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퇴르 자산은 쌈질과 품질
  • 정기수 기자 ()
  • 승인 1991.01.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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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유전쟁’ 치르며 창업 3년만에 중견유업체로…전문가들 “과장선전은 지나친 일”

광고를 하기 위해 우유를 만드는 것인지, 우유를 팔기 위해 광고를 하는 것인지 의문이 생길 만큼 무차별 광고공세로 화제를 뿌려온 파스퇴르유업(주)이 창업 3년3개월만에 중견유업체로 변신, 또한번 세상을 놀라게 하고 있다. 지난 87년 9월 이름도 독특한 파스퇴르우유를 시판한 이래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논쟁과 송사를 벌여온 파스퇴르유업. 이같은 ‘싸움질’ 속에 급속한 성장을 거듭, 89년 2백여억원의 매출액을 올려 불과 2년만에 흑자로 돌아섰다. 어느새 우유에서 요구르트, 치즈, 분유, 떠먹는 요구르트 등 거의 모든 유제품을 생산하게 됐고 종업원수도 13명에서 3백명으로 늘었다.

 지난 90년에는 총매출액 3백60억원, 월평균 30억원의 매출을 기록하는 가히 초고속적인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회사측은 91년 매출목표를 7백억~8백억원으로 잡고 있는데 이는 매년 2배 이상의 성장을 독려하고 있는 崔明在 사장의 불도저식 밀어붙이기 경영방침에서 비롯된 것이다.

 최사장은 자기 말대로 “성질이 급한” 사람이다. 급해도 보통 급한 게 아니며 나이 64세에 어울리지 않게 정력이 넘치고 매우 과격하다. 싸움을 걸어오는 상대는 가리지 않고 덤벼들어, 무참히 물어뜯고 사회적 매장도 서슴지 않는 집요한 면을 갖고 있다. 그래서 주변에서는 그를 ‘미친 사람’이라고 말한다. 우유에 미쳐 있다는 뜻이 많지만 그보다 덜 좋은 뜻일 때도 더러 있다.

 전체 유제품시장 점유율에서는 3~4%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그러나 3년만에 이만큼의 눈부신 성장을 이룩하고 향후 1~2년 안에 대유업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될 것이라고 파스퇴르유업은 호언하고 있다. 그 성장비결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최명재 사장을 ‘집중탐구’해볼 필요가 있다. 최명재가 곧 파스퇴르이고 파스퇴르가 곧 최명재이기 때문이다.

 

사장의 투기적 승부사적 기질

 최사장은 비상한 두뇌와 치열한 집념의 소유자로 기회포착이 절묘한 투기적?승부사적 기질의 타고난 사업가로 통한다. 그가 직접 쓰는 광고문안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낙농학자 못지 않은 우유전문가이지만 그에 앞서 ‘사업가’라는 사실을 이해해야만 비로소 파스퇴르의 성장비결을 짐작할 수 있고 타사제품과의 품질차이도 쉽게 알 수 있게 된다.

 최사장은 1927년 전북 김제에서 중농인 최현묵씨의 4남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전주북중을 나와 서울상대 전신인 경성경제전문학교에 진학했으나 본과 3학년 때 6?25가 터져, 이때부터 그의 험한 인생항로가 열리게 됐다. 아버지가 해방 후 이승만 박사 주도의 국민촉성위원회 김제지역위원장을 지냈다 해서 인민군에게 가산을 모조리 뺏기자 실장사를 하며 피난지 부산에서 겨우 학교를 마쳤다.  이현재 전 국무총리, 홍성철 전 통일원장관 등이 이 시절 그와 같이 공부한 서울상대 5회 졸업생들이다.

 최사장의 첫 직장은 상업은행. 그의 타고난 집념은 여기서부터 발휘돼 3년7개월만에 지점장대리로 승진했다. 1년 동안 본점 조사부 별실에서 기거하며 당시 누구도 엄두를 내지 못하던 국내 최초의 은행예규집을 만들어냈는가 하면 상업은행 60년사의 편찬주역이 되기도 했다. 그의 이같은 은행생활 4년은 그가 우유를 얼마만큼 치밀하게 연구하고, 왜 광고문안을 직접 작성하면서까지 소비자를 ‘계몽’하게 됐는지를 유추해볼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은행을 그만둔 이후 몇차례 거듭되는 그의 변신은 돈을 좇는 철저한 사업가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부친이 사망하자 서울로 올라온 동생들과 어머니를 부양하기 위해 최사장은 60년 9월 은행에 사표를 냈다. 은행봉급으로는 먹고 살 수 없었다는 것이 그의 말이나, 일은 더 많이 하면 밥이야 굶겠느냐는 배짱으로 좀더 다이내믹한 생활을 찾기 위해서 과감하게 사표를 던진 것이라고 봐야겠다.

