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 공훈예술가 孟東旭씨
  • 박상기 문화부 차장 ()
  • 승인 1991.01.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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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 혼 흔들어야 참예술”

소련의 공훈예술가 孟東旭(60)씨의 일생은 한편의 드라마와 같다. 1931년 함경북도 성진에서 태어나 청소년기에 북한탈출 기도?체포 후 아오지탄광 강제노역?인민군으로 한국전쟁 참전?모스크바유학?김일성 개인숭배 비판?소련망명으로 이어진 그의 삶에는 민족분단의 비극이 절절이 배어 있다.

 지난 80년 소련 예술인으로서는 최고 영예인 ‘공훈예술가’ 칭호를 받은 그는 연극연출 이외에도 소련작가동맹 소속의 문인으로서, 배우로서, 연기학교수로서 폭넓은 예술활동을 펼치고 있다. 89년말에 방한하여 국내 연극계에 스타니슬라브스키 연기론을 선보인 바 있는 그는 대전대학교와 학술교류협정을 맺게 된 레닌종합사범학교의 참관인 자격으로 다시 내한했다.

 

● 1년만에 다시 서울에 오셨는데, 그동안 한?소 교류에 많은 변화가 있었지요?

 소련교포의 한사람으로서 노대통령의 방문을 계기로 양국 관계가 진전된 것이 대단히 반갑습니다. 전에는 주로 기업하는 분들이 소련을 찾아왔으나 요즘에는 학술 문화 등으로 교류의 폭이 넓어지고 있어요. 또 소련 시민사회에서도 한국을 바라보는 시각이 크게 달라졌습니다. 개혁에 도움을 줄 능력을 가진 한국과 가까워져야 한다는 인식이 높아진 것이죠.

● 소련사회가 하루가 다르게 달라지고 있는데, 그 변화의 핵심이 무어라고 보십니까?

 언제나 낡은 것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게 마련입니다. 소련은 지금 ‘낡은 것’을 타개하고 새 사회로 변해가는 과도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변화의 모습이 과거와는 다르지요. 옛날에는 총칼과 폭력으로 희생자를 내며 강제적으로 변화를 실현했지만, 지금은 평화적으로 인민의 의식개혁을 통해서 이뤄가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중앙에서 지시와 통제로 모든 문제를 해결했거든요. 그러나 이제는 밑에서부터 위로 의견을 밀어올리고 있어요.

● 개혁의 과정에서 심한 진통을 겪고 있다면서요.

 소련 혁명 후 지금까지 70여년을 타율적으로 살아온 국민의 의식이 하루아침에 고쳐질 수 없지요. 또 연방정부의 기능이 약화되면서 정치?경제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고 있어요. 소련연방의 15개 가맹 공화국들이 저마다 분리 독립하겠다고 나서고 있습니다. 역사와 언어와 전통이 서로 다른 공화국들을 더 이상 소련이라는 인공적인 틀로 묶어두기가 어렵게 되었지요. 내 주관적인 견해로는 머지않아 소련연방이 해체되어 국가연합과 유사한 체제로 바뀌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경제적으로도 매우 곤란한 상황에 빠져 있어요. 전보다 생활이 더 궁핍해졌다는 불만이 높아가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페레스트로이카 자체가 너무 복잡한 미궁에 빠져 있어서 아무도 앞으로 5년 후, 10년 후 소련이 얼마만큼 발전하고 어떤 사회로 변화할 것인가를 내다볼 수 없게 되었지요.

● 식량과 생필품 부족 등이 심화되는 원인은 어디 있습니까?

 가장 큰 이유는 연방정부와 공화국 정부간에 경제 정책의 손발이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유시장 문제만 해도 연방정부에서 내놓은 것과 러시아공화국에서 내놓은 안이 서로 달라요. 중앙의 결정이 각 공화국으로 하달되는 과정에서 없어지거나 다른 식으로 바뀌고 말죠. 연방정부가 위력이 있을 때는 각 공화국간의 생산품 유통에 별 문제가 없었는데, 이제는 공화국에서 중앙의 지시를 거부하고 생산품을 내놓지 않아요. 자기네 공화국에서 우선적으로 쓰고 나머지는 자신들에게 필요한 물품과 바꾸겠다는 것이죠. 여기에 부패한 보수관료와 마피아가 끼어들어 물건을 암시장으로 빼돌립니다. 그래서 생산량 자체는 늘어났는데도 가게는 텅텅 비고 물건값이 치솟는 거지요.

● 국가소유의 재화를 개인에게 분배해 주고 있지요?

 분배 문제도 쉽지 않습니다. 국가가 개인의 재산을 빼앗기보다 공평하게 나눠주기가 더 어렵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어요. 얼마 전 모스크바 시청에서 공무원들에게 그동안 월급을 적게 받고 일한 댓가로 그들이 살고 있는 임대아파트의 소유권을 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공평성의 시비가 발생했어요. 왜냐하면 시 중앙에 사는 사람과 변두리에 사는 사람, 큰 아파트에 사는 사람, 또 모스크바에 사는 사람과 농촌에 사는 사람이 서로 이해가 달라서 모두를 만족시키는 해결점을 찾을 수가 없었지요.

