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안법 ‘그물’에 걸린 납북어부들의 恨
  • 문정우 기자 ()
  • 승인 2006.05.10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구체적 증거 없이 무기징역까지 선고 구속 시기 비슷…“검·경에 의한 조작” 주장

대전지방법원 형사항소부(재판장 김영훈 부장판사)는 지난 2월26일 국가보안법이 적용돼 1심에서 선고유예 판결을 받은 안무희씨(47·충남 당진국 대호지면 적서리)에 대한 항소심 선고공판에서 원심을 깨고 무죄판결을 내렸다.

안씨는 지난 85년 2월 인천어항 소속 제12광남호를 타고 백령도 근해에서 조업하다가 북한 경비정에게 끌려가 평양 둥지에서 23일 동안 머문 뒤 돌아온 납북 어부이다. 안씨는 귀환후 목수일을 하며 생계를 꾸려가던 중 지난 90년 11월2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돼 1심에서 선고유예 판결을 받았다.

당시 검찰은 안씨가 공사장을 돌아다니며 “이북은 모두 집과 직장이 있어 힘들게 일할 필요가 없으며 지하자원이 풍부해 살기가 좋다????북한 5?1 축구장에 가보았는데 시설이 겁나게 잘돼 있더라??라는 말을 하며 북한을 고무?찬양했다 하여 구속 기소했었다.

이에 대해 안씨는 “혐의 사실을 끝까지 부인했으나 공소장에는 일부 시인한 것으로 돼 있고 증인들의 말도 대부분 조작됐다??며 항소를 제기해 이번에 승소하게 된 것이다. 대전지법 형사항소부는 판결문에서 피고 승소 이유를 ??안피고인에 대한 공소사실 중 북한을 찬양?고무했다는 혐의는 여러 정황으로 보아 증거가치가 없으며 유죄로 인정할 만한 객관적 사실이 뒷받침되지 않았다??라고 밝혔다.

안씨가 구속되기까지 과정을 살펴보면 이 사건이 검찰과 경찰에 의해 의도적으로 조작되지 않았는가 의심할 만한 흔적이 여러 군데에서 발견된다. 검찰측 증인 가운데 유일하게 안씨에게 불리한 증언을 한 것으로 돼 있는 두사람 중 ㄱ씨는 당시 뇌종양에 걸려 기억이 희미하고 말도 잘 못하는 중환자였다. ㄱ씨는 안씨가 구속되고 나서 얼마 뒤에 사망했다. 또 한사람 ㅊ씨는 전직 경찰관의 부인인데 동네 버스종점 운영권을 놓고 안씨와 다툰 적이 있어 사이가 좋지 않았다. ㅊ씨는 나중에 검찰에서 한 진술이 사실이 아니었다는 각서를 썼다.

구속된 어부 16명, 4명은 지금도 옥살이

또 경찰이 작성한 조서에는 “피고인 처의 재당숙(7촌)인 차상찬(62)이 월북했는데 납북시에 피고인과 접선했을 것으로 보인다??거나 ??피고인은 사리 때면 출타해 조금 때만 되면 귀가하는 바 불순자와 접촉하는지 여부도 의심스럽다??는 등 경찰의 조서인지 악의에 가득찬 투서인지 모를 터무니없는 내용도 포함돼 있다.

2년여 법정투쟁 끝에 승소한 안씨는 “이번 일을 당하고 나서 깨달은 바가 많다. 우리 사회에서는 누구나 하루 아침에 간첩이란 굴레를 쓸 수 있다는 것이다. 예전에 납북 어부들이 간첩 행위를 했다는 사실이 신문에 나면 나도 덩달아 분개하곤 했는데 지금은 그들 중 상당수가 나와 비슷한 일을 당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한다.

안씨의 말대로 대전지법의 이번 판결은 그동안 신문지상을 심심치 않게 장식하곤 했던 납북 어부 간첩사건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특히 5공 시절에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던 납북 어부들은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안씨와 마찬가지로 증거가치가 없거나 유죄로 인정할 만한 객관적 사실이 없는데도 중형을 선고받았다.

