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권리장전’으로 ‘의료혁명’ 오려나
  • 이성남 차장대우 ()
  • 승인 2006.05.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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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료 선택권 등 명시, “의료계 고질 개선” 기대…“선언에 불과” 회의로도


 

여러 남자가 둘러서서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20대 젊은 여성의 옷을 거리낌없이 벗겨도 아무런 항변을 할 수 없는 곳이 종합병원이다. 만일 그 환자가 의사에게 ‘육체의 비밀을 보장해달라??고 요청했다가는 망신만 당하게 된다. 회진 시간에는 젊은 의사들이 떼지어 와서 환자가 알아들을 수 없는 의학용어를 구사하며 자기들끼리 쑥덕거린 뒤 정작 환자에게는 설명 한마디 없이 병실을 나가버리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난다. 이때 환자들은 수치심을 느끼지만 이 같은 대우에 섣불리 불만을 표시하지 못한다. 치료 행위에서 불이익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환자들 위에 제왕처럼 군림하는 의사·종합병원의 이같은 고질적 관행을 깨뜨리려는 ‘혁명적 몸짓??이 최근 의료계 내부에서 일고 있다. 연세의료원 김일순 의료원장은 지난 8일 국내 의료계에서 처음으로 ??환자 권리 장전??을 선포함으로써 환자들 위에 군림하는 병원 관행이 ??잘못되었다??고 시인하고, 앞으로 ??환자 위주의 병원으로 전환하겠다??고 다짐했다. 김원장은 ??피의자를 구타해온 경찰서에서 피의자는 맞지 않을 권리가 있으므로 앞으로 때리지 않겠다고 공포하는 것과 같다??고 취지를 설명했다. 이것은 김원장이 권리 장전 선언 당시 산하 병원장들과 의료원 간부들이 지켜보는 자리에서 ??이 장전은 환자에게 새로운 권리를 인정해 주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라고 말한 내용과 같다.

전문과 10개항으로 이루어진 환자 권리 장전 선포는 신선한 인상을 넘어서 개혁적 조처인 것처럼 인식되기까지 한다. 특히 환자 자신이 질병에 관해서 의학적 설명을 들을 수 있는 권리, 새로운 의약품 및 의술의 실험적 대상이 되는 것을 거부 또는 선택할 권리, 진료비 내역의 정당성에 대해 따질 수 있는 권리 등은 현행 의료관행에서는 획기적인 조처로 평가된다.

‘환자의 권리??는 81년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열린 제34차 세계의사회에서 채택된 후, 국내에서는 85년 ??소비자문제를 연구하는 시민의 모임??(이하 시민의 모임)이 이를 채택하라고 요구했으나 의료계의 거센 반발에 부딪혀 무산되었다.

시민의 모임은 환자의 권리를 병원에서 인정하겠다는 이번 조처를 크게 환영하고 있다. 김재옥 사무처장은 “권리장전은 구속력을 갖는 법이 아니라 하나의 선언이지만, 의료환경을 자정하는 기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의료계가 ??의술을 가진 사람의 치외법권 영역이었다??라고 말하는 김처장은, 그러나 지금은 사회가 ??곪을 대로 곪은??의료환경을 용납하지 않는 만큼 다른 병원들도 환자의 권리를 인정하라고 촉구했다.

문태준 전 보사부장관은 “적절한 시기의 적절한 조처로, 의료계 적폐를 개혁해 나가는 시발점이 될 것??이라고 논평했다. 또 ??환자의 권리??가 제대로 정착하기 위해서는 환자들도 환자로서 지켜야할 의무를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고 덧붙였다. 그는 진료예약제의 무단 취소율이 50%가 넘는다고 지적하면서, 이같은 무책임한 행위가 엄청난 시간 낭비와 경제적 손실을 초래한다는 사실을 인식해 면회시간을 엄수하고 병원시설물을 질서있게 이용하는 등 규범을 지켜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환자 권리 장전은 문민정부의 개혁바람과 맞물려 병원 쇄신에 새 바람을 몰고올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연세의료원 예방의학과의 한 교수는 권리 장전이 의사들에게 환자를 업신여겨서는 안된다는 심리적 구속력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전망했다.

