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패션 세계 ‘구제품’이 좋다
  • 성우제 기자 ()
  • 승인 1999.12.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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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 색상 튀고, 값싸고 … 젊은층에 새 유행 물결

문화 현상

 70년대 말까지 한국 20대 남자들을 사로잡은 패션이 있었다. 검정물 들인 미제 군복. 그옷 한 벌만 있으면 그들은 사시사철 옷걱정 없이 지낼 수 있었다. 물 들인 군복만큼 폼 나고 질긴 옷을 구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이른바 구제품이다.

 그 구제품이 이즈음 다시 살아나고 있다. 몇 년 전까지 서울 이대앞·압구정동 등 앞서가는 패션을 선호하는 젊은이가 들끓던 곳의 소규모 점포에서 흘러나온 구제품은, 올 들어 큰 시장의 유력한 전략 상품 가운데 하나로 떠올랐다. 지난 8월 말 남대문시장에 ‘센스타운’(02-773-6449)이라는 구제품 전문 매장이 생겨나 점포가 37개 들어섰으며, 3년 전 문을 연 동대문 프레야타운의 구제품 매장은 지난 8월 지하2층에서 지상 5층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60개 점포로 규모를 확장했다. ‘고물 옷’에 대한 대접이 지상으로 수직 상승한 셈이다.

 프레야타운과 더불어 동대문 일대를 젊은이의 공간으로 만들어버린 ‘백화점형 상가’밀리오레에도 구제품 전문 매장이 들어섰으며, 두산타워에도 오래된 스웨터와 물 빠진 청바지가 나와 있다. 젊은이가 가는 곳에 구제품이 있는 것이다.

 이뿐 아니다. 12월에는 남대문시장에 ‘젤라’, 을지로 6가에 ‘엠플리스’라는 구제품 전문 상가가 문을 연다. 4~5년 전만 해도 거리 패션을 리드하던 이들이 주로 찾던 구제품은, 올 여름 이후 대중화 물결을 타기 시작했다.

 구제품의 역사는 미군 군정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에는 바다 건너에서 구호 물자로 건너온 헌 옷을 크면 큰 대로 그냥 입고 다닌 ‘구제품 신사’, 그 옷을 뒤집어 다시 재봉해 입고 다닌 ‘우라카이 신사’를 ‘빈대떡 신사’ 만큼 흔하게 볼 수 있었다. 구호 물자라고 해서 구제품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입을 옷이 없어 남의 옷을 얻어 입던 그리 아름답지 않은 구제품 전통은 70년대 말까지 이어졌는데, 최근 들어서는 그 의미가 바뀌어 지속되고 있다. 이제는 ‘구제(救濟)품’이 아니라 ‘구제(舊製)품’ 이다.

구제품 인기 비결은 개성적인 색상·디자인
 구제품 상인들은 그들의 사업을 ‘고물 장사’라고 부른다. 백화점과 시장의 옷가게에 새 옷이 넘쳐나는 요즘, 고물이 각광받는 까닭은 무엇일까? 구제품 시장을 찾는 사람들은 구제품의 매력을 옷자체의 색상과 개성 있는 디자인에서 찾는다. 구제품이 대중화하기 전에 이 옷에 매료된 이들은, 독특한 색상과 디자인을 찾던 화가나 연구배우 같은 예술가가 주류였다.

 90년대 들어 그같은 예술가 취향이 젊은층을 파고들었다. 90년대 중반에 나타난 ‘찢어진 청바지’ ‘빈(貧)티 패션’ 들이 구제품에서 출발한 대표적인 경향이다. 그 경향은 지금 10대까지 내려가 있다. 서울 종로 4가 광장시장의 신일상가는 한국전쟁 직후 가마니를 깔고 옷을 팔기 시작한 ‘구제품의 메카’이다. 상가 2~3층에는 50년 가까이 구제품을 팔아온 점포 1백20여개가 빽빽하다.

 상인들에 따르면 90년대 중반 이후 광장 시장을 찾는 얼굴이 바뀌었다. 20대를 전후한 젊은층이 유력한 소비자로 등장한 것이다. 옷과 목도리를 사러 경기도 성남에서 왔다는 송지연·배수경 양(성일여고 3년)은 광장시장의 3년 단골이다. 그들은 구제품 시장을 찾게 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길거리에서 똑같은 옷을 입은 사람을 만나면 창피해서 피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옷을 사면 그런 걱정은 전혀 하지 않아도 된다. 외국에서 들어온 지나간 옷이어서 세계에서 단 한 벌밖에 없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만원을 가지고 나와 2~3개 살 수 있다는 점도 참 좋다.”

 나만 입을 수 있는 옷을 싸게 살 수 있다는 점이 청소년을 포함한 젊은층에게 인기를 끄는 가장 큰 요인이라는 얘기이다. “우리 반에서 절반 정도는 구제품 시장을 찾는다. 시장에 나오면 남자애들도 눈에 많이 띤다”라고 성남의 그 여고생들은 말한다.