● 자본주의 체제처럼 경쟁사회로 변화하는 데 불안을 느끼는 사람들은 없습니까?

 소위 보수파라 불리는 사람들의 불만이 높지요. 물론 그 사람들도 스탈린식의 독재정치나 권위주의적인 관료체제에는 반대하지만, 취업과 주택 등 생활문제를 국가가 해결해주지 못하니까 굉장히 불안해 하고 있습니다. 취업난이 닥친 데는 두가지 요인이 있습니다. 첫째는 공장에 선진기술과 기계를 도입하고 있어 노동력 수요가 절반으로 감소하고 있어요. 또 하나는 동유럽에 주둔하던 군인들이 제대하여 사회로 쏟아져나오고 있는데, 이들이 농촌에 내려가려 하지 않고 모스크바나 대도시에서 살려고 합니다. 이들은 직장과 주택을 국가에서 마련해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는데 국가는 그럴 만한 힘이 없어요. 그리고 기업이 개인소유가 되니까 기업주는 우선적으로 자기 인척이나 각종 선거에서 자기를 지지하는 사람을 채용해요. 이런 문제들이 복합적으로 얽혀서 보수파의 목소리를 높이게 하고 있습니다.

● 45만명에 달하는 우리 교포의 생활상은 어떻습니까?

 각 공화국이 독립선언을 하면서 소련의 공용어인 러시아어 외에 고유의 민족어를 채택했습니다. 그 바람에 우리 한인은 러시아어 공화국어 한국어를 모두 공부해야 할 입장이 되었지요. 또 우리 한인들은 중앙아시아 지방에서 원주 민족들로부터 배척을 당하고 있습니다. “왜 당신들은 남의 땅에 와서 이렇게 잘 살고 있느냐. 집과 토지를 내놓고 극동으로 돌아가라”는 압력을 받고 있죠. 아시다시피 소련은 1백여 민족이 섞여 사는데, 한인과 같은 소수민족은 자기주장을 할 만한 힘이 없지요. 각 공화국에서 민족분규가 일어나는 것도 다 이런 민족이기주의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포들은 그동안 뿌리내리고 살던 곳을 떠나 블라디보스톡, 우수리, 콤소몰스크 등 극동지방으로 이주하고 있습니다. 스탈린시대에 극동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당하는 비극을 겪었는데, 이제 역류현상이 빚어지고 있어요.

● 소련의 개혁에 예술인들은 어떤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까?

 85년 고르바초프가 개혁안을 내놓을 무렵에 제일 먼저 연극인들을 만났습니다. 페레스트로이카 철학을 대중에게 직접 전파할 수 있는 곳이 바로 극장이기 때문입니다. 소련에서는 작가, 예술가에 대한 대우가 아주 좋습니다. 예술작품으로 인민의 정신을 움직일 수 있는 이들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는 것이죠. 내가 한국에 나오기 직전에도 고르바초프가 문인과 예술인들을 모아놓고 ‘여러분의 도움을 바란다’는 내용의 회견을 가졌지요. 고르바초프는 어려운 국면에 부딪칠 때마다 예술인들을 통해서 대중의 개혁의지를 북돋우려 하고 있습니다.

● 선생님의 연극관을 듣고 싶습니다.

 인간존재를 뒤흔들어놓을 수 있는 정서체험을 관객에게 주는 연극이 훌륭한 작품입니다. 우연히 극장에 들어온 관객일지라도 한편의 연극을 보고나서 일주일 동안 머리를 싸매고 고민에 빠질 만큼 내면의 충격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배우고 익힌 스타니슬라브스키(1863~1938) 연기 이론은 기교적 연극효과에 의존하던 기존의 연극 스타일과는 전혀 다릅니다. 배우가 자기의 무한한 지적 감응력을 통해서 작품의 주제를 심도있게 체험하여 그 체험을 관객에게 전달하는 ‘체험의 연기술’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배우는 단순한 연기자가 아니라 극적 감흥을 매개로 관객에게 철학과 사상을 전파하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고르바초프를 비롯한 소련 정객들과 지식인층도 연극을 통해서 시대의 정신을 깨닫고 배우는 것입니다.

● 잠시나마 한국 연극을 둘러본 느낌은 어떻습니까?

