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암리 학살사건은 日 기독교단체가 사주”
  • 부산·송 준 기자 ()
  • 승인 2006.05.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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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길 교수 주장에 “정확한 증거 없다” 반박도



‘제암리 학살사건??은 일제가 저지른 대표적 만행 가운데 하나이다. 최근 이 사건이 한 일본 종교단체의 사주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돼 학계의 관심을 끌고 있다. 부산외국어대 金文吉 교수(48?일본어학)는 ??당시 조선 포교에 열심이던 일본 ??구미아이(組合) 교회??가 총독부에 제암리 주민을 학살하라고 종용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했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제암리 학살사건??을 일본 군경이 3?1운동을 탄압하는 차원에서 자행한 참극이라고 보아왔다. 그런데 김교수는 이 사건을 한국과 일본 기독교 간의 이데올로기 대립과 교세 갈등, 그리고 침략 국가의 종교의 파행성에서 기인했다고 본 것이다.

제암리는 수원 서남쪽 약 20㎞ 지점에 있는 농촌이다. 전국으로 번져가던 3·1운동의 불길이 1919년 4월5일 제암리 발안장터 만세운동으로 번지고, 이로 인해 주민들은 참혹하게 학살당한다. 4월15일 당시 제암리에는 만세운동을 탄압하려고 일본군 제20사단 39여단 78연대에서 아리타 도시오(有田俊夫) 중위가 인솔하는 헌병 1개 소대 30여명이 들어와 있었다.

마을 주민들을 제암교회로 몰아넣은 헌병들은 예배당 문마다 나무를 대고 못질을 한 뒤 석유를 뿌리고 부를 질렀다. 그리고 치솟는 불길을 향해 무차별 사격을 감행했다. 이들은 또 불길을 보고 달려온 두 부인의 목을 치고 총을 난사해 살해한 뒤 민가 31채를 불태웠다(희생자 수는 자료에 따라 37명, 29명, 28명 등 차이를 보인다).

이상의 기록은 ‘제암리 학살사건??의 진상을 가장 소상히 밝힌 《제암교회 3?1운동사》(현 제암교회 姜信範 담임목사 지음?공동체 펴냄)에 실린 것이다. 이 사건을 보는 학계의 시간은 물론 이같은 자료에 기초한 것이다.

반면 김문길 교수는 “아리타 중위가 방화하기 직전 교회 안에서 안영복 등 주민들과 격렬하게 기독교 교리논쟁을 벌였다는 기록이 있다??라고 자신이 입수한 자료를 제시했다.

방화 직전 교인들과 논쟁 벌여

김교수는 조선 지배기에 일본에서 발간된 《上毛敎界月報》(월간) 25년치, 《新人》(부정기) 25년치, <기독세계>(일간) 13년치, <복음신문>(일간) 12년치, <7일잡보>(일간) 10년치 등 방대한 분량의 자료를 제시한다. 이는 그가 14년간 교토대학과 교베대학에서 일본사상사·문자론으로 박사를 받기까지 수집해온 것들이다. 이 자료를 토대로 김교수가 주장하는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903년 조선 전도에 나선 구미아이 교회는 총독부의 자금(연간 8천엔 : 현재가 80억원 추정)과 군경의 지원을 받아 京城을 중심으로 조선인 교회들을 매수하고 교인을 포섭했다. 1910년 설립한 漢城敎會를 기점으로 세력을 확장한 구미아이 교회는 1919년에 이르러 전국에 1백50여개 교회를 확보할 만큼 성장했다. 교인에게 직장을 제공하고 특별대우를 하는 구미아이 교회의 전략이 주효한 것이다. 이 교회들은 친일파의 아지트 구실을 했다.

그런데 3·1운동 당시 수원 일대는 조선 감리교회가 깊이 뿌리내린 지역이어서 구미아이 교회가 선교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에 고심하던 구미아이 교회는 3·1운동을 탄압하려는 총독부의 태도를 주목했다. 골수 감리교인을 제거한 공백 상태는 구미아이 교회를 확장하는 최적의 환경이 될 터였다.

‘왜 하필 제암리인가??하는 의문은 풀리지 않지만, 만세운동이 격렬했던 이 감리교 강세지역이 탄압의 대상이 될 가능성은 충분했다. 그리하여 구미아이측이 총독부를 종용하여, 신자인 아리타 중위를 제암리에 보냈으리라는 것이다. ??그래서 아리타 중위는 교회를 학살 장소로 택했고, 방화 직전에 3?1운동과 무관한 기독교 교리 논쟁을 벌였던 것??이라고 김교수는 말했다.

