만약 있다면 인간과 자연의 공생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계승할 수 있을까. 10월29~30일 경북 안동 대학에서 열린‘한국학 국제 학술회의’는 학자들이 인문학의 영역에서, 특히 국학의 처지에서 바로 이같은 문제를 진지하게 성찰하고 나름의 해답을 찾아보는 자리였다.

 한국학과 인접 학문 분야의 전문가 30여 명이 참석해 열띤 토론을 벌인 이번 학술 대회는, 안동대가 매년 열고 있는 국제 규모의 국학 관련 학술대회로 올해 네 번째를 맞았다. 이번 행사의 대주제는‘인간과 자연이 함께 하는 국학’. 주최측은 이같은 대주제를 내건 이유에 대해‘국학의 복고적 · 회고적 경향을 지양하고, 이를 오히려 현실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의역사적 원점이자 출발점으로 삼기 위해서였다’고 설명했다.

 이번 행사의 의의는 무엇보다도 한국학(또는 국학)이‘인간과 자연의 행복한 화해(공생 또는 상생)’라는 20세기 말 인류사 최대 과제에 적지않은 시사점을 던져준다는 데 있다. 전통 과학자의 자연관에서부터, 문예학 · 설화 · 풍수지리 사상 · 전통 철학 · 무속 등 다양한 갈래에서 가능성이 모색되었던 것이다.

 기조 강연을 한 장회익 교수(서울대 · 물리학)는 서양 과학자인 갈릴레오와, 성리학자로서 독창적 우주론을 서술한 조선의 장현광(1554~1637)사상을 대비해 그 가능성을 탐색했다. 장교수는 갈릴레오의 자연관을‘방사선적 시각’으로, 장현광의 자연관을‘동심원적 시각’으로 정의한다. 방사선적 시각은, 관측 주체(인간)가 사물이라는 대상을 향해 조명등을 비룿듯 일방으로 조명해 가는 시각이다. 이에 비해 동심원적 시각은 대상의 사실 여부보다 이것이 우리 삶과 맺고 있는‘관계’에 더 비중을 두는 시각이다. 이에 따르면, 장현광의 시각이자 동양의 시각이었던 동심원적 시각은 서양의 방사선적 시각이 크게 위세를 떨친 뒤로 퇴락했지만, 이제야말로 현재의 문화사적 과제에 이바지할 뜻있는 접근법이라는 것이다.

 <선인들의 공부법> <나의 아버지 박지원> 같은 저서를 통해 이름을 얻은 소장 국문학자 박희병 교수(서울대 · 국문학)는 연암 박지원의 명심(溟心)개념을 소개하며 아예 국학을 중심으로 한‘비판적 생태 문예학’을 주창하고 나섰다. 그가 말하는 명심이란,‘외물(外物-자연)과 내아(內我-인간)의 구분이 사라지고 양자가 통일된 마음상태’또는 ‘감각적 인식을 넘어선 주객 합일의 심경’을 뜻한다. 또 그가 말하는 생태 문예학은 안으로는‘자연과의 조화를 중시하는 동아시아 사상의 우량한 전통’에 유의하고, 밖으로는 마르크스주의 문예학 등 이른바‘비판철학’을 흡수해 서양 자본주의의 반생태적 논리에 맞서자는 것이다.

 이번 학술대회에서는 이 같은 제안 · 제언과는 별도로, 국학 여러 분야에서 자연과 친화한 전통사례를 찾아내는 작업도 다각도로 진행되었다. 행사 첫날 바표된 최창조씨(전 서울대 교수)의‘자생 풍수에 담긴 인간과 자연의 관계’, 임재해 교수(안동대 국학부 · 민속학)의‘설화에 나타난 자연 친화적 성격과 한국인의 자연관’이 대표적이다. 또 이튿날 발표된 김용헌 교수(안동대 국학부 · 철학)의‘생태학적 위기와 전통 철학’, 러시아 블라디미르 티코노프 교수의‘유라시아 민속의 자연관과 한국 고대 무속’과 같은 논문도 넓게 보면 이와 비슷한 범주에 속한다.

자연 친화 사례 다각도로 찾아
 자생 풍수(또는 비보 풍수)에서 자연(땅)은‘어머니’로 인식된다. 땅인 어머니가 건강할 때에는 인간이 그 품에 깃들여 삶을 누리고, 땅이 병들었을 대에는 어머니에게 효도하는 것처럼 피곤을 풀어드리고 병을 고쳐 주는 것이 자생풍수라는 전통 사상에 깃든 정신이라는 것이다. 최씨에 따르면, 이 같은 자생 풍수 사상이 후대로 내려가면서‘기복풍수’또는‘음택풍수’로 바뀌었다며, 이를 단군릉, 마한, 가야 고분 · 왕건릉 등 실례를 통해 입증했다. 서양에서‘토지윤리’나‘환경윤리’개념이 생겨나기 훨씬 이전에 이미 한국의 전통 사상, 특히 민중의 사고에는 자연에 대한 윤리의식이 자리 잡고 있었던 셈이다.