 다른 면에서는 한국이 많은 발전을 했지만, 연극 여건은 오히려 나운규가 활약한 1920년대만도 못한 것 같습니다. 배우 집단은 생활에서나 이념에 있어서나 가족보다 더 가깝게 뭉쳐 있어야 하는데, 여기는 전혀 그렇지 못합니다. 나운규는 자신의 사상을 영화와 연극으로 표현할 수 있는 자기 집단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까. 한국처럼 연극 한편을 공연하기 위해서 여기저기서 사람을 끌어다가, 그것도 틈나는 대로 연습시켜서 무대에 올려가지고는 창조적 작품을 만들 수 없습니다. 배우들은 반드시 하나의 집단으로 결속되어 있어야 하고 극장의 주인은 배우여야 하며, 극장은 극장대로 독특한 자기 스타일을 가져야 합니다. 가령 스타니슬라브스키 이론에 의한 연극을 스타일로 정했다면 그것을 사랑하는 배우들로 하나의 집단이 이뤄져 있어야지요. 그리고 예술이 너무 상업주의에 물들어 버리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예술가는 자기를 희생해서 민족의 문화를 낳고 새로운 정신을 창조하는 고행자들입니다. 톨스토이 푸슈킨 도스토예프스키 체호프 고골리 등은 모두 러시아혁명 전에 탄생한 사람들입니다. 당시의 러시아는 서구에서 제일 낙후된 나라였는데, 창작에서는 가장 위대한 작품들이 나왔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민족의 앞날을 걱정하며 때로는 감옥에도 들어가고 유배생활도 하면서 러시아의 위대한 미래를 조망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배우도 마찬가지지요. 관객의 감정을 뒤흔들어 사고체계를 바로 세워주려면, 다시 말해서 시대의 문제를 인식시키고 새로운 정신을 전파하려면, 배우는 지적 능력이나 예술적 재능에서 누구보다 뛰어나야 하고 또 강렬한 의지를 가져야만 합니다. 그런데 상업주의는 예술의 본질을 마비시켜 사회적 책무를 잊어버리게 만드는 폐단이 있습니다.

● 북한의 유학생으로 모스크바에서 공부하다가 소련에 망명하셨지요?

 56년의 제 20차 당대회를 기점으로 소련에서는 스탈린의 공포정치와 개인숭배에 대한 비판이 크게 일었어요. 당시 북한에서는 김일성 우상화 작업이 한창이었습니다. 소련에 와 있는 우리 유학생들이 모여 김일성 개인숭배에 대한 공개비판을 했다가 강제 소환령을 받게 되었지요. 나는 그때 누나찰스키 극장예술대학 연출학부 졸업학년이었는데, 소환당해가면 목숨조차 부지할 수 없게 될 게 뻔했어요. 한달 후에 귀국하겠다고 해놓고 졸업작품을 공연하는 한편 미학, 당사, 마르크스, 레닌주의 과목의 국가시험을 치러 합격했어요. 이 시험에 합격해서 조기졸업을 해야 소련에 남을 수 있었으니까 아슬아슬했지요. 나 혼자가 아니라 유학생 10여명이 함께 남았어요. 그때 모스크바 음대에 다니던 한 학생은 북한의 기관원들이 약을 먹여서 강제로 붙잡아가기도 했습니다(그는 중학생 시절 월남을 기도하다가 실패하고 다시 중국 연변으로 탈출하려다 체포되어 5년형을 선고받고 아오지 탄광에서 강제노동을 하였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북한이 유엔군에 밀리게 되자 그는 인민군에 징집되어 전선에 나서게 된다. 군중예술지도원으로 복무중 전선사령관 김일 앞에서 그가 쓰고 주연을 맡은 연극 <세 전사>를 공연하여 1등으로 입상한 것이 계기가 되어 그에게 소련 유학의 길이 열렸다. 누나찰스키대학을 졸업한 후 그는 카자흐 공화국의 수도인 알마아타에서 러시아 청소년극장과 카자흐 청소년극장의 총예술감독으로 일하게 된다. 30여년 동안 스타니슬라브스키 연기론에 정통한 연출가로, 극작가로 활약했으며 그 외에도 시를 쓰고 영화에 출연하는 등 눈부신 활동을 전개했다).

● 우리의 통일문제를 어떻게 전망하십니까?

 이북 5도청의 함경도도민회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맨주먹으로 월남한 사람들인데도 모두들 남부럽지 않게 살고 있는 것 같아 반가웠습니다. 누구보다도 북한에 고향과 가족을 둔 월남인들이 통일운동에 앞장서야 할 겁니다. 한가지 제안하고 싶은 것은 이북 5도청 산하에 ‘통일극장’을 설립해서 분단문제를 제대로 다룬 작품을 공연해 통일시각을 바로잡자는 것입니다. 여기 사람들은 북한의 실상을 너무나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김일성은 스탈린조차도 해내지 못한 유일체제를 만들었어요. 지위가 높든 낮든 북에서는 김일성주체사상을 따르지 않으면 배급을 받지 못해 굶어죽어야 합니다. 실제로 굶어 죽지 않으려고 두만강을 건너서 소련으로 도망온 사람들도 많습니다. 북한동포들도 속으로는 ‘개인숭배는 나쁘다’ ‘소련이 개혁되고 있다’ ‘남한이 잘 사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할 수는 있겠지요. 그러나 내색을 하면 살아남을 수가 없는 체제입니다. 여기서는 통일을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 여건이 마련된다면 한국에서 일하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53년에 소련에 들어갔으니까 벌써 38년을 살았지요. 그곳에서 나름대로 예술적 성과를 거두었고 불편없이 살 만한 대우를 받고 있지만, 조국이 부른다면 나는 다시 청년의 마음으로 돌아와서 일할 겁니다. 모든 예술은 어떤 형식을 취하든 간에 민족성이 깊이 뿌리를 박아야 참 예술이 되고 생명력을 얻는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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