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영세중립 ‘도마 위’에
  • 베른 진철수 유럽지극장 ()
  • 승인 1991.07.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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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통합 앞두고 재검토…유럽공동체 내 주체성 확립 숙제

 유럽공동체 (EC)를 중심으로 하는 유럽통합의 기운이 강해지면서 촌반중립국 스위스가 수백년 내려온 중립정책을 재검토하기 시작했다.

스위스 하면 두가지 이미지가 떠오른다. 하나는 매우 잘사는 중립국이라는 이미지다. 1인당 국민소득이 2만8천55달러 (89년)로 세계1위의 선진 공업국. 흔히 국제 분쟁의 화해 협상이나 군축회의의 자리로 선택받아 평화를 상징하는 나라. 또 다른 이미지는 잘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요즘 스위스사람들 스스로가 지적하는 고슴도치의 이미지가 그것이다. 2차대전 때 스위스는 덴마크 네덜란드 벨기에 같은 다른 작은 나라들처럼 전쟁에 휘말리지는 않았지만, 나치의 위협 아래서 많은 타격을 받았다. 원래 '자국민 우선' '외국인 혐오'가 특징인 스위스국민은 전쟁 후에도 고슴도치처럼 움츠러드는 심리에 계속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다.

 지금 스위스는 동전의 앞뒤와도 같은 이두가지 이미지에서 탈피하여, 유럽통합 시대에 알맞는 '◎중립'의 길을 모색하느라 고민하고 있다. 과연 스위스가 유럽통합의대열에 끼어 새로운 '주체성'을 확립할 수있을 것인가. 그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스위스의 거취에 많은 사람의 시선이 쏠리고 있다.

 스위스의 중립은 패배에서 비롯되었다. 르네상스 시대인 15세기의 스위스는 한때영토 확장을 꾀하는 침략정책을 추구했다. 그러다가 1515년 밀라노 근처인 마리냔 전투에서 적군에 대패하자 중림의 길을 택하기로 했으며 그후부터는 대외정책에는 자중자애하는 자세로 임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당시에는 '중립'이란 표현을 쓰지 않았으며 전쟁에 불참한다는 뜻으로 기권, 포기의 의미를 가진 '압스탕시웅'이라는 표현을 썼다고 한다.

초기 중립은 통일 유지의 방편
 그 당시에는 중립은 외교를 위한 개념이라기보다는 내치를 위한 개념이었다. 여러자치지역(CANTON)을 느슨하게 묶은 연합체였던 스위스가 만약 중립을 표방하지 않았더라면, 전쟁 때마다 독일어 사용지역은 독일쪽 참전국 편을 들려 하고 불어 사용지역은 프랑스 편을 들려고 함으로써 스위스는 분단의 위험이 컸을 것이다. 종교문제도 마찬가지였다. 가톨릭 신도들 지역과 개신교 신도들 지역이 각기 종교 때문에 다른 참전국 편을 들었다면 분열을 면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처럼 통일 유지의 방편이기도 했던 스위스의 중림정책은 16~17세기를 거치면서 점진적으로 자리를 굳혔다.

 유럽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자 스위스도 재빨리 공업화함으로써 19세기 중엽에 유럽에서 가장 공업화된 나라로 지목되었다. 이러한 공업화의 출발점은 중립 정책과 마찬가지로 자기보존의 본능이었다. 알프스의 산골짜기에는 자원이 없었다. 스위스의 최초의 수출품은 용병이었다는 말이 있다. 큰아들은 농사를 이어나가지만 나머지 아들들은 다른 생계의 길을 찾아야만 했던 것이며, 중세기부터 내려온 스위스 용병들의 용맹성과 충성심의 전통은, 로마 교황청의 경비임무를 지금도 스위스 경호병들이 담당하는 것으로 이어져 있다.

 중립의 길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제각기 다른 나라 군대에 들어간 스위스 용병들이전쟁이 나면 마주 싸워 동족상잔하는 비극을 빛을 때도 있었다. 나폴레옹 전쟁 때는 프랑스군이 스위스를 점령하여 중립은 유명무실한 상태에 빠졌었다. 그러나 1815년 빈회의에서 유럽 제국이 스위스를 영세 중립국으로 승인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스위스의 중립은 역사상 처음으로 국제법 상의승인을 받아 스위스 외교의 기조로 확고한 뿌리를 내렸으며, 스위스는 그후 장장 1백70여년동안 한 번도 외군의 침범을 받지 않고 지내와다. 그후 1907년 제2차 헤이그 국제평화회의에서 중립국가의 권리와의무에 관한 협정이 채택됨으로써 스위스의 영세중립개념은 국제법상 더욱 명료해졌다.

