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내 ‘왕따’ 마침내 법정에 서다
  • 김은남 기자 (ken@sisapress.com)
  • 승인 2000.03.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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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생명노조, 따돌림당한 조합원 손배소송 제기

직장내 집단 따돌림(이른바 ‘왕따’)이 법정에 오른다. 학교에서 벌어진 왕따 문제로 소송이 제기된 일은 몇 차례있었어도 직장 왕따가 소송대상이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사건의 발단은 지난해 8월 동부생명보험 주식회사(대표이사 박재원)노동조합이 파업을 마친 시점으로 거슬러올라간다. 당시 동부생명 노조는 1년 6개월동안 밀린 상여금을 지급하고 노조를 인정하라며 서울 본사에서 66일간 농성했다.

 8월10일 노사가 부분 합의에 이르자 농성은 끝이났다. 이날 노사는 7개 항목으로 구성된 합의서를 주고 받았다. 합의서에는 △회사가 노조를 유일 교섭 단체로 인정하며 △파업 참가자에 대해 업무 복귀를 보장하고 신분에 불이익을 주지 안는 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이같은 합의 내용은, 그러나 업무 복귀 당일부터 지켜지지 않았다는 것이 노조측의 주장이다. 파업에 마지막까지 참가했던 조합원은 27명, 노조위원장 박성기씨에 따르면, 이들 조합원 대다수는 △파업 이전에 맡고 있던 고유 업무를 부여받지 못하고 △사무실 출입을 통제당해 교육장 ? 회의실 ?탈의실 따위에서 대기하는가하면 △사직서를 제출하거나 노조를 탈퇴하라는 강요에 시달렸다.

 이 과정에서 집단 따돌림이 광범위한 양상으로 나타났다는 것이 노조측 주장다. 대표적인 사례는 다음과 같다.

정신과 치료받은 조합원도
 노조 사무국장으 맡았던 전 아무개씨(29), 8월16일 동부생명 서서울지국으로 복귀한 전씨에게는하루 종일 업무가 주어지지않았다. 면담 자리에서 담당 국장은 그에게“정상으로근무하고 싶으면 노조를 탈퇴하라, 노조 사람을 어떻게 믿고 업무를 줄 수 있느냐‘라고 말했다.

 지부장 등 중간 간부도 그에게 회유의 협박을 번갈아 해댔다. “너는 그만두게 하든가, 노조를 탈퇴하도록 만들라고 회사가 강한 압력을 가하고 있다. 나를 좀 살려 달라”고 사정하는 간부가 있는가 하면, 부하 직원과 보험설계사 들이 보는 앞에서 “어떻게 뻔뻔하게 사무실로 돌아왔느냐”라고 야유를 퍼부는 간부도 있었다.

그에게 새로 주어진 자리는 사무실 구석에 놓인 임시 책상, 조회용 칠판으로 시야가 차단된 그곳에서 할 일 없는 전씨가 영업실적 ?인사 파일 따위를 뒤적이고 있자 담당 국장으로부터 “허락없이 왜 업무를 하고 있느냐, 이 xx야”라는 욕설이 쏟아졌다. 이러한 일들이 계속되면서 자기를 바라보는 팀장과 보험설계사의 눈빛이 조금씩 달라졌다고 전씨는 주장했다.

 다음날에는 보험설계사와 팀장들이 출입문을 가로막고 전씨의 출근을 저지했다. 몸싸움이 벌어져 전씨는 목?허리?팔에 전치 3주 부상을 이었다. 퇴원한 뒤에도 가해자들은 여전히 욕설을 퍼붓고 문을 안으로 잠그며 전씨를 사무실에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국장에게 시정을 요구했으나 전씨에게 돌아온 것은 “네가 자초한 일 아니냐”라는 대답뿐이었다. 결국 한 달 가까이 계단과 휴게실을 떠돌던 전씨는 압박감을 이기지 못하고 지난해 10월 말 사표를 제출했다.