미국병원협회는 지난 73년에 환자의 권리 장전을 발표하면서, 각 병원에 권리 장전을 기록한 유인물을 비치하고 환자에게 나누어주도록 한다. 얼마전 발간된 김일순·니콜라스 포션 공저 《새롭게 알아야 할 의료윤리》에 소개된 일화는 ‘환자의 권리??가 어떻게 인식되고 있는지 잘 알려준다. ??미국의 한 일류 종합병원에 가서 권리 장전을 찾아보았는데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다른 병원에 가서도 마찬가지였다. 의사나 간호사들은 한결같이 자기네 병원은 환자의 권리에 관한 한 선구적이라고 했다. 그런데도 환자의 권리 장전이 어디에 있는가는 아무도 몰랐다.??

실효 거두려면 제도 개선 뒤따라야

미국의 예로 보아 이번 선언은 사안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의료환경 개혁으로까지 나가는 데 여러 가지 걸림돌을 예상케 한다. 질 낮은 의료서비스의 간판격으로 여론의 집중포화를 받는 ‘3시간 대기 3분 진료??는 의사 1인당 하루 평균 1백여명을 진료해야 하는 의료현실에서 나온 말이다. 이같은 의료 환경은 의사뿐 아니라 ??감기만 들어도 종합병원으로 달려오는??환자에게도 책임이 있다. 또 낮은 의료보험 수가로 인한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한 방편으로 이같은 여건을 방조하는 병원경영자에게도 책임이 있다.

권리 장전의 조항을 지킬 경우, 환자 1인당 진료시간이 길어진 데서 오는 재정 손실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또 의사 1인당 진료환자 수가 1백여명에서 60여명으로 줄어든다고 할 때 나머지 40여명에 대한 치료행위의 공정한 분배 문제는 어떻게 타결해 나갈 것인가. 연세의료원의 한 관계자는 “병원을 경영하는 입장에서는 수입 감소보다 의사의 희생을 강요하는 쪽이 되지 않겠느냐??라고 말한다. 즉 외과대학 교수의 외래 진료시간을 현재 1주일당 2~3회에서 3~4회로 늘리고 방법 등을 강구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결국 제도를 개선하거나 시설 투자와 환자 협조가 뒤따르지 않는 한 환자의 권리는 선언적 의미밖에는 갖지 못할는지도 모른다. 이 기회에 의사의 서비스 정도에 따라 의료보험 수가를 결정하는 방법을 도입하는 것도 검토해 볼 만하다. 이번 일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현실을 모르는 몽상가의 발상??이라고 반대했던 임상의들이 앞장서 환자의 권리를 옹호하는 날이 와야 환자 권리 장전은 병원 개혁 운동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연세의료원의 ‘환자권리 장전??

1. 모든 환자는 인간으로서 관심과 존경을 받을 권리가 있다.

2. 모든 환자는 의료진의 성실한 대우를 받을 권리가 있다.

3. 모든 환자는 담당 의료진의 전문분야에 대하여 알 권리가 있다.

4. 모든 환자는 담당 의료진으로부터 자신의 질병, 현재의 상태, 치료 계획 및 예후에 대한

   설명을 들을 권리가 있다.

5. 모든 환자는 자신의 질병 치료를 위한 새로운 의학적 시도나 교육의 참여 여부를 선택할

   권리가 있다.

6. 모든 환자는 치료, 검사, 수술, 입원 등의 의료 행위에 대한 설명을 듣고 시행 여부를

   선택할 권리가 있다.

7. 모든 환자는 담당 의료진이나 법적으로 허용된 사람을 제외하고는 개인의 의무기록 열람

   을 금함으로써 진료상의 비밀을 보장받을 권리가 있다.

8. 모든 환자는 진료와 관련하여 알려진 사생활의 비밀을 보장받을 권리가 있다.

9. 모든 환자는 진료 목적으로 탈의하더라도 신체의 비밀을 보장받을 권리가 있다.

10. 모든 환자는 진료비 내역에 대하여 알 권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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