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위기, 출구가 안보인다
  • 변창섭 기자 ()
  • 승인 2006.05.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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옐친 비상조처로 사실상 내전 돌입…사태 악화되면 “제2 쿠데타”


 

 지난 91년 8월의 불발 쿠데타에서 살아남은 보리스 옐친 대통련(62)은 3월20일 비상통치를 선언함으로써 또다시 쿠데타 위기에 몰리고 있다. 오는 4월25일 국민투표를 실시해 의회내 보수파를 제거하려는 옐친의 ‘3·20 비상조처’로 러시아 정국은 사실상 보·혁세력 간의 내전상태에 빠져들었다.

 옐친은 이번 국민투표에서 승리하면 옛 소련의 유물인 현행헌법을 고치고 총선을 실시해 보수파 의원들을 갈아치운다는 복안을 가지고 있다. 이를 간파한 러시아 최고회의(상설 의회)는 비상조처가 발표된 직후 비상회의를 소집해, 헌법재판소가 비상통치 선언의 적법성 여부를 검토하도록 요청하는 결의안을 1백25대 16이라는 압도적 표차로 가결했다. 만일 헌법재판소가 옐친의 비상통치 선언을 위헌으로 판정하고 이를 빌미로 인민대표대회(비상설 의회)가 탄핵결정을 내리면 옐친은 사임해야 한다.

‘옐친 이후’ 대안 없어 더 불안

 옐친은 설사 의회에서 자기에 대한 탄핵을 결정하더라도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될 경우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옐친이 실각해 누가 정권을 잡더라도 러시아는 상당기간 혼미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이라는데 러시아의 고민이 있다. 특히 러시아 사태의 여파로 현재 각종 민족분규와 극심한 경제난에 빠져 있는 각 공화국마저 혼란에 빠질 수도 있다.

 이번 비상조처의 성패는 군부의 태도에 달려 있다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군부가 옐친을 지지하면 보수파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 의회는 힘을 잃게 된다. 그러나 정반대일 경우 옐친은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처럼 하루 아침에 정치 생명이 끝날 수도 있다.

 옐친은 이번 조처를 내리면서 군에 대해 정치적 중립을 지키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군이나 보안당국은 아직 어느 편을 지지할지 결정하지 않았다. 이와 관련해 관심을 끄는 인물은 파벨 그라초프 국방장관, 빅토르 바라니코프 보안장관, 빅토르 예린 내무장관 등 3인이다. 이들은 모두 옐친이 임명한 사람들인데, 헌법준수를 다짐하면서도 옐친에 대한 공개적 지지는 하지 않았다.

 의회와 옐친이 정면충돌 직전 상황까지 갔던 지난 12월의 악몽을 기억하고 있는 군부는 내전으로 가는 것만은 피하려 할 것이다. 러시아 군부는 옛 소련이 붕괴한 후 형편없는 급료와 열악한 주거여건 및 불확실한 미래에 극도의 불만을 품어왔다. 그러나 최근 옐친 대통령이 군인의 보수를 두배로 올려준 후 관계가 좋아졌다는 말도 나오고 있으나 확인되지는 않고 있다.

 러시아군 최고사령관이자 독립국연합체의 참모총장이기도 한 예프게니 샤포슈니코프 원수는 “중립을 지키겠다”라고 다짐했다. 그러나 사람들이 거리로 뛰쳐나오고 친옐친 군중과 반옐친 시위군중끼리 충돌이 벌어져 유혈사태가 벌어질 경우 군은 언제든 나올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관측이다.

 군부 지도자들은 현재 상황에서 군의 분열이라는 최악의 상태는 피하기 어렵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으나 섣불리 행동에 나서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옐친이 실각한 후 뚜렷한 대체 인물이 없고 그가 물러난다 해도 사태가 평화롭게 수습되리라는 전망이 없기 때문이다.

 군부의 최근 동향을 보면 각군 수뇌부를 포함한 일부 고위 장성들이 옐친 대통령을 만나 비상조처를 건의한 반면 영관급 장교를 중심으로 한 장교 3백명은 전군 장교회의를 열어 대통령과 국방장관이 퇴진하기를 요구하고 있어 일사불란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사태가 이처럼 옐친과 의회 간의 최악의 대결까지 온 데는 옛 소련 헌법에 그 원인이 있다는 지적이다. 이 헌법에 근거해 선출된 인민 대표대회 대의원들이 줄곧 옐친의 개혁정책에 반대해 왔기 때문이다. 90년 3월에 선출된 1천여 대의원 중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보수파 의원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에 영향을 주는 옐친의 개혁정책에 정면 도전했다. 이들은 91년 8월 쿠데타 음모 당시 옐친 편에 섰을 때만 해도 확실한 옐친 편인 듯했다. 그러나 옐친의 급진적인 경제개혁으로 물가가 치솟고 국민 생활이 피폐해지자 옐친에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국민투표도 근본 해결책 안돼

 지난해 12월까지만 해도 행운의 여신은 옐친 편에 섰었다. 그의 권력의 원천은 대중적 인기였다. 그 때문에 궁지에 몰리면 국민투표를 실시해 의회를 해산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그가 지난 12월 국민투표 구상을 제시했을 때 이를 지지한 의원을 고작 1백20명이었다. 그러자 옐친은 헌법재판소장인 발레리 조르킨의 중재로 개혁파 경제기수인 예고르 가이다르 총리를 해임했다. 나아가 당장 실시하려던 국민투표를 4월로 연기하고 의회와 권력투쟁을 중단하기로 일단 합의했다. 수구파 의회는 옐친의 권력이 약화되고 있음을 간파하고 대대적인 반옐친 공격에 나섰다. 의회는 옛 헌법 조항을 3백여차례나 고쳐가며 권한 확대에 나섰다. 의회는 최근 옐친의 포고령 선포권을 박탈하고 국민투표를 취소하도록 결의했다. 사태가 이렇게 돌변하자 옐친도 의회를 ‘수구반동세력’이라고 비난하고 직접 통치를 선언하기에 이른 것이다.

 전문가들은 앞으로 5주에 걸친 대통령의 직접 통치가 성공할 수 있을지 의문을 품고 있다. 현재로서 옐친의 유일한 위안은 자신을 뽑아준 국민과 미국 영국 일본 등 서방측의 전폭적인 지지뿐이다. 우리 정부도 옐친 정부의 민주화 노력을 지지한다는 논평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코노미스트≫의 지적처럼, 비상조처로 야기된 불확실한 상황에서 서방의 지지가 얼마나 효력이 있을지 의문이다.

 옐친이 자신있게 제안한 국민투표안 역시 이를 회의적으로 보는 시각이 없지 않다. 옐친은 경제실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국민들에게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번 국민투표는 유권자 과반수가 투표에 참여해 과반수 이상의 찬성을 얻어야 한다. 만일 투표율이 저조하거나 찬성률이 과반수에 미치지 못할 경우 정국은 지금보다 더욱 혼란에 빠질지도 모른다. 따라서 옐친의 이번 조처는 5주간의 직접 통치를 거쳐 국민투표에서 승리해도 현 사태에 대한 궁극적 해결책이 못된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점을 던져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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