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기’와 ‘국가 술수’
  • 안병찬 (편집인) ()
  • 승인 2006.05.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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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개혁은 軍機를 자율화하고 軍氣를 높이는 제도적 작전행동 돼야 한다.”

군에는 두가지 군기가 있다. 군사기밀을 뜻하는 軍機가 있고 군의 사기를 뜻하는 軍氣가 또 있다. 군은 방위와 공벌을 위해 공공연히 무기를 휴대하고 군사력을 행사 할 수 있는 존재이다. 이 두가지 군기는 군을 지탱하는 양쪽 수레바퀴가 된다.

기밀을 어둠의 자식이다. 어둠을 틈타 음험해지기 쉽다. 군사기밀은 국가적 이유(레종데타)가 있을 때에만 지키자고 한 것이었다. 국가 술수에는 악용하지 않기로 한 것이었다. 레종데타라는 말은 정부의 행동을 정당화하려는 정치적 이유를 일컬었다. 더 나아가 이 말은 정치적으로 부당·불법한 행동을 정당화하려는 위정자의 상투어로 바뀌어 국가 술수라는 뜻으로도 통하기에 이르렀다. 레종데타는 국가 이익과 국가 술수의 양날을 가진 칼로 변했다.

유신체제가 국가 술수를 부려보자는 속셈을 가지고 72년 12월에 제정한 것이 이른바 군기법(군사기밀보호법)이다. 세계 질서가 바뀌고 정권이 바뀌고 또 바뀌어도 의구한 것이 국가보안법과 더불어 있는 군기법이다.

보안법과 함께 의구한 군기법

군기법이 발동한 직후 나는 사이공에서 그 올가미에 걸려든 적이 있다. 미국측 수석대표인 헨리 키신저 국무장관과 북베트남 수석대표 레 둑 토 정치국원이 파리에서 평화협정을 매듭지어 베트남전쟁은 73년 1월1일을 기해 휴전에 들어갔다. 그 결과 주월 한국군도 미군과 함께 당연히 철수해야 했다. 나는 주월 한국군사령부 군수참모실에 들렀다가 한국군 귀국 수송계획을 확인했다. 그것은 휴전 발표일로부터 60일 내에 철수하게 되는 병력의 항공수송 일정표였는데, 귀국 제1진은 맹호사단 기갑연대였다.

나는 이것을 기사화할 가치가 있다고 보지 않고 다만 본사 편집국에 보내 기획하는 데 참고할 수는 있겠다고 판단했다. 그 내용을 국방부 기자실을 경유하는 파우치 속에 넣은 것이 화근이었다. 보안사 요원이 기자실에서 이를 탐지하여 보안사령부에 보고하자 주월 한국군사령부 보안부대에 엄명이 떨어졌다. 육사 출신 보안부대 파견대장은 나를 임의동행 형식으로 사무실에 데려가 취재원인 군수참모의 과오를 찾기 위해 집요하게 캐물었다. 파견대장은 파월 부대의 이동 상황을 누설한 것은 군기법을 위반한 행위이기 때문에 수사한다고 했다. 결국 보안부대는 특파원이 보도 행위는 하지 않았으므로 경위를 따지는 것으로 일단락을 짓고, 군수참모에 대해서는 보안 부주의에 대해 단단히 경고함으로써 유신 초기에 발동한 군기법의 서슬퍼런 칼날을 시위했다.

유신체제가 군기법을 내놓을 때의 명분은 ‘군기상의 기밀을 보호하여 국가안보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한다??였지만, 그동안 억압적인 정권이 국민의 기본권인 알 권리를 통제하는 데 이를 악용해 왔음을 우리는 잘 안다. 그러한 군기법에 대해 작년 2월 헌법재판소가 한정합헌 결정을 내리면서 개정 추진이 불가피하게 됐다. 그리하여 국방부는 작년 8월 실로 20년 만에 군기법에 손을 대고 그 개정안을 내놓았으나 오히려 독소 조항 일부를 강화한 내용이었다.

군사기밀 보도 자율시대로

새 정부가 들어섬과 함께 3월 들어 국방부는 다시 군기법개정안을 만들었는데, 개정의 핵심은 군사기밀 보도를 언론 자율에 맡긴다는 데 두었다.

작년 8월에 내놓았던 개정초안 가운데 대표적인 독소 조항은 13조 1항 ‘언론의 사전협조 의무조항??이었다. 언론 기관장이 군사기밀과 관련한 내용을 보도하려면 군사기밀 여부를 확인함으로써 국방장관과 협조하도록 한 의무 규정이었는데, 이를 ??언론 기관장의 판단에 따라 기밀 여부를 국방부장관에게 확인할 수 있다??고 완화한 것이다. 군사기밀의 범위도 ??일반에게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서??내용이 누설될 경우 국가안보에 명백한 위험을 초래할 우려가 있는 문서?도화 등으로 구체화하고 있다.

특히 작년의 개정초안은 12조에서 ‘모든 국민은 군사기밀의 공개?제공?설명을 국방부장관에게 요청할 수 있다??는 공개요청 조항을 두었었는데, 국민의 정보요구권 대상은 군사기밀만이 아니므로, 이번 군기법개정안에서는 이 조항을 삭제하는 대신 정부 차원에 따른 정보공개법 제정을 추진한다는 얘기이다.

군기법 개정안은 4월에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도 국회를 통과한후 공포되어야 비로소 뒤틀린 주름이 펴지는 셈이니 그 개정의 진행은 더디기 짝이 없다. 김영삼 대통령은 잘못된 군의 위상과 역할을 제자리로 돌려놓겠다면서 그의 특기인 트로이 목마 작전 식으로 군수뇌에 대한 인사를 단행했고, 후속 조처로 기무사를 축소 개편하는가 하면 군 사정의 중추기구이면서도 그간 기무사 등쌀에 눌려 지내던 특명검열단 기능을 다시 가동하고 있다.

군기(軍機)를 정치 술수에 이용해온 정치군인의 해동은 구석구석에 스며 있다. 그들 때문에 제길을 걸어온 정직한 직업군인까지 흠이 져서 군기(軍氣)가 떨어졌었다(《시사저널》 제173호 커버스토리 참조). 김영삼 정권의 군 개혁은 트로이 목마만으로 미흡하다. 직업군인의 군기를 높이는 제도적 작전 행동을 이행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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