 그러나 2차대전 직후의 중립국 스위스의 입장은 거북했다. 서방 전승국들은 전쟁중에 나치독일과 긴밀한 경제협조관계를 유지해온 스위스에 대한 보복조치로 스위스 상품에 보이콧을감행할 기세를 보이기도했다. 소련은 스위스와의 국교 회복조치를 지연시켰다.

 스위스는 이러한 곤경을 경제력 덕으로 극복할 수 있었다. 유럽 복구에 재력으로 기여할 수 있는 스위스에 대한 국제 사회의 승인은 시간문제에 불과했다. 인구 6백50만여명, 면적은 남한의 절반도 채 안되는 4만1천여km"인 소국이면서도 오늘날 일본 미국 독일 다음으로 경쟁력이 강한경제를 가지고 있는 스위스의 성공 비결은 무엇인가.

 시계 공업의 중심지 '빌'시에서 만난 스워치회사의 H. 유르그 새르 사장은 교육의 성과, 신중한 기업자세, 파괄적 기없에 있어서 현지 적웅력이 뛰어난 점 등 세가지를 들었다 첫째 독일과 마찬가지로 유급제로 기술 교육을 생산현장에서 받는 제도가 발달되어있어 누구나 대학 학위를 받거나 기능직 자격을 획득할 수 있는 길이 트여 있다는 것이다. 둘째로 "스윈스 사람들은 새것을 보고 덥석 덤벼드는 성격이 아니며, 그대신 일단 손을 댔다하면 심사숙고 끝에 한 것이므로 끈질기게 밀고나가는 기질을 갖고 있다"라고 그는 말한다. 매 4분기의 이윤 확보에 승부를 거는 미국식 경영자세보다는 기업의 장기 성과에 초점을 맞추는 일본 스타일에 가깝다는 것이다.

 스위스 사람들은 한 울타리 안에서 여러가지 말이 사용되는 특이한 환경에서 자라난 때문인지 해외근무를 할 때 완전히 그 나라생활에 적응하는 융화력을 가지고 있다고 새르씨는 말한다. 스위스처럼 다국적 기업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경우, 이러한 국제사회에서의 적응력은 큰 도움이 될 수밖에 없다. 그는, 스위스만큼이나 해외 투자 기업이 많은 일본의 경우를 보면 임지에 10년을 머물러도 자녀를 특설일본인 학교에 굳이 보내는데, 이런 일은 서슴지 않고 현지 학교에 자녀를 보내는 스위스 사람들과 매우 대조적이라고 말했다. ·

마음이 놓이는 작고 안전한 나라'
스위스 국립관광공사의 한 직원은 스위스물건이 질이 좋다고 정평이 나 있는 것이 스위스 경제의 비결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지하자원이 없는 나라이의로 부지런히 품질 좋은 물건을 만들어내야만 하는 거시요"라면서 그는 양질의 스위스 제품의 대명사처럼 되어 있는 스위스  육군장교 칼(회중용)과 스위스 시계를 예로 들었다. 그는 관광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말하면서, 호텔 요금 등이 비싸다는 소리를 더러 듣지만 시설이 깨끗하고 친절한 서비스를 제공하면 관광객들은 경비 생각을 안하게 마련이라며 자신만만해 한다. 중립국이라는 점은 관광업에도 이롭다고 그는 주장했다. '마음이 놓이는 작고 안전한 나라'를 관광객들이 찾는다는 것이다. 관광업은 외화 획득면에서 기계공업 화공 의약 제조업 다음으로 비중이 큰 산업이며, 관광업계에 직접 종사하고 있는 인력만 해도 22만5천명이나 된다.

 작년에 기계공업은 상품 수출의 44%를 차지했으며 화공 의약품은 20%, 다음은 시계류 8%, 직물 5%의 순이다. 몇가지 안되는 분야의 생산품이 각기 세계시장에서 끔직한 점유율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 스위스 생산업의 강점으로 되어 있다. 10년 전만해도 기계와 시계산업은 기술개발에 뒤져 경쟁력이 약해졌으나, 80년대 후반부터 기술 개발 투자를 강화함으로써 시장 확보에 성공했다.

 일제 전자팔목시계에 눌려 있던 시계산업은 은행 지원하에 기업구조 재편을 단행, 자동화를 제작공정에 도입한 신제품인 '스워치'를 개발하여 실지를 회복했다. 국제적으로 50 스위스 프랑(약 33달러)으로 가격이 표준화되어 있는 이 신제품이 일으킨 불을 타고 스위스 고급시계의 제조 판매도 활기를 되찾았다. 작년에 스위스 고급시계들은 생산량에 있어서는 전체의 13%를 차지했으나 판매액에 있어서는 세계시장의55%나 차지했다.

