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조율’에 경제팀 ‘불협화음’
  • 장영희 기자 ()
  • 승인 2006.05.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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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제’ 주도한 박재윤 수석 영향력 행사…실명제·금리자유화 퇴조



 ‘신경제 1백일 계획’ 짜기가 막바지에 이른 지난 15일 과천 정부청사에 있는 경제기획원 기획국의 전화에는 불이 났다. 청와대 경제 비서실에서 1백일 계획 내용을 일일이 챙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새 정부가 들어선 뒤로 모든 경제정책은 청와대 경제 비서실과 사전 조율을 하지 않고는 진행이 되지  않는다. 사전 조율이 대통령의 뜻을 ‘전달’하는 일이라면 이는 청와대 경제 비서실의 고유 업무이지만, 전에 비해 ‘개입’강도가 사뭇 다르다는 것이다.

 경제기획원의 한 관계자는 “金泳三 정부의 경제수석은 5공화국 시절의 경제수석과 맞먹는 영향력을 발휘할 공산이 크다”고 내다봤다. 그는 경제팀장이 부총리인 경제기획원장관에서 차관급인 청와대 경제수석으로 옮아갈 듯한 기미가 역력하다고 우려했다.

 이는 경제운용에 있어 청와대 경제 비서실의 독주시대가 열릴 것이라는 예고로 여길만하다. 이것이 뜻밖의 일은 아니다. 김영삼 정부가 구상하는 이른바 ‘신경제’를 만드는데 머리를 빌려준 사람이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에 기용됐기 때문이다. 朴在潤 수석은 신경제를 추진하는 영향력에 관한 한 이미 상당한 지분을 확보한 셈이다.

 청와대 경제수석의 영향력이 드러난 첫 사건은 임기를 3년여나 앞둔 한국은행 총재를 경질한 것이었다. 새 내각의 경제팀을 짜는데 박수석이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지만, 趙 淳 총재를 물러나게 하는데도 그의 입김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는 것이 관료 사회의 해석이다. 한국은행 총재 경질을 끝으로 경제팀은 진용 갖추기를 끝냈다. 장관과 총재가 실무형으로 짜인 것이다. 관료 사회는 이에 대해 청와대 경제수석의 입지가 강화된 것으로 해석한다. 내각은 집행부서 기능을 맡고, 청와대가 중요 전략을 짜는 구도를 만들기 위한 사전 포석이라는 것이다. 또 대표적 ‘안정론자’를 도중하차시킨 것은 박수석이 구상하는 경제정책 방향을 가늠하는 계기가 됐다는 분석도 있다.

 

‘딴 소리’ 해가며 해명에 급급

 청와대 경제수석의 입김은 ‘금융실명제 실시시기 5월중 발표’와 ‘2단계 금리자유화 3월중 시행’이라는 내각 경제팀의 입장을 번복시킨 데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로 인해 경제팀은 적지 않게 혼선을 겪었고 박수석의 의중을 세심히 읽지 못한 부총리는 자기가 한 말을 바꾸는 촌극을 벌였다. 李經植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은 3월2일 직원 조회에서 “금융실명제에 관한 청사진을 가까운 시일안에 내놓는 일이 당면 과제다”라고 말했다.

 다음날 대통령이 주재한 경제장관회의에서도 “어차피 시행할 것이면 될 수 있는 대로 발표시기를 앞당기자”고 洪在馨 재무부장관에게 주문했다. 이에 대해 홍장관은 “4월말까지 시행방안을 준비하겠다”고 화답했다는 게 한 배석자의 전언이다. 이 회의는 비공개로 열렸고, 이 회의 결과를 언론사에 배포한 공식 자료에는 실명제 시기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그런데도 5월 발표설이 굳어지게 된 것은 실무국장이 기자들의 집요한 요구에 못이겨 “재무부가 4월말까지 방안을 마련해 5월중에 발표할 것”이라고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5월설’이 굳어지자 박수석을 3월16일 기자 간담회에서 “5월 발표는 실무 국장이 내부 결정을 받지 않고 말한 개인 견해였다”고 몰아붙였다. 그러나 이 말은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실무 국장이 3일 그 말을 하고 나서도 재무부가 거듭 확인해주었기 때문이다. 홍장관은 5일 기자간담회에서 “5월까지 실명제 시행시기와 방향을 밝힌다는 입장에 변화가 없다”고 말했다. 그 후 청와대에서 다른 얘기가 흘러나오자 기자들은 15일 이를 다시 확인해달고 요구했다. 이 때도 홍장관은 姜萬洙 대변인을 통해 “당초 입장에 변화가 없다”고 밝혔던 것이다. 박수석은 기자들이 이 점을 문제삼자 “장관과 대변인 간의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었다”고 일축했다. 흥미로운 것은 바로 이날 이부총리가 ‘딴소리’를 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실명제 실시 일정을 5월중에 제시한다는 얘기를 내 입으로는 한 적이 없다”고 해명했다. 또 박수석은 16일 “5월설이 굳어져 부총리와 재무부장관, 경제수석 입장이 난처해졌다. 그렇지 않다고 해명하면 개혁의지가 없는 걸로 비칠까 봐 세 사람이 동병상련을 느껴왔다”고 밝혔다. 그러나 동병상련이라는 말은 설득력이 없다. 부총리는 전날인 15일에야 말을 바꾸었고 재무부장관은 변함없다고 말했던 것이다.

