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의 목소리’ 담은 불온한 영화 잔치
  • 노순동 기자 (soon@sisapress.com)
  • 승인 1999.12.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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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인권영화제, 탈없이 열려 … 44 작품 선보여

 “영화제를 시작한 이래 후회하지 않은 날이 며칠 되지 않는다. 오늘처럼 객석에 들어찬 관객을 볼 때, 영화 잘 봤노라는 감사의 말을 들을 때, 그리고 별탈 없이 행사가 끝날 때.”

 인권운동사랑방 대표 서준식씨는, 축사인지 푸념인지 모를 인사말로 제4회 인권영화제(11월26일~12월2일)의 문을 열었다. 그의 푸념은 단순한 엄살이 아니다. 영화제 준비에 들여야 하는 품도 품이려니와, 당국과 신경전을 벌이는 데 어지간히 지친 기색이다.

 서씨는 2년전 홍익대에서 인권영화제를 강행하다가 구속 기소되었다. 혐의 제목은 국가보안법·음반 및 비디오에 관한 법률·보안관찰법 위반 혐의와 건조물 침입 등 무려 네가지. 1심에서 집행유예 1년6개월을 선고받고 항소를 제기한 상태다. 봉쇄와 강행으로 점철된 인권영화제의 역사는, 이미 그 자체가 인권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사례가 되었다.

 지난 11월26일 동국대. 쌀쌀해진 날씨에도 불구하고 교내에 마련된 행사장에는 앳된 학생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 어머니들은 객석 앞자리를 지켜 주었다. 참가자들은 중무장한 경찰이 행사장을 에워싸고, 물과 전기를 끊어 행사 진행을 막았던 전례를 상기하며 ‘전경 없는 풍경’에 낯설어했다. 하객 자격으로 무대에 오른 서울대 김진균 교수는 ‘진입하기가 너무 쉬워 낯설다“며 웃었다.

 별탈 없이 막이 올랐지만 영화제 자체가 특별해 유순해진 것은 아니다. 응당 밟아야 할 법적 절차를 따르지 않은 ‘불법 행사’인 데다가, 2년 전 이적 표현물로 낙인 찍혀 파란을 불러 일으킨 <레드 헌트>의 후속작 <레드 헌트2>(하늬영상·연출 조성봉)을 비롯해 ‘불온한 작품’이 무더기로 선보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빗거리도 없지 않다. 현행 법이 공개 상영 전에 심의를 받도록 하고 있지만, 여러 가지 예외 규정을 두고 있어 얼마든지 당국의 체면을 살려주면서 행사를 진행할 길이 열려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준식 대표는 이런 체면치레를 하지 않았다. 제도 권력이 보아도 좋은 것과,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미리 재단하는 사전 심의 자체를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현행 심의제는 국가가 영화를 사전에 걸렀던 과거의 검열과 다를 것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완전등급제가 아닌 바에야 칼자루를 쥔 손이 국가 기구에서 민간 기구로 바뀌었다는 것이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국내 출품작 14편으로 부쩍 늘어
 그는 ‘인권영화제가 언제까지 살아 남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제도와의 마찰도 문제려니와, 갈수록 수더분하고 소박한 흐름이 살아남기 힘든 세태를 의식한 것이다. 가수 정태춘씨는 ‘부디 영화제가 소수 목소리를 대변하는 장으로 자리매김하기 바란다’고 말했다.

 이번 영화제에는 ‘투박하고도 불온한 꿈’을 담은 영화가 44편 소개되었다. 해마다 4~5편에 불과하던 국내 출품작이 14편으로 부적 늘어난 것이 눈에 띄었다.

 4·3 제주 항쟁 때 총에 맞아 턱을 잃은 후 무명천으로 턱을 감싼 채 살아온 진아영 할머니(63T)의 이야기를 담은 <무명천 할머니>(4·3 다큐멘터리 제작소·김동만)와, 제주도의 집단 악몽을 더듬는 <레드 헌트2>는 4·3 항쟁의 상혼이 쉽게 아물기 어려운 것임을 보여준다. 민가협 어머니의 삶을 담담히 좇은 <민들레>(99년·빨간 눈사람·이경순 최하동하)는 이미 부산국제영화제와 서울다큐멘터리 영화제를 통해 이름을 널리 알린 작품이다.

‘올해의 인권영화상’ 신설
 이밖에 △인천 빈민가에 자리잡은 공부방의 일상을 담은 <기찻길 옆 공부방>(99년·푸른 영상제장·서경화 연출) △청구성심병원 노조의 활동을 담은 <꼭 한걸음씩>(99년·노동자뉴스제작단·태준식) △인권 유린 현장으로 지탄을 받았던 에바다 농아학교의 현재를 추적한 <끝나지 않은 싸움 에바다>(99년·다큐인·박종필) △현대자동차 정리 해고 과정을 기록한 <열대야>와, 3년여에 걸친 철거 반대 운동으로 임시 거주 시설을 확보하고 지역 공공체를 꾸려가는 행당동 사람들의 삶을 담은 <또 하나의 세상-행당동 사람들2>등이 관객의 관심을 모았다.

 인권영화제측은 어려운 환경에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있는 단체를 지원한다는 취지에서 ‘올해의 인권영화상’을 신설했는데, 대한변호사협회 인권후원회가 후원을 맡아 한결 힘이 되고 있다.

 인권영화제의 관심은 국내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11월30일 시애틀에서 시작된 ‘세계무역기구 뉴라운드 협상’과 발을 맞추어 뉴라운드에 반대하는 깃발을 올렸으며, 미국 인권운동의 현안 가운데 하나인 무미아 아부 자말 구명 운동에도 동참했다(오른쪽 상자 기사 참조).

 인권 영화제 주최측은 무미아 아부 자말이 놓인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다큐멘터리 <모든 권력을 민중에게>를 개막작으로 상영한 데 이어, 영화제 기간에 관객의 항의 엽서를 접수해 미국대사관에 전달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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