그는 또한 ‘강서 사천 학살사건??(3월3일?평남) ??정주 학살?방화사건??(3월4일~4월2일) ??서울 기독교인 십자가 학살사건??(3월9일) 같은 3?1운동과 관련한 일제의 만행이 구미아이 교회와 적잖이 연관돼 있을 것으로 추측했다. ??그동안 확보해둔 자료를 모두 해독해내면 이 추측이 입증될 것??이라고 김교수는 자신감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 아리타 중위가 주민과 벌였던 교리논쟁, 즉 朝·日 기독교 이데올로기의 차이는 무엇일까. 이것을 알려면 먼저 구미아이 교회의 설립과정, 거슬러 올라가 근대 천황제 및 국가神道의 형성과 그로 인한 일본 내종교 탄압의 실상을 이해해야 한다.

19세기말 일본은 구미 열강의 문물을 접하면서 강력한 정부의 필요성을 절감한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근대 천황제이다. 학자들의 견해를 종합하면, 천황제의 골자는 아래와 같다.

고대로부터 일본에서는 ‘家??라는 개념이 강조돼왔다. 따라서 천황은 ??가족 국가??의 어버이이다. 이 家의 개념 위에 고대의 민중 신앙인 神道를 접목한 것이 천황제의 정신적 골간인 국가신도이다. 국가신도에서 모시는 최고의 신은 일본의 신화에 천황의 조상으로 등장하는 天照大神이다. 천황은 그대신 ??살아 있는 신??의 자리를 차지한다.

천황은 어버이 같은 친권으로 臣民을 보호·육성하고 보살핀다. 그러기 위해서 각종 사회사업과 공공투자가 천황의 이름으로 이루어진다. 전쟁터에서 주검으로 돌아온 ‘일본의 아들??을 제사지내는 것도 천황이다. 이 은혜에 신민은 죽음을 불사한 충성으로 보답한다. 이것이 ??천황 이데올로기??이다.

일본의 대표적 어용 종교

메이지유신 지도자들은 이것은 ‘신성한 國體??라고 칭했다. 1890년 10월30일 발표된 ??교육에 관한 칙어??는 ??국체 보존의 모든 교육의 근본 목표여야 함??을 밝히고 있다. 이후 군국주의 일본은 모든 제도와 정책, 종교와 사회활동을 신민 교화의 방향으로만 열어두고 저해 요인은 철저히 탄압했다.

초기에는 여러 종교가 이에 반발했지만 곧 굴복하고 천황에 대한 충성 경쟁에 앞을 다투었다. 이 과정에서 탄생한 대표적 어용 종교가 구미아이 교회이다.

구미아이 교회의 교리는 에비나 단조(海老名彈正)에 의해 완성되었다. 에비나는 충성을 생명으로 하는 무사 가문 출신이다. 그의 특이한 출신 성분은 위와 같은 시대상황과 접목하면서 왜곡된 ‘일본적 기독교??를 탄생시켰다. 기독교 유일신인 여호와를 천조대신으로, 예수를 천황으로 대체한 것이다.

에비나의 독단은 이토 히로부미를 만나면서 ‘침략정당론??으로 발전한다. 조선?중국 등 점령 지역은 모두 천황의 神權 아래 있게 된다. 따라서 천황은 피지배 민족을 핍박하는 것이 아니라 ??어버이 신??의 은혜를 베푸는 것이 된다. 이 논리가 바로 ??대동아 공영권??이다.

이같은 이론으로 무장한 구미아이 교회가 조선에 진출하면서 예기치 못한 문제에 부닥치게 되었다. ‘어버이 신??천황이 이름으로 이루어져야 할 사회사업 등이 외국 선교사들에 의해 이미 진행됐고, 조선 백성의 민족주의 의식이 뜻밖에 강한 데다, 성서에 기초한 신학의 뿌리가 깊게 내려져 있었던 것이다.

아리타 중위가 주민과 벌인 교리 논쟁은 바로 이같은 朝·日 기독교 사이 견해차이의 연장선상에 있었던 것이다. 그후 3·1운동을 계기로 조선 신자들이 교회를 떠나자 구미아이 교회는 1930년께 완전히 문을 닫았다.

김문길 교수의 주장에 대해 ‘일본종교침략사??전문가 金承台씨는 ??무리한 주장이다. 예컨대 구미아이 교회의 사주 없이 총독부가 학살을 명령했더라도, 아리타 중위가 우발적으로 교리 논쟁을 했을 수 있다??고 반박했다.

김교수의 주장은 학계에 하나의 논쟁거리를 제공한 셈이지만 섣부른 감이 없지 않다. 김교수가 이 사건을 제대로 입증하려면 일단 그가 소장한 자료를 충분히 해독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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