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러시’ 위해 日 재계 창구 일원화
  • 도쿄·채명석 편집위원 (sisa@sisapress.com)
  • 승인 2006.05.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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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조무역회, 동아시아무역연구회에 흡수



일본 재계는 정체의 늪에 빠진 대북한 무역을 활성화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관련 창구를 일원화할 방침을 세우고 있다.

《시사저널》이 최근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지난 37년간 일본의 대북무역창구 노릇을 전담해왔던 ‘日朝貿易會??가 멀지않아 해산되어 ??동아시아무역연구회??에 흡수?합병된다고 한다. 한편 일본 정부는 지난 3월초 대북수교 교섭 창구를 나카히라 노보루 대사에서 엔도데쓰야 대사로 전격 교체했다. 이처럼 거의 같은 시기에 일본의 정?재계가 대북 창구를 정비하려 서두르는 까닭은 무엇인가.

일조무역회는 56년 일본 무역업자들이 북한과의 무역을 활성화하기 위해 설립한 단체이다. 61년 4월 일본과 북한 간에 직교역이 허용된 이후 전성기에는 회원 수가 1백40여개사에 달했으나 북한이 75년부터 무역 결제대금을 연체함에 따라 현재는 70여개사로 줄어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현재 일조무역회의 회장은 자민당 소속 다니 요이치 중의원 의원. 86년부터 회장직을 맡아오고 있다. 그는 회장직을 맡기 전에도 일본 정계의 대북 창구였던 ‘일조우호촉진의원연맹??회장대리를 역임하는 등 대북관계 개선에 앞장서온 인물이다.

그는 이러한 정치적 배경을 업고 그동안 수차례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에게 무역대표부 설치를 제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핵문제, 이은혜(김현희의 일본어 교사) 문제 등으로 북·일수교 교섭이 교착상태에 빠지고, 수교 교섭의 최대 후원자였던 가네마루 전 자민당 부총재가 구속됨에 따라 최근 그의 입지가 크게 줄어든 것으로 알려진다.

일본의 한반도문제 전문가는 “일조무역회가 해산하는 이유는 바로 다니 회장의 정치력이 약해진 데 있다??고 지적한다. 북?일수교에 따른 배상금 지불, 그리고 이에 부수되는 막대한 정부개발원조(ODA)를 감안한다면 일본 기업에 있어 북한은 ??최후의 특수시장??으로 떠오를 수도 있다. 그러나 다니 회장이 이끄는 일조무역회가 유명무실해짐에 따라 일본 재계는 이에 대해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이 전문가는 일본 재계가 ??더 강력한 대북 경제창구를 마련하기 위해 다니 회장에게 압력을 넣어 그 회를 해산시키는 것??이라고 본다.

북한은 ‘최후의 특수시장??

일조무역회를 흡수·병합할 ‘동아시아무역연구회??가 사실상 대기업이 중심이 된 대북창구라는 사실도 그같은 주장을 뒷받침해 준다. 동아시아무역연구회란 80년 7월 일본무역회 회장이던 미즈가미 가쓰조 전 미쓰이물산 회장이 중국 시베리아 북한 등 동아시아 경제를 연구할 목적으로 설립한 단체이다. 현재 일본의 유명 대기업 20여개사가 회원이다.

이 단체는 현재의 이지미 도시오 회장 역시 미쓰이물산 출신이라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처음부터 북한과의 경제교류 확대를 목적으로 설립한 단체라고 보면 틀림없다. 미쓰이물산은 지난 73년 총 3백50억엔에 달하는 시멘트제조설비(연산 1백만t짜리 3기)를 북한에 연불로 수출한 바 있으나 그 대금이 지금까지 연체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 재계는 데탕트 붐이 일기 시작했던 70년대초 앞다투어 ‘북한 러시??에 뛰어든 적이 있다. 이때 시멘트와 타월 제조 플랜트뿐만 아니라 신일본제철이 중심되어 일관제철 플랜트까지 수출하려던 움직임이 있었다. 그러나 75년부터 북한이 무역 결제대금을 연체함에 따라 대기업들의 북한 러시는 급속히 냉각되었다. 그 대가로 일본 기업들은 약 8백억엔에 이르는 미불 연체금을 안게 되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미쓰이 물산을 중심으로 13년전 설립한 것이 바로 동아시아무역연구회인 것이다.