민주화실천가족협의회가 확인한 바에 따르면 그동안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 납북 어부는 16명이나 된다. 그들은 대부분 10년 이상에서 무기징역까지의 형을 선고받았는데 4명은 아직도 교도소에서 형을 살고 있다. 그들 4명은 건국 이후 최대라는 이번 사면 복권자에도 포함되지 않았다.

그들을 구속기소한 검사나 그들에게 중형을 선고한 판사는 그들의 존재를 까맣게 잊었는지 모르지만 그들이 간첩이란 죄명을 쓰기까지의 과정은 안무희씨의 경우와 닮은 꼴이다. 납북 어부들은 5공 초기와 중기에 집중적으로 구속됐는데, 대부분 납북됐다가 송환되고 나서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간첩 혐의를 받았다. 짧게는 3년에서부터 길게는 17년이 지난 어느날 아침 갑자기 체포돼 사회로부터 격리됐다.

공소장에는 대부분, 그들이 북한을 고무 찬양한 점으로 미루어 간첩으로 변신하여 장기암약한 것으로 의심된다는 내용만 있을 뿐 구체적으로 어떤 간첩행위를 했는지, 그에 대한 증거는 무엇인지 적시돼 있지 않다. 또 그들에게 불리한 증언을 한 사람 가운데는 그들과 지역에서 이권을 놓고 다투었던 사람이나 경찰 가족 등이 포함돼 있다. 다만 그들이 안씨와 다른 것이라면 형이 확정되고 나서 한결같이 “모진 고문에 못이겨 혐의사실을 어쩔 수 없이 시인했다??고 호소하고 있다는 점이다. 현재 복역중이거나 만기출소한 납북어부들의 얘기와 재판기록을 검토해본다.

정 영씨 간첩 혐의 증거는 1백원 지폐뿐

대구교도소 죄수번호 3235번 정 영씨(52). 그는 83년 국가보안법 위한 혐의로 구속 기소돼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10년째 복역중이다. 강화도 출신인 정씨는 본래 농부였다. 66년 흉년이 들자 정씨는 반찬값이라도 보태려고 휴전선 가까운 강화도 최북단 은점펄로 조개잡이를 하러 나갔다. 은점펄은 북한과의 경계선 근처에 있기 때문에 조개와 손으로 쓸어 담을 만큼 많았다. 정씨는 그곳에서 북한 경비병에게 끌려갔다가 20여일 만에 송환됐다. 정씨는 그뒤 4남매 교육을 위해 인천으로 이사해 인천제철에서 노동자로 일하던 중 납북 17년 만인 83년 9월13일 안기부로 연행됐다.

“수사관들은 팬티만 남기고 옷을 전부 벗긴 뒤 곤봉으로 무차별 구타했습니다. 내가 무식하여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생각한 적도 없습니다만 수사관한테는 통하지 않았습니다. 밤낮 구별 없이 하라는 대로 하다 보니까 저는 어느새 간첩이 되어 있었습니다. 수사관들이 시키는 대로 무전교육은 아라비아 숫자로 하며 접선은 밤에 플래시로 깜박거려서 한다고 적었습니다.??

정씨가 옥중에서 몰래 가족에게 전한 서신에 적혀 있는 글이다. 정씨는 안기부에서 40일간 조사받은 뒤, 6·25 때 월북한 ‘재광숙??정진구와 두차례 접선해 군사기밀을 누설한 혐의 등으로 기소돼 유죄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검찰이 제시한 증거는 별상마님상(짚으로 만든 인형, 섬 지방에서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집안 곳곳에 걸어둔다)에서 찾아낸 1백원짜리 지폐 한장뿐이었다. 검찰은 이 지폐가 공작금의 일부라고 주장했는데, 별상마님상에 돈을 넣어두는 것은 강화도에서는 일반화돼 있는 습속이다.

정씨가 구속될 때 코흘리개였던 4남매는 이제 모두 어른이 되었다. 이들은 어머니 황문자씨(51)와 함께 현재 아버지의 석방을 위해 외로운 투쟁을 하고 있다.