 서울 중부국 소속 영업소장이면서 파업에 참가했던 김아무개씨(30).입사 동기 중 가장 먼저 소장으로 발령이 날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았던 김씨는 파업 이후 자신을 대하는 상사나 동료들의 태도가 180° 달라졌다고 증언했다. 출근 첫날 국장은 “네가 그러고도 소장이냐? 영업소장이 호사 이익에 반해 데모나 하라고 있는 자리냐?”라고 윽박질렀고, 같은 건물에 근무한 동표 영업소장 딴 “우리 소장들도 너하고 함께 근무 할 수가 없더, 봐라 이제 너하고 같이 밥먹으러 다니나 봐라”라며 압력을 넣었다.

 중부국 한하8개 영업소장 회의에서 김씨는 더큰 모욕을 당했다. 영업국장이 김씨에게 결재판을 집어던지며 “이게(파업 기간) 너희 영업소 실적이다. 이결 영업이라고 하느냐?”라며 포문을 연 것을 시작으로, 동료 소장들로부터 “아유, 김소장이 이 자리에 어떻게 뻔뻔하게 앉아 있어, 나 같으면 돌아오지도 않겠어” “그렇게 안봤는데 정말 같이 일 못랄 사람이구만” 같은 폭언이 쏟아졌다는 것이 김씨의 주장이다. 김씨는 결국 불면증과 좌절감에 시달리다가 업무에 복귀한 지 한달만에 사직했다.

 대구지역국에 근무하는 한 여자 조합원은 석달 가까이 사아들이 조성한 공포 분위기에 시달렸다고 주장했다. 욕설과 폭언은 기본이고 한 지부장은 사무용 펀치를 들고 와 이 여성이 앉아 이는 책상 유리를 잘근잘근 깨며 노조 탈퇴를 종용하기도 했다. 이 여성과 대화를 나눈 동료 직원은 즉각 상사에게 불려가 ‘무슨 얘기를 나눴느냐’고 추궁당했다.

 이같은 따돌림이 계속되면서 급기야는 정신과 치료를 받는 조합원까지 생겨났다. 남서울 지역구에 근무하는 구아무개씨(28)는 업무에 복귀한 직후부터 국장?부장?팀장으로부터 ‘사표를 내라. 우리는 네가 필요 없다“라는 시달림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구씨가 사표를 내지 않고 버티자 그의 책상은 문 밖으로 옮겨졌다.

업무 복귀2주일째, 일이 주어지지 않아 신문만 뒤적이던 그와 이를 읽지 못하게 제지하는 전 아무개 팀장 사이에 언쟁이 붙어다. 감옥도 아닌데 신문도 못읽게 하느냐고 구씨가 저항하자 전팀장이 ‘질긴 x, 나쁜 x'이라는 욕설을 퍼부으며 책상위에 있던 신문 ?약관집 따위를 던졌다는 것이 구씨의 주장이다(전치 2주의 상처를 입은 구씨는 치료비를 전액 지급하는조건으로 전팀장과 합의했다.)

 폭행 사건 이후에도 계속된 사퇴 압력과 정신적 후유증에 시달린 구씨는 결국 정신과를 찾았다. 외상후 스트레스장애, 근섬유통 증후군, 혈관성 두통 등으로 6개월 d상 전문적인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진단을 받은 구씨는 지난해 11월부터 휴직상태이다.

 서울 강남 영업국에 근무하는 윤 아무개씨(31)또 한 병원 신세를 졌다. 업무에 복귀한 뒤 책상 없이 회의실 탁자를 전전한 윤씨는 소속부서원 전체가 말을 걸지 않고, 식사를 함께하지 않으며, 공식적인 회식 자리에도 자신을 참석시키지 않는 집단 따돌림에 시달리다가 지난해 10월부터 정신과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병원에 찾아왔을 때 윤씨는 이미 ‘혼합형 불안우울 장애’를 앓고 있었다는 것이 정신과 전문의 신승철 박사(남서울병원 원장)의 지적이다. 이는 주변으로부터 완전히 고립된 사람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증상이다. 만성적인 스트레스로 인한 두통 ?불면증?신경 과민?무기력증에 시달린 윤씨의 목?어깨근육은 오랜 긴장으로 물리치료가 필요한 만큼 굳어 있었다.(경추염좌)

