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면죄부를 안겨주었는가
  • 박권상(편집고문) ()
  • 승인 1991.07.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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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년 전 처절했던 6월항쟁, 그리고 빛나는 6·25의 승리가 바로엊그제 일처럼 눈에 선하다. 그때 지축을 흔들었던 민족의 함성이 아직도 귓전에 은은히 들려오는 것만 같다.

 자유의 대행진이었고, 양심의 대폭발이었다. 독재자의 최루탄이 거리를 덮었고 불의의총부리가 생명을 위협하였어도, 그러나 폭포처럼 밀어닥치는 시민항쟁 앞에 그들은 손을 들고 말았다. 잔인하고 부도덕한 5공세력은 끝내 현상을 깨려는 ‘불법적’인 민중의 시위에 총을 쏘지 못하고 민의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러나, 살인 고문 억압 거짓 부정 특혜 교만 등으로 군림한 5공체제는 무너지지 않았다. 누가 그 후계세력에게 6월항쟁의 열매를 돌아가게 했던가. 바로 6월항쟁의 물꼬를 텄던 급진세력과 야권의 절망적인 분열이 유발한 중산층의  “안정희구심리”였다. 결국 5공의 지배세력이 공식으로 내세운 노태우 후보가 36% 지지를 얻어 집권 연장에 성공하였고 60%이상의 반군정 세력은 사분오열, 믿음직한 수권세력으로 힘을 모으는데 실패하였다. 과격세력의 등장은 이른바 중산층의 안정심리를 촉발하여 87년 12월의 대통령 선거는 5공세력에 ‘면죄부’를 안겨준 것이다. 이 얼마나 엉뚱한 역사의 해학인가.

 노태우 정부는 36% 지지에 의존하는 소수파 정부이지만, 심판은 심판이었고 승리는 승리였다. 야권의 분열과 일부 급진주의의 선동이야말로 민정당 정부의 집권연장에 일등공신이었다.

 6개월 후 있은 총선거는 ‘여소야대’로 역전, 입법부가 행정부의 시녀되기를 거부하고 대법원장 임명 동의안을 부결하는 등 사법부의 독립에까지 연홰반응을 일으켰다. 여소야대로 ‘토론과 합의’라는 의회민주주의 정치문화가 싹트기 시작하였다.

3당야합은 ‘타협의 원칙’ 아닌 ‘원칙의 타협’
 그러나 일부 과격 급진세력의 분별없는 행동은 이른바 ‘공안통치’의 반작용을 유발하였고, 이윽고 국민에 대한 선거공약을 배신한 3당야합에의 길이 열렸다. 그것은 분명, 타협의 원칙이 아니라 원칙의 타협이었다. 대토령 선거시 ‘군사반란의 두목’이라고 지탄하고 올림픽 이후에도 중간평가로 정권퇴진을 외치던 세력이 선거구민과 한마디 의논도 없이 어떻게 바로공격의 대상이었던 ‘군정잔재’와 손을 잡고 ‘구국의 결단’이라고 목청을 높일 수 있겠는가.

3당야합은 힘으로 밀어붙이는 무소불능의 일당국회를 출현시켰고 집권세력의 후계구도를 놓고 쉴 새 없이 권력암투로 이어졌으며 급진 과격세력을 억제하는 명분으로 ‘공안통치’를 출현시켰고, 강경대군 치사사건은 5월 한달간의 비상사태를 몰고 왔다. 6공 최대의 정치위기였고, 빗발치는 여론앞에 ‘공안통치’의 상징이었던 노재봉 총리가 물러서야 했다. 정부는 최악의 국면을 모면했고, 서둘러 광역의회선거에 들어갔다.

 그러나 6월20일 선거는 여당의 압승이었고 야권의 처참한 패배였다. 여당 스스로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웃도는 65%의 의석을 석권하였고 수도권에서 80%이사의 의석을 획득하는 이변이었다. 만일 선거유세 때 야당지도자들이 부여한 광역선거의 의미를 받아들인다면 ‘6공에 대한 중간평가’에서 정부 여당이 두터운 신임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야권은 스스로 묘혈을 파고 다시 한번 ‘부도덕하고 반민주적’인 정부 여당에 면죄부를 발급했다. 승리의 월계관을 씌워준 것은 야권의 분열과 재야의 대중성을 잃은 과격 급진주의였다. 민자당이 적극적으로 신임 받은 것이 아니라 야권 스스로 패배의 늪 속에 빠져들어간 것이다.

민자당에 대한 실제 적극지지는 24%정도
 투표결과와 여론조사에 나타난 통계수치는 극명하게 말한다.
 우선 민자당의 지지표는 41%에 불과하다. 59%의 유권자밖에 투표하지 않았으므로 민자당에 대한 유권자들의 적극적 지지는 24% 정도밖에 안된다. 그 가운데 40.7%가 ‘정국 안정의 기대’ 때문에 투표하였고, ‘여당 후보의 자질이 뛰어나서’는 4.7%밖에 안되었다. ‘조직과 자금이 앞질렀기 때문’이 28.1%였다.

 몇 갈래로 흩어지고 뜻이 각기 다른 야권에 대한 불신 및 재야운동권의 비현실적이고 때로는 위험한 과격 선동 등이 역기능을 발휘, 중간 부동층을 여권지지로 밀어붙였는가 하면 야권 참패를 자초한 것이다. 야당은 단일 대체해결으로 미더운 존재가 되지 못하였고 조직, 선전 및 자금에서 현저하게 열세인데다가 재야·운동권까지 등을 돌리는 가운데 참패의 쓴잔을 마실 수 밖에 없었다.

 실로 깊이 새겨야 할 역사의 교훈이다. 사실은 5·16군사독재를 불러들인 것부터 시작하여, 30년간 군사독재를 지속시킨 상당한 이유가 야권의 분열주의와 자중지난에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이번 사태는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며, 만일 이번 선거후에도 준엄한 역사의교훈을 배우지 못한다면, 평화스러운 선거를 통한 정권교체는 영영 실현성 없는 꿈에 불과할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중앙은 말할 것도 없고 일부지역을 제외한 전국 대부분 지역에 사실상 일당 통치가 침투되어 견제와 반대 및 이설을 제기할 여지조차 없는, 이광요 수상의 싱가포르 비슷한 체제가 되지 않을는지 걱정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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