 은행을 나온 33세의 최명재는 영업용택시의 핸들을 잡았다. 새벽 4시부터 밤 12시까지 돈을 벌었다. 그의 무서운 정력은 2년도 안돼 택시 한대를 구입하게 했다. 6년째 돼던 해 그의 택시는 5대로 불었다. 이를 모두 팔아 답십리의 한 정비공장을 인수했다. 나이 40에 성진자동차정비공업사 사장이 된 최명재는 4년 뒤에는 택시 30여대를 마련, 성진교통이란 택시운수회사까지 경영하게 됐다. 은행원에서 택시운전수로 다시 정비공장과 택시회사 사장이 되는 데 10년이 더 걸리지 않은 것이다.

 70년대초 최사장은 세 번째 변신의 기회를 만나게 된다. 일본 오키나와 해양박람회를 구경갔을 때 오사카 영사로 있는 동창생을 만난 것이 그의 인생을 결정적으로 바꾼 계기가 된 것이다. 친구는 그에게 일확천금의 사업을 제의했다. “이왕 운수업을 하고 있으니 국내에서 그러지 말고 이란에서 한번 돈을 벌어보지 않겠느냐.” 최사장은 눈이 번쩍 뜨였다. “기회란 두 번 다시 오지 않는다. 오일달러를 벌자.”

 

이란에서 “돈을 갈퀴로 긁어모았다”

 최사장은 그길로 친구의 도움으로 여권을 변경, 이란으로 날아갔다. ‘떼돈을 버는 운수사업’이란 파리에서 테헤란까지 유전시설 기자재를 수송하는 일. 친구가 소개해준 이란인 걸프사장을 만나 한달 동안 소화해낼 수 있는 수송량을 계산해줬다. 근면하기로 소문난 영국인들의 작업수준에 맞춘 조건이었다. 믿지 못하는 걸프사장에게 최사장은 조건을 내걸었다. “약속대로 못하면 한푼도 받지 않겠다. 그대신 약속대로 처리해낼 경우 나머지 기간에 무엇을 하든 상관말라.” 최사장은 나름대로 속셈이 있었다.

 오케이를 받아낸 최사장은 국내에 돌아와 정비공 포함 트레일러기사 45명을 급구, 이란에 도착하자마자 열사의 강행군을 시작했다. 걸프 보증으로 이란정부로부터 융자를 받아 트레일러 30대를 샀다. 그는 특유의 체력을 발동, 자신이 직접 선두에 서서 트레일러를 몰며 밤낮으로 실크로드를 가로지른 결과 영국인들이 12일 걸리는 수송기간을 8일로 단축해냈다. 한달 수송물량을 20일만에 거뜬히 해치우면서 최사장은 나머지 10일 동안 차떼기 장사를 했다. 프랑스 인도 등지에서 의류 식료품 등을 닥치는 대로 거둬와 테헤란시장에 풀어 놓은 것이다.

 “길바닥에 깔린 돈을 갈퀴로 긁어모으다 시피했다”고 할 만큼 큰 돈을 번 최사장은 이 노다지 사업을 2년만에 끝내야 했다. 걸프사장이 최사장과 재계약을 하지 않고 자신의 통역원인 한국인 이모씨에게 사업권을 넘기고 만 것이다. 침술을 배운 이씨가 걸프사장의 딸을 치료했다는 말이 뒤에 들렸다. 미련없이 철수키로 한 최사장은 마지막 조건을 걸었다. “내 트레일러를 새 차값에 인수하라.” ‘황금거위’를 놓치는 막판에도 기민하게 돌아가는 그의 머리와 베짱이 놀라울 정도이다.

 그에게는 행운도 기가 막히게 따랐다. 석유귀족들의 돈을 빼먹다가 아쉬운 철수를 한 뒤 5개월만에 팔레비왕조가 붕괴되고 호메이니정권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 제대로 돈도 벌기 전 알거지가 되고만 이씨의 소식이 전해질 즈음 최사장은 국내로 돌아와 “이 거액의 현금을 어디에 투자해야 될까”하는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77년 그의 나이 50세 때였다.