 민간에서 전승된 설화에서도 비슷한 양상을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 임재해 교수의 주장이다. 한국의 설화에는 사람이 산을 자르거나 바위를 깨뜨렸다가, 즉 자연물을 훼손했다가 멸문의 화를 입거나 재앙을 당한 얘기가 많이 나온다. 이는 자연이 지닌 천연성(天然性)과 생명성을 민중이 인정하고, 이 같은 천연성 · 생명성이 인간의 선악 마저 판단한다는 민중의 사고 방식을 반증하는 사례라는 것이다.

 설화 속에서 자연은‘인격’을 갖고 있다. 임재해 교수는 이 같은 자연관을 자연친화적일 뿐 아니라 상생적(相生的)이기도 하다며 그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 인간과 자연의 단순한 공존이 아니라 상생을 이룩할 수 있는 실마리를 한국의 설화가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학술 대회 이튿날 발표된 김용헌 교수의 논문은 서양 철학 사조, 특히 근대 이후 사유방식의 특징을 △무한 진보 이념 △자연 지배 신화 △과학 기술 맹신이라고 정의하며 동양적 사유 전통으로 돌아갈 것을 제안했다. 그에 따르면, 동양의 자연관은 전일주의와 생명주의를 특징으로 한다.  전일주의란 자연(또는 우주)에 물질세계와 정신세계가 다 같이 포괄되어 있어 양자가 한 덩어리라고 생각하는 경향을 말하며, 생명주의란 모든 만물이 보편적인 생명의 흐름에 참여하여 큰 변화의 흐름과 한몸이되어 간다는 사상 경향이다. 즉 동양의 사상에서는 그것이 유가이든 도가이든 무생물도 생물의 관점에서 이해해 자연을 지배의 대상이 아니라 배려와 존중의 대상으로 볼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블라디미르 티코노프 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이 같은 사유 전통은 역사 시기 어느 한때 갑자기 돌출한 것이 아니라 아주 오래전부터 한국인(또는 동아시아인)에게 매우 익숙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티코노프는 유라시아 민속에 고나한 풍부한 러시아쪽 자료와, 장기간에 걸친 국내(한국)현지 조사를 통해 한국의 고대 무속과 유라시아 민속의 유사성을 비교 조사해왔고, 그 결과물의 일부를 이번 학술대회에서 발표했다.

 이같은 과정을 통해 그가 밝힌 한국 고대 세계관(우주관)의 기본 얼개는, 세계가 지하 · 지상 · 천상‘3세(三世)’로 나뉘어 있고, 지고신(至高神)인 천신은 독수리 · 오리 · 뻐꾸기 등 성스러운 새나 박달나무 따위 성스러운 나무로 3세를 연결한다는 것이다. 자연 친화성 측면에서 이같은 고대인의 세계인식이 시사하는 바는 분명하다. 즉, 한국인은 태고 적부터 자연물을, 지상 세계를 주재하는 신령스러운 존재로 간주하는 전통을 이어왔던 것이다.

국학 지나친 신비화 경계해야
 이번 행사에 참석한 학자들은 국학이 생태 위기를 극복하는 데 매우 자랑할만한 유산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 대체로 동의했다. 하지만 거친 일반화와 지나친 자기 확인은 오히려 냉정한 판단을 그르치고 전통사상을 성급하게 신비화할 위험이 있다는 지적도 제기 되었다. 행사 말미에‘자연 탈마 법화와 휴머니즘 재마 법화’라는 주제를 발표한 구승회 교수(동국대 · 국민윤리과)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구교수가 발표한 요지는, 최근 서양 학계 일각에서 일기 시작한 반과학주의 · 사회생물학 · 생태신비주의 · 포스트모더니즘 따위 사조가 인간의 이성을 부정해 오히려 생태 위기를 합리적으로 해결하는 길을 막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구교수는 이같은 주장을‘휴머니즘 재마법화’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일찍이 독일 철학자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계몽주의가 인간을 신화의 마법으로부터 해방시킨 대신, 이를 통해 다시금 인간을 야만 상태로 되돌려 놓았다고 비판했다. 구교수는 바로 이 지점에서 독일 철학자들의 개념을 원용해 이성을 재마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바꾸어 말해, 지탄받고 있는 인간의 이성에 다시 마법을 걸어 야만 상태에 있는 인간을 문명 상태로 옮겨 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구교수의 발언은 학술 대회 분위기를 전반적으로 지배했던‘동양 전통의 자연 친화성’과 대립되는 주장으로 받아들여져 참석자 사이에 열띤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시간 제약 때문에 학술대회는 이같은 쟁점을 깊이 다루지 못한 채 서둘러 막을 내렸다.

 이번 대회는 국학계가 모처럼 집단으로 생태 위기를 돌아보고, 그 대안을 모색하느 자리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었다. 그러나 예산이 모자라 한국학 여러 분야를 포괄하여 다루지 못했다는 점, 시간 제약으로 충분한 논의가 이루어지지 못한 점 등은 이번 학술대회의 한계로 지적되었다.                                  
경북 안동 ·   朴晟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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