 2단계 금리자유화 일정을 3월중에 제시한다는 방침도 거의 비슷한 경로로 번복되었다. 결국 부총리와 재무부장관은 이 두 과제를 추진할 일정을 17일의 기자 간담회에서 수정했다. 금융실명제는 기본 방향을 ‘신경제 5개년 계획’에 포함시켜 6월 하순에 발표하고, 금리자유화는 올해 안으로 적합한 시기를 잡아 시행한다는 것으로 변형됐다.

 박수석이 내각 경제팀과 불협화음을 드러내면서까지 제동을 건 것은 이 두 과제가 경제활성화에 도움이 안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인 듯하다. 재무부의 한 관계자는 사정 등 경제외적인 개혁으로 사회가 움츠러들고 있는 판에 실명제를 실시할 수 없으며, 금리자유화도 단기적으로 금리상승을 부른다면 경기회복에 득 될 것이 없다고 봤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삼성그룹의 한 관계자는 이런 풀이도 한다. “지난 4/4분기 경제성장률을 2% 수준으로 추정했으나 더 나쁘다는 정보가 입수됐다. 올해 1/4분기 경기도 나아질 기색이 없다. 이를 감지한 박수석이 개혁에 소극적이라는 인상을 주더라도 우선 경기를 부양해야 한다는 다급함 때문에 제동을 건 것으로 보인다.”

 19일 대통령 특별담화에서 드러난 경제정책 기조는 성장으로 급선회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새 정부는 전통적인 경기부양책을 선택했다. 돈을 더 풀고, 규제금리를 내리며, 공공지출을 앞당겨 집행해 경기를 띄우겠다는 것이다 이같은 경기부양책은 필연적으로 물가를 자극한다. 정부는 행정력을 동원해 생활필수품 가격을 특별관리하고 임금상승도 억제하겠다고 했다. 뛰는 물가를 행정력으로 잡을 수 있을지도 의문이지만 이는 새 정부가 표방한 규제완화와 경제자율화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이다. 새 정부의 경기부양책 덕분에 성장률은 높아질지 모르지만 성장내용은 나빠질 게 틀림없다. 새 정부가 내놓은 경제정책은 지난 몇 년간 고통을 감내하며 싹을 틔워온 경제안정 기조를 뿌리째 뒤흔들 것이다. 또 산업구조 조정을 지연시키며, 경제의 자율회복을 가로막는 후유증을 낳을 수 있다.

 

박수석은 ‘제2의 김재익’

 경제부터 관료 사이에는 박수석을 ‘제2의 金在益 수석’이 될 것이라고 점치는 이들이 꽤 있다. 김수석은 全斗煥 대통령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물론 5공 때와 같은 상황이 될 것이라는 시각에는 무리가 있다. 5공은 정책결정 자체가 최고 권부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권위주의 체제였지만 김영삼 정권은 ‘문민 정부’다. 청와대 비서실이 독주하기가 그만큼 어려워진 정치 상황인 것은 분명하다.

 박수석은 최근 경제 비서실의 진용을 짰다. 인적 구성상의 특징은 박사학위 소지자가 10명이나 되며 모두 40대로 젊어졌다는 점이다. 박수석은 李永鐸 (재정·금융) 韓悳洙 (산업)   尹昌鉉(과학기술) 趙壹고鎬(농수산) 박훤구(노동) 金仲秀 (경제조사) 등 8개 부문 비서관의 보좌를 받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다. 경제기획원의 한 과장은 이같은 비서진 진용에 대해 “경제 부처에서 똑똑한 순서로 뽑아다 놓은 게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이 정책을 이끌어간다고 한다면 현실을 속속들이 알지 못한다는 점에서 역량이 부족하다”고 논평했다.

 비서실의 한 관계자는 “신경제라는 개념이 경제팀에게 익숙하지 않은 탓에 초기에는 박수석의 영향력이 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박수석의 지론은 경제 흐름의 큰 틀을 잡는 선에서 그칠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박수석 자신도 “국가 발전에 대한 중장기 전략을 짜는 데 주력하겠다”며 경제 부처의 사소한 업무에 간여할 생각이 없다고 밝혔다.

 경제 정책을 청와대가 짜건 내각 경제팀이 내놓건 그 내용이 바른 방향이라면 국민의 입장에서는 상관이 없다. 그러나 청와대팀이 대통령에게 ‘훈수’두는 데 그치지 않고 전면에 나선다면 이는 정부의 공식 조직을 무력화하는 결과를 낳는다. 합리적으로 추진해야할 경제 정책을 한 사람의 견해에만 의존할 때 오는 폐해는 경제 정책 결정 과정에서 많은 왜곡과 부작용을 부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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