 미국으로 이민가 모텔업을 할까 생각도 해보았으나 텔레비전에 비친 미국 레이건 대통령의 모습이 ‘보기에 좋아’ 생각이 바뀌었다. 목장에서 그가 말을 타는 모습을 본 순간, “목장! 저거 멋있겠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의 선택은 항상 즉흥적이고 무호할 정도로 투기적인 일면이 있지만, “한번 잡았다 하면 끝을 보고야 마는” ‘가공할 만한’ 끈기와 집념은 인정해줘야 한다는 것이 주변의 평이다. 목장을 시작하고 우유를 만들게 되기까지 77~87년, 즉 牧夫로 새 출발한 그의 50대 10년은 바로 그런 것이었다.

 강원도 회성군 한흥면 소사리의 야산 30만평을 사들이고 젖소 80마리를 풀어놓을 때만 해도 그의 생각은 사업보다는 자연 속의 여생을 염두해 둘 정도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천부적 집착성?승부근성은 한가한 취미생활을 허락할 수 없었다고나 할까. 최사장은 소와 우유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다. 국내 낙농업자나 대학교수를 찾아다니며 자문을 구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그의 인생의 전환을 또다시 일본에서 맞게 되었는데, <진짜(혼모노) 우유란?>이라는 책과의 ‘운명적 조우’이다.

 81년 일본낙농업계 견학을 위해 도쿄에 들른 길에 책방에서 이 문고판 책을 발견한 것이다. 최사장은 이미 이때 우유제품을 만들어보겠다는 사업계획을 갖고 여기저기서 전문서적을 구하고 있던 참이었다. ‘진짜 우유란?’이란 흥미로운 제목에 책장을 한 장 두장 넘기던 최사장은 그 내용에 완전히 빠지고 말았다. 이 책은 뒤에 최사장 사업의 결정적인 원동력이자 튼튼한 ‘빽’이 된 것이었는데 국내 낙농학자들은 그 내용에 대해 대수롭지 않은 것이라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그저 ‘일본류’의 호기심 유발성 책자일 뿐이라는 얘기이다.

 그러나 파스퇴르유업의 광고를 처음 접할 당시 소비자들이 그랬듯이 최사장이 이 책을 읽고 느낀 충격은 “거의 전율에 가까운 것”이었다. 최사장은 밤새워 책을 독파한 뒤 출판사로 연락, 저자인 후지에 사이스케씨를 만났다. 그로부터 얘기를 들으면서 그는 ‘번민했다.’ “영양소가 변성된 우유를 제조하는 기존 업체에 원유를 납품하는 이 무의미한 목장일을 때려치우느냐, 아니면 ‘진짜우유’를 한번 멋있게 만들어보느냐”하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됐다는 것이다.

 후지에 사이스케씨를 ‘사부’로 삼고 최사장은 우유공장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바로 사업에 뛰어든 것은 아니다.

 ‘진짜 우유’인 저온처리우유(63도에서 30분간 살균)는 소에서 짜낸 원유의 질이 생명. 따라서 세균수를 획기적으로 낮추는 등 고급원유를 생산하는 경험을 자신이 직접 쌓기로 했다. 81년부터 목장에 틀어박힌 최사장은 말 그대로 목부가 되어 청결한 우사관리, 유방염 정기검진 등 개체별 젖소관리에 온 신경을 쏟았다. 그 결과 5년만에 원유 1㎖당 세균수를 5백만마리에서 7천마리 선으로 떨어뜨릴 수 있었다. 그에 대해 혹평에 혹평을 하는 사람도 파스퇴르 원유의 질에 관한 한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

 초고온순간살균(1백35도에서 2초간)으로 만드는 우유가 설사 멸균이 된다손치더라도 수많은 세균과 유방염균이 들어 있던 원유를 사용하는 것이라면 그렇지 않은 우유와 질적인 차이가 없을 수 없는 일. 이같은 기존 우유의 약점을 물고늘어지면서 최사장은 우유시판과 함께 대대적인 선전공세를 펼치게 된 것이다.

 그동안 3백여대로 불어난 택시를 차례로 처분하여 우유공장 소요자금 40억원을 마련, 87년 3월 드디어 기공식을 올렸다. 그이 나이 벌써 회갑, 자신이 터득한 질좋은 원유생산 노하우를 주변 목장에 전파, 장차 파스퇴르 집유목장으로 키워나갔다. 1등급 원유는 인적 관리도 중요하지만 냉장시설?보일러시설 등 설비투자도 병행돼야 하기 때문에 많은 돈이 들었다. 이렇게 생산된 고급원유를 리터당 5백30원씩 쳐주고 우유생산에 들어갔다. 세균수?체세포수?숙성정도 등을 따지지 않고 오직 유지방만을 기준으로 리터당 3백80원씩 주고 있던 기존 우유에 비해 파격적인 값이었다.

