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가 삶을 편하게 한다
  • 나건 (홍익대 국제디자인전문대학원 원장) ()
  • 승인 2006.05.12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트렌드]
 
디자인의 중요성이 기업 차원을 넘어서 사회적으로 인식되고 있는 이때에도 디자인은 작은 부주의(?)로 인하여 사용자의 불편을 초래하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한다. 일상 생활에서 불편함을 초래하고 더 나아가 불쾌하게 만드는 사례를을 모아 놓아 인기 있는 인터넷 사이트도 있다 (www.baddesigns.com 참조).

잘못된 디자인 사례로 많이 인용되는 것 중 하나가 제품 외양이 비슷하게 생김으로써 사용자를 헷갈리게 하는 경우이다. 필자도 미국에 있을 때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그 친구가 머리카락을 풍성하게 하는 데 효과가 있다는 젤 형태의 제품을 머리에 바르는 것을 보고 가게에서 똑같은 제품을 사서 쓴 일이 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엉뚱하게도 필자가 산 것은 젤이 아닌 샴푸였다. 그것도 모른 채 밤마다 샴푸를 머리에 바르고 TV를 본 것이다. 똑같은 디자인 용기에 글자만 다르게 쓰여진 것을 몰라 생긴 실수였다. 하나는 ‘샴푸’고, 다른 하나는 ‘트리트먼트’였는데 말이다. 그런가하면 약 또는 주사액이 담긴 병의 라벨 디자인이 잘못돼 의사가 엉뚱한 약이나 주사액을 처방하는 실수 역시 국내외 병원에서 심심치 않게 발생하고 있다.

요즘 새롭게 떠오르는 트렌드 중 하나가 전문가들의 작업 성능을 향상시키는 한편 일반인도 전문가처럼 효과적으로 일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다양한 방법 및 제품의 등장이다. 특히 머리 손질(헤어 케어) 분야에서 이같은 트렌드가 두드러진다. 이를테면 헤어 살롱에 가면 놀랄 만큼 다양한 제품을 써 머리를 손질해 주는 것을 볼 수 있다.

사용자의 감성 만족시키는 ‘숫자의 힘’

집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사용자들은 잠자기 전 목욕을 하면서부터 다음날 아침 외출할 때까지 여러 개의 헤어케어 제품을 사용한다. 최근 일본의 오브코스메틱스는 모든 용기에 숫자를 크게 프린트하여 복잡한 작업인 머리 손질을 쉽게 해결해 주는 제품을 소개하였다(그림 참조). 샴푸는 1번, 트리트먼트는 2번, 헤어토닉은 3번, 헤어크림은 4번 하는 식이다.

오브코스메틱스의 상품 묶음에 인쇄된 숫자는, 사용자가 헤어케어 제품을 이용하는 대략의 순서에 맞게 정해져 있다. 예를 들면, 샴푸에 해당하는 1번의 경우에도 더 세분하여 1, 1G, 1M의 세 종류로 구성되어 있다. 1은 머리카락을 촉촉하게 하는 효과가 있다는 천연성분 헤마틴 등이 배합되어 있다. 1G는 끈적임이 없는 것이 특징이며, 그레이프 후르츠 엑기스가 배합되어 있다(G는 그레이프 후르츠의 머릿 글자이다). 민트의 머릿글자를 딴 1M은 머리카락을 팽팽하고 단단하게 하는 효과가 있으며, 박하기름이 들어 있다.

사용자는 이런 성분과 효능을 모두 기억할 수 없다. 그러나 숫자와 알파벳의 조합만 생각하고 있으면 성분명을 잊어버려도 사용하고 있는 제품을 쉽게 구입할 수 있다. 제품 숫자와 알파벳 조합으로 사용자의 기억에 대한 부담을 최소화시켜 줌으로써 사용자의 감성 만족을 추구하고 있는 셈이다.

이미 우리는 전문가와 일반인의 구별이 점점 어려워지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인터넷 등을 통한 지식의 공유가 가져 온 엄청난 변화이다. 요즘 건강, 특히 심장에 좋다는 (레드)와인의 효과 덕분에 식당에서 저녁을 하면서 와인을 마시는 것은 트렌드가 되었다. 이 경우 와인을 시음한 후 맛이 어떠냐는 물음에 항상 "음, 좋습니다!"라고만 대답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맛을 아주 구체적으로 묘사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

어떤 분야에서 전문가를 판단하는 기준은 그 전문가가 가진 감성의 정교함이다. 즉 얼마나 정교하고 세분화된 판단 기준을 가지고 있느냐가 전문가 여부를 결정짓는다고 할 수 있다. 얼마 전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차 맛을 감별하는 전문가인 품명가에 대한 인터뷰 내용을 들은 적이 있다. 품명가는 그 차가 재배된 고도와 재배 방법 더 나아가 차 잎을 딸 때의 기후까지도 알 수 있다고 한다.

전문가에게는 차별화된 진짜 전문가가 되기 위한 노력이 절실히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앞으로 다가올 메가트렌드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