대일 연체금 8백억엔

동아시아무역연구회 가토 마사토시 사무국장은 “지난 2월 중순께 두 단체 회장 간에 곧 합병하기로 합의한 것은 사실이다??라고 대체로 인정하고 ??대북무역 창구를 일원화하려는 것이 목적이다??라고 합병 이유를 밝혔다. 그는 이어 ??일조무역회가 중소기업을 중심으로 한 단체이기 때문에 대기업 중심의 동아시아무역연구회가 흡수?합병하는 형태를 취하게 될 것 같다??고 밝혀 대기업을 중심으로 한 일본 재계가 대북창구를 강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인정했다. 그는 회원사 구성에 대한 자료를 제공하기를 거부했다. 그 이유로 ??설립 당시 일본 우익단체의 방해를 받았는데 그 배후에 한국의 입김이 있었다??라고 밝힘으로써 동아시아무역연구회가 북한과의 경제교류 확대를 주목적으로 설립한 단체임을 간접 시인했다.

일조무역회의 다나카 기요히코 사무국장도 합병 사실을 대체로 인정하고 “일?북관계가 급진전된다는 전제 아래 두 단체가 합병을 서두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북한과의 관계가 개선될 것을 염두에 두고 체제를 정비하고 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현재의 일?북 무역액이 왕복으로 따져도 5억달러에도 미치지 못해 일본의 전체 무역 규모로 보면 무시해도 좋을 만한 금액??이라는 점을 들고, 설령 수교 교섭이 예상보다 빠른 속도로 진전된다 해도 8백억엔에 달하는 지불연체금 때문에 일?북 무역이 급격히 확대되지는 않을 것으로 내다보았다.

대장성 통관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일·북 무역액은 총 4억8천달러로 91년에 비해 2천6백만달러 가량이 줄었다. 일본의 경기 후퇴로 북한 수출품의 주종을 이루던 비철금속 특히 아연 수출이 크게 준 것이 가장 큰 요인이다.

일조무역회의 다나카 사무국장에 따르면 현재의 일·북 무역은 80% 가량이 조총련계 재일교포들의 손으로 이루어지고 있는데, 북한이 합영법을 제정한 이후 북한에 진출한 합영기업의 대일수출은 최근 크게 늘고 있다고 한다. 다나카 국장은 그 예로 지난 86년 조총련계 ‘사쿠라 그룹??이 평양에 설립한 모란봉 합작회사를 든다. 이 회사가 만든 신사복 같은 섬유류 제품이 호조를 보여 작년에는 지금까지 대일수출의 주종을 이루던 아연을 제치고 섬유류가 1위로 뛰어 올랐다고 한다. 또한 이러한 대일수출 구조의 변화로 일본의 대북수출에서도 기계류 대신 옷감 원단이 약 50% 늘어나 1위를 차지함으로써 섬유류 관계 합영기업이 순조롭게 가동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북·일관계 회복 예상

다나카 사무국장은 또 북한이 오는 5월께 두만강 개발에 필요한 투자유치단을 일본에 파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대외경제추진위원회 소속 대표단 10여명이 방일하여 투자설명회를 연다는 것인데 “위험만 높고 수익은 없다??며 방관해왔던 일본 재계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다.

일본 정·재계의 이런 대북창구 정비 움직임과 북한 사절단의 방일 계획은, 동면 상태에 빠진 북·일관계가 의외로 빨리 깨어날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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