17년 만에 연행된 정삼금씨

정삼근씨(54·전북 옥구군 개야면)는 지난해 4월 초파일 특사 때 풀려나 6년여 만에 자유의 몸이 됐다. 정씨는 68년 배를 타고 연평도 근해에 조기잡이를 나갔다가 북으로 끌려가 5개월 만에 송환됐는데, 그로부터 17년이 지난 85년 5월 갑자기 전주 보안대에 연행됐다.

정씨는 그곳에서 52일간 “인간 사냥(벌거벗기고 여러 사람들이 구타하는 고문) 등 온갖 굴욕적인 고문을 당한 뒤?? 북한을 찬양하고, 어로작업을 통해 숙지한 군사기밀을 누설했다는 혐의로 징역 7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검찰의 공소장에는 도대체 정씨가 수집한 정보를 누구에게 전달했는지는 빠져있고 “집 담에 흰 천을 걸어놓고 북괴와의 접선을 시도하였다??라거나 ??한밤중에 지붕 꼭 대기에 인공기를 걸었다??라는 내용만 수록돼 있을 뿐이다. 정씨는 구속되기 전 유부녀를 겁탈한 새마을 지도자 ㅂ씨의 고소장에 증인으로 서명한 일이 있는데, ㅂ씨는 평소 보안대 사람들과 가깝게 지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요즘 정씨의 가족들은 집안에 칼을 두지 않는다. ??정씨의 한이 깊어 그가 무슨 일을 저지를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정씨의 동생 남도씨(34·인쇄업)는 “나중에는 형을 이해하게 됐지만 첫면회 때는 형보고 죽으라고 할 만큼 증오했었다. 많은 납북 어부들이 가족에게조차 의심받으며 한을 품고 세상을 살아간다??고 말했다. 정씨의 고향인 개야도는 어촌치고는 부촌이라 발동선이 많았는데 그 때문에 멀리 조업을 나갔다가 북에 끌려가 불행한 일을 당한 사람이 많다고 한다. 개야도에는 정씨처럼 형을 산 사람도 여럿이고 조사받는 과정에서 고문을 당해 병신이 된 사람도 있다. 그들 중 상당수는 아내가 집을 나가 집안이 풍비박산이 나거나, ??간첩 자식??이라고 보는 주위의 눈초리를 견디지 못한 자식들이 비뚤게 자라 지옥 같은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 한다.

이성국씨 “경찰 친지 고소했다 피해??주장

이성국씨(37)는 강경하씨의 외손자이다. 이들은 71년 10월 강원도 고성군 해안에서 납북됐다 1년 만에 송환됐는데, 그로부터 9년 뒤 충남 서산경찰서에 연행됐다. 이들은 10년형을 선고받았는데 강씨는 대전교도소에서 복역하다가 사망하고 이씨는 지난해 석방됐다. 가족들은 “그들에게 죄가 있다면 경찰의 친지를 간통으로 고소한 것밖에는 없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그들의 혐의란, 인근 미군부대의 위치와 측후소에 근무하는 병력 등 그 마을에 사는 사람이면 누구나 아는 사실을 ??탐지??했다는 것과 ??이북이나 여간 사람 살기는 마찬가지이다. 거기에도 박사가 있고 텔레비전이 있다??라고 말한 정도이다. 물론 그같은 혐의도 그들의 자백만을 근거로 하고 있다.

그밖에 납북 어부로서 구속된 사람들의 사연은 대개 비슷비슷하다. 마치 그들이 한데 모여 입이라도 맞춘 듯, 아니면 그들을 조사했던 수사관들이 작전회의라도 가진 듯 구속되고 재판받아 형을 산(사는) 과정들이 그렇게 흡사할 수가 없다. 또 구속된 시기도 엇비슷하다. 따라서 그들은 대부분 수사당국에 의해 자신들이 간첩으로 만들어졌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그들은 분명히 공산주의가 무엇이라는 것도 알지 못하는 ‘못 배운??사람들이다. 또 그들이 만약 공소장에 나와 있는 것과 같은 일을 저질렀다 해도 그들은 그들이 저지른 그 사소한 일로 말미암아 이미 너무나 값비싼 희생을 치렀다. 납북어부 간첩사건들은 반드시 재조명되어야 한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