다국적 기업의 선봉
스위스 기업 중에는 국내에는 본사와 연구개발부서만을 두고 생산시설의 대부분은 해외에 설치해놓은 경우가 적지 않다. 그 대표적인 예로 네슬레가 꼽힌다. 초콜릿 둥을 만드는 식품 가공업체인이 회사는 세계 각처에 총 10만명의 종업원을 거느리고 있으며, 매상의 98%도 해외에서 올리고 있다. 스워치 회사의 경우도 부품의 반조립은 태국에서 하고 부품생산과 최종 조립만은 스위스에서 하고 있다 . 스워치의 해외 판매량은 전체의 90%에 달하고 있다. 한편 스위스 은행업계는 증권시장의 저조와 이자율 상승 둥으로 작년에는 수익의 15% 감퇴 현상을 겪었을 뿐 아니라, 국제 마약매매조직의 '더러운 돈'을'세탁'해주지 못하도록 하는 둥 스위스 연방정부의 개혁 입법의 여파로 불경기를 맞고 있다. 스위스의 증권 시장은 뉴욕 런던동경 다음으로 큰 규모의 시장이다. 그러나 룩셈부르크 싱가포르 둥이 커가는 것과 반비례하여 기세가 쥐여가고 있어, 여러도시에 흩어져 있는 시장의 통합과 전산화 등 혁신조치가 진행되고 있다.

 스위스 연방정부는 얼마전까지만 해도 EC가입이나 중립 원칙의 수정 내지는 포기를 적극적으로 검토할 의향이 없었다. 스위스가 EC에 가입 안해도 되고, 중림을 고수해도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정부나 여론 지도자들이 스위스가역사의 기로에 와 있다고 느껴 새로운 진로로 돌입하고 싶다 해도 결코 서두를 수 없는 큰 이유가 있다. 그것은 오랜 중립 전통에 안주하려는 국민들의 보수성이다. 이러한 보수성은 1986년에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유엔가입안이 엄청난 표차로 부결되었을때도 나타났으며 EC와의 관계 개선을 의식해서 제안되었던 부가가치세의 도입 제안이 몇주일 전 국민투표에서 부결되었을 때에도 나타났다.

 스위스의 중립 정책은 헌법에 규정되어있는 것이 아니다. 요즘 정부 관리들의 이론에 따르면 중립은 스위스 국익을 위한 외교수단일 뿐이지 그 자체가 외교의 목표는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유엔이나 EC같은 초국가적인 조직에 가입하려면 국민투표를 통해 국민의 승인을 받도록 되어 있다.

"종래의 중립은 거추장스러울 뿐"
 이미 EC가입 신청을 했거나 가입 의사를 밝힌 오스트리아와 스웨덴의 경우는 그들이 중립 정책을 유지한다는 전제하에 EC가입을 허락해달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뜻이 통할 것인지는 두고 보아야 한다. 더구나 요즘 EC 12개국은 EC의 정치적 통합과 군사 안보 역할의 정립을 목표로 협의를 진행시키고 있다. EC가 만약 단일시장 설립 등 경제문제에 한하지 않고 확대된 통합을 시도할 경우 중립을 지키면서 가입하겠다는 나라들의 입장은 복잡해지게 마련이다.

 스위스의 경제는 다른 어느 EC 비가입국가보다도 EC와 밀접하게 얽혀 있다. 스위스 수출치 절반이 EC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말하자면 스위스의 경제방향과 스위스의 중립 외교 방향은 반대로 움직이고 있는 셈이다. 중림문제 전문가인 전 취리히대학 국제법 교수 디트리히 쉰들러씨는 이러한 아이러니를 지적하면서 "만약 스위스가 EC에 가입 안한다 해도 경제적인 손실은 없을것이지만 , 스위스는 EC의 결정과정에 참여하지 못함으로써 소외감을 느끼게 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최근 연방 정부는 20여명의 전문가들로 연구위원회를 만들어 연내에 중립문제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토록 하였다. 스위스의 유럽통합 지지운동 단체는 "종래의 중림은 이제 무의미해졌으며, 오히려 거추장스러울 뿐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만약 전문가들보고서가 이러한 의견에 접근한다 해도 스위스가 '◎중립'쪽으로 쉽게 결단을 내리기는 힘든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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