 구제품 시장에서 구할 수 있는 것은 모자에서 신발에 이르는 이른바 ‘토털 패션’이다. 프레야타운에서 만난 채윤성씨(남·20)는 구제품 세계에 빠져든 지 2년째 된 마니아이다. 멋있고 개성을 드러낼 수 있어서 구제품을 좋아한다는 그는, 자기가 입은 옷이 ‘싼데, 또 비싸다’라고 말했다. 운동화 3만원, 청바지 5만원, 티셔츠 2만원, 고어텍스 점퍼 12만원, 모자 만원. 비록 남이 입고 쓰던 물건이지만 23만원으로 독특한 색상과 디자인을 한 외국산 유명 브랜드로 멋을 내고 있는 셈이다. 값비싼 모피든 청바지든 구제품의 가격은 새 옷의 10분의 1수준이다.

 구제품 시장에 나와 있는 옷들은 거의 대부분 미국 캐나다 유럽 일본 홍콩 등 외국에서 들어온 것들이다. 국산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소비자의 호응도가 낮기 때문이다. 물건을 들여온 상인들이 솔질하고 깁고 다리미질하고, 때로는 빨래까지 해서 내놓기 때문에 전문 매장에 나온 구제품은 집의 옷장에 걸려 있는 옷과 다름없이 깨끗한 편이다.

 “몇년 전에는 너덜너덜하고 찢어진 청바지가 유행했으나, 요즘은 젊은 손님들이 깨끗한 옷을 많이 찾는다. 그들은 ‘보물찾기’하듯 옷을 고르는 재미도 즐기는 것 같다.” 프레야타운에서 구제품 점포‘키치’를 운영하는 조경아씨의 말이다. 조씨에 따르면, 요즘 들어 구제품이 관심을 끄는 주요 요인은 IMF 체제로 비어 버린 고객의 주머니 사정과, 올해부터 실시된 구제품 수입 자유화이다. 외국 유명 브랜드를 선호하는 이들이 백화점 대신 구제품 시장으로 발길을 돌린 데다, 정식 무역 루트를 통해 비교적 좋은 물건을 들여올 수 있다는 것이다.

 몇 년 전만 해도 대중은 구제품에 대해 ‘남이 입다 버린 옷’ ‘죽은 사람이 입었을지도 모르는 옷’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그같은 인식이 바뀐 것은 오래된 물건의 멋을 아는 이들이 하나둘 늘어난 데서 말미암았지만, 구제품의 디자인이 신상품에 그대로 반영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거리 패션 디자이너들이 구제품 옷을 복제하는 경향이 생겨, 구제품 시장의 유행이 일반 시장보다 열흘 가량 앞선다는 말이 나온다. 게다가 떨어진 옷을 자르거나 풀어 장갑·모자·가방 따위를 만드는 이른바 ‘촌티 패션’이 구제품에서 생겨나기도 했다.

재활용되는 구제품, 생명력도 길다
 패션 선진국은 구제품의 선진국이기도 하다. 구제품을 쓰레기로 버리지 않고 재활용 시장에 내놓는 전통이 구미는 백년, 일본은 50년에 이르며, 최근 한국의 구제품도 중국과 동남아시아로 나가고 있다. 옷이 지닌 생명의 30%를 사용하면 싫증이 나는 법인데, 그 나머지 70%가 구제품이라는 상품으로 등장해 재활용된다. 사람의 ‘몸때’가 덕지덕지 묻은 구제품 옷이 어쩌면 새상품보다 생명력이 훨씬 긴지도 모른다.

 실제로 구제품에 맛들인 이들은 옷을 예상보다 훨씬 오래 입는다고 말한다. 디자인이 물리지 않고 옷의 마무리가 비교적 잘된 옷이 구제품으로 살아 남기도 하거니와, 옷이나 신발이 해지면 그것을 손질하는 재미도 만만치 않다는 얘기이다.

 “한국에도 패션 선진국처럼 옷을 통해 자기 주장을 강하게 드러내는 시대가 왔다. 요즘 젊은층의 경향은 탈트랜드가 트랜드이다.” 패션 전문가 김대권씨는 ‘개성 지상주의’가 구제품에 대한 관심으로 연결되었다고 말했다.

 외국의 유명 브랜드를 싸게 살 수 있다고는 하지만, 초보자들은 안목을 가질 때까지 반드시 ‘수업료’를 치러야 한다. 구제품 시장에서 만난 이들은 수업료를 아낄 수 있는 방법을 이렇게 소개했다.

 △사기 전에 구멍 난 데가 없는지 요모조모 잘 뜯어 보아야 한다. 욕 먹을 것을 감수하고 쌓인 옷을 뒤집어 보는 것은 기본이다. △싸다고 여러 벌을 사면 반드시 실수한다. 마음에 꼭 드는 것 한두 가지만 사람 △실수할 것 같다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들면 일단 보류하라 △일본 옷은 품질이 다소 떨어지니 될 수록 피하라 △‘먼데서 왔는데요’라면서 값을 깎아라. 5천원짜리면 최소한 천원은 깎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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