 87년 9월7일, 사이스케씨가 작명해준 파스퇴르우유는 서울 현대백화점 ‘무로시음회’에서 첫선을 보였다. 값은 기존 우유의 딱 두배. “IDF(국제유업연맹)에서 인정하는 진짜 우유 국내 최최 탄생”이라는 선전문구와 함께였다.

 이 두가지 점은 곧잘 파스퇴르의 2대 성장전략, 즉 고가정책과 광고전략으로 인용되고 있다. 중산층 이상의 고가시장을 파고들면서 우유에 대한 기존 인식을 완전히 뒤엎는 일대 충격요법을 구사, 단시일내에 지명도를 높였다는 것이다.

 원유의 질이 다르니 맛이 다를 수밖에 없어 파스퇴르 우유는 압구정동 소비자들을 중심으로 “해외지사에 근무할 때 먹던 맛과 같다” “영국유학시절에 맛본 우유와 비슷하다”는 등의 소문이 퍼지면서 판매가 조금씩 증가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기존 우유시장을 뚫고 들어갈 수는 없었다. 파스퇴르는 누가 싸움을 걸어오기만을 기다렸다. 처음 걸린 곳이 보사부, 다음으로 기존 우유업체 모임인 유가공협회, 경제기획원 공정거래위원회, <중앙일보>, 소비자보호원 등이었다. 식품사업에 관한 한 막강하기 짝이 없는 이들 기관에 맞서 엄청난 광고세례로 동시결전을 벌인 것이다.

 

“영양가면에선 무시해도 좋은 차이”

 그중에서도 <중앙일보>와의 싸움은 약점이 많다는 기업이 대언론사와 맞붙은 희귀한 사례로 꼽히고 있다. “죄가 있다면 광고안준 죄밖에 없습니다”라고 다른 신문에 ‘폭로’하는 바람에 파스퇴르와 관련해 부정적 보도를 한 <중앙일보>는 법정에서도 패소, 정정보도문을 싣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월평균 4억원씩 광고비를 쏟아부으며 그 효과를 톡톡히 본 파스퇴르에 대해 부정적 여론이 없는 것은 아니다. 원유의 질이 좋다고는 하지만 영양가면에서 큰 차이가 없는 걸 가지고 흑백논리로 ‘우리가 진짜우유’ 하는 식의 선정적 광고는 지양해야 한다는 것이 많은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이다. 서울대 축산학과 김현욱 교수(낙농미생물학)는 “저온처리와 초고온처리는 각각 장단점을 지녀 무엇이 좋은 방식이라고 말할 수도 없도, 더더욱 무엇이 진짜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전제하면서 “파스퇴르유업이 원유의 질 개선 등 우리나라 낙농업을 한 단계 발전시키는 계기를 촉발한 것은 사실이지만 차이가 없거나 무시해도 좋은 차이를 과장해서 선전하는 것은 분명히 지나친 일”이라고 말한다.

 지난 10월10일, 파스퇴르가 공정거래위원회의 공고시정 명령에 불복, 제기한 상고심에서 이회창 대법관 등 3명의 대법관이 결정한 대법원 판결도 김교수와 맥락을 같이 하는 내용이다. 이렇게 되자 기존 유업체들은 명예회복이라도 하려는 듯 ‘파스퇴르 패소’라는 제목을 달아 반격광고로 몰아치고 있다.

 “저온장시간 살균우유가 초고온순간처리 방식으로 생산하는 기존 우유보다 영양분이 덜 파괴된다고 할 수는 있으나 그 차이가 원고의 주장과 같이 큰 것은 아니다”라고 한 대법원의 판결대로라면 파스퇴르는 이 결정이 나기까지 3년 동안 실보다 득이 훨씬 많은 ‘광고전쟁’을 효과적으로 벌인 셈이다. 이미 파스퇴르란 우유 이름은 유명해질 대로 유명해지고 이같은 판결에 끄떡없을 만큼 사세가 몰라보게 커져버렸기 때문이다.

 새해 64세가 된 최명재 사장은 “이제 ‘싸움질’은 그만할 때인 것 같다”고 말한다. 91년부터는 파스퇴르가 성숙된 모습을 보이게 될 것임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위치가 달라지면 처세도 달라져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하는 최사장의 ‘노선변화’는 소비자들의 우유에 대한 신뢰회복이 기대된다는 점에서 환영할 일이지만, 그렇게 되면 ‘우유전쟁’광고가 없어질 것이므로 각 신문사에게는 대단히 반갑지 않은 뉴스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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