파업 참가자27명중 19명 사표 제출
 상황이 이쯤되자 지난해 연말 노조 간부 6명이 회사를 당대로 집단 손해배상 소송을 잭하기에 이르러다. “집단 따돌림이 대부분의 영업국에서 동일한 기간, 동일한 모습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회사가 이를 조직적으로 기획했거나 적어도 이를 반조했다는 의심을 가지기에 충분하다”라는 것이 노조측 변호를 맡은 도재형 변호사(덕수합동법률사무소)의 지적이다. 만약 회사가 노조를 무력화하기 위해 집단 따돌림을 조장 내지 방조했다면 이는 명백한 부당 노동 행위에 해당한다.

이에 대해 회사측은 말도 안되는 억지 주장이라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집단 따돌림은 현장 실무자의 감정이 폭발해 일어난 것으로, 회사측은 옿려 이를 다독이기위해 노력했다는 것이다. 소장과 직원이 1대1로 밀착된 관계를 맺고 있는 보험업계 특성상 어느날 갑자기 파업에 참가한다며 야반 도주하드 사라져 버린 직원 때문에 금전적?정신적 피해를 보았다고 호소하는 영업소장이 적지않았다고 회사측의 설명이다.

 실제로 조합원들이 업무에 복귀했을 때 가장 격앙된 반응을 보인 것은 일선 영업소장과 보험설께사였고, 국장?지부장 등 간부는 오히려 이들응 만류하느라 힘이 드렁T다는 것이 서울 남서울지역국 한 영업팀장의 주장이다. 업무를 보좌해야할 직원이두달이상 잘를 비우면서 영업실적이 뚝 떨어진영업소장들이 자발적으로 다수결 투표를 강행해 ‘○○를 해고해 달라’고 타원한 경우까지 있었다는 것ㅇ다.

 그러나 이같은 집단 따돌림이 설사 개별 사업장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해도회사측은 이를 적극 관리?감독하지 않은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 박성기 노조위원장의 지적이다. 회사측이 지난해 8~9월 일선 영업국에 두 차례 공문을 보내 부당 노동 행위를 금지하라고 지시했다지만, 이는 형식적인 절차를 밟은 데 불과할 뿐 현장 조사 한번 이루어 w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과정에서 회사를 그만두는 직원이 속출하는가 하면, ‘조조가입=불이익을 당하는 지름길’이라는 사고가 암암리에 퍼지면서 노조의 존폐자체가 위태로워졌다고 박위원장은 주장했다. 지난해 파업에 마지막까지 참가했던 동부생명 노조원27명 가운ㄷ 3월1일 현재 회사에 남아 있는 이는 8명에 지나지 않는다

이에 대해 박석주 관리팀장은 ‘조조측이 전국공동 순방을 제안한 9월중순, 마침 본사 임원들이 해외 연수차 모두 자리를 비우고 없었기 때문에 현장 조사가 불가능했다’고 해명했다. 대신 조합원이 따도림을 받고 있다고 주장하는 영업국에 대해서는 즉각 전화로 사실 관계를확인하고, 해당 국장을 따로 불러 시정을 지시하는 등 최대한 노력했다는 것이다. 집단 따돌림을 견디다 못해 조합원들이 회사를 떠났다는 노조 주장과 달리높은 이직률은 보험업계의 특성이기도 하다는 것이 박팀장의 반박이다.

 직장내 집단 따돌림이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일 처리 능력이 떨어져, 또는 학연?지연?연령?성별 따위가 문제되어 왕따를 당한 직장인은 과거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다. 그러나 신성한 노동권보장이라는 맥락에서 집단 따돌림 문제를 인식하게 된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다. 국내 최초의 직장인 왕따 소송이라 할 이번 소송이 노동의 권리를 확장하는 또 하나의 게기가 될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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