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플레가 몰고온 ‘러시아의 실패’
  • 남유철 기자 ()
  • 승인 2006.05.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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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가, 전년보다 5천% 뛰어 과학자 월급 ‘소시지 값’


  “충격요법 실패했다??

  최근 서울에 온 안드레이 쿠즈네초프 박사는 가족과 함께 외국 연구소를 떠도는 러시아 ‘유랑 과학자??중의 한 사람이다. 한국에서 연구 계약이 끝나면 그는 다시 독일이나 미국에 가서 일할 계획이다. 그는 2년 전에 결혼한 철학박사 아내와 함께 떠돌이 생활을 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모스크바에서 아내와 내가 한달에 버는 돈은 미화 10달러였다. 그 돈으로는 아기를 덮어줄 담요 한 장도 살 수 없었다.??

  미화 10달러는 러시아 돈으로 7천루블 정도이다. 모스크바의 식품점에서 버터 한 덩어리를 사려면 1천루블을 줘야 한다. 러시아인들이 좋아하는 살라미 소시지는 kg당 4천루블까지 호가한다. 러시아 화폐 단위에 익숙지 않아도 이런 물가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은 가게의 현금 계산기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현금 계산기가 다룰 수 있는 최고 액수는 5백루블밖에 안된다.

  엘리트 과학자 부부의 한달 월급 7천루블이 공산주의 시절에는 결코 적은 임금이 아니었다. 수많은 러시아 과학자들 ‘떠돌이??로 만드는 주범은, 자고 일어나면 물가가 급등하는 살인적인 인플레이다. 작년 한 해 러시아의 인플레는 2천6백%에 달했다. 올해 2월에는 전년 대비 무려 5천5백69%를 기록해, 최악의 상황을 예상하고 있던 전문가들마저 아연 실색케 했다(도표 참조).

 

 중앙 은행, 닥치는 대로 돈 찍어내

  옐친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자본주위를 향한 개혁??은 러시아인들에게 단지 ??살인적인 물가고??로만 느껴진다. 이런 상황에서 공산주의 시절을 그리워하는 민심이 고개를 들고, 보수파가 준동하지 않을 수 없다. 영국의 경제 전문지 《이코노미스트》가 ??러시아의 미래를 전적으로 살인적인 인플레를 어떻게 피할수 있는냐에 달려 있다??고 진단할 정도이다.

  인플레의 원인은 ‘벌지 않은 돈??을 중앙 은행이 찍어내는 데 있다. 작년 한 해에만 러시아의 통화량은 열배 이상이 늘었다. 올해 1월에만도 20%가 늘었다. 작년 한 해 중앙 은행이 찍어낸 돈은 2조루블이 넘는 수준이다. 경제개혁이 시작되면서 수요는 감소했고, ??전환기??에 적응하지 못한 국영 기업들은 도산하기 시작했다. 국영 기업 경영자들이 대부분인 인민대표대회 대의원들은 정치적 압력을 행사 했고, 옐친 정부는 이에 순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앙 은행이 무조건 돈을 찍어 기업에 대출한 여신은 3조루블이 넘는다.

  조세 제도의 ‘미완성 개혁??은 세수 감소를 초래하는 주범으로 작용하고 있다. 공산주의 시절의 ??징발식?? 조세 제도를 폐기하고 자본주의식 부가가치세제를 도입했지만, 조세 기구와 인력이 제도 개편을 따라가지 못하는 실정이다. 러시아 정부의 재정적자는 러시아 국내총생산의 15%에 육박하는 수준이다. 게다가 1백여 민족이 넘는 러시아 연방의 ??공중분해??를 막기 위해, 연방 정부는 지방 정부의 재정지원 요청을 거부할 수 없는 형편이다.

  러시아의 실패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무역량은 줄어들고, 광공업 생산량도 마이너스 행진을 계속하고 있다. 러시아 국가통계위원회의 최근 발표에 따르면, 작년도 교역 총액은 전년 대비 23%가 감소한 7백31억달러를 기록했다. 수출은 3백81억달러로 25%가 감소했고, 수입은 3백50억달러로 21%가 줄었다.

  91년에 13%의 마이너스 경제성장률을 보인 러시아는 92년에 또 다시 마이너스 20% 성장을 기록했다. 러시아 경제 전문가들은 올해는 마이너스 25% 성장을 보일 것으로 내다 보고 있다. 이런 추세로 마이너스 성장이 계속된다면, 94년에 러시아의 경제규모는 91년의 절반으로 줄어들 것이다.

 

 서방에선 “돕자????놔두자??양론

  옐친과 인민대표대회의 ‘정치적 충돌??이 격화되면서, 서방에서는 옐친을 지원하기 위해 러시아에 경제지원을 더 많이 해야 한다는 소리가 높다. 미국을 위시한 서방 선진국들이 러시아를 포함한 독립국가연합에 약속한 차관은 9백억달러 수준이다. 그러나 현재까지 집행된 액수는 60% 선에 그친다. 그런데도 러시아는 매달 40억~50억 달러에 달하는 이자 및 현금 상환에 시달리고 있다. 부채상환을 채권국들이 연기해 주지 않는 한 서방의 지원은 별 의미가 없다.

  혼미한 정국 속에서 경제개혁마저 위기에 봉착해 있는 러시아를 보는 서방의 시각은 크게 두가지로 나뉜다. 제임스 베이커 전 미국 국무장관은 러시아가 성공적으로 자본주의로 탈바

 꿈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도와야 한다는 입장을 대변한다. 그러나 《유에스 뉴스 앤드 월드 리포트》 모티머 주커만 주간은 옐친이 살인적인 인플레를 다룰 현실적인 방안은 없다면 “러시아의 문제는 러시아인들이 해결하도록 놔두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러시아가 자본주의로 경제개혁하는 데 적용한 ??충격 요법(Shock Theraphy)??은 완전한 실패였다고 말한다.

  러시아를 지켜보는 경제학자들의 논쟁도 충격 요법의 성공 여부에 있다. 러시아 연방 정부는 옛 소련이 해체된 한달후 급속한 ‘자본주의화 개혁안??을 실시했다. 국영 기업을 사영화하고, 시장 경제 원리를 도입하는 데 점진적인 방법이 아닌 초단기적 도입 방식을 적용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서방 경제학자들의 조언을 받아 ??모든 것을 단 한번에??실시하는 충격 요법을 쓰기로 한 것이다. 지난 92년1월2일, 러시아 정부는 거의 모든 제품에 대한 가격 통제를 완전히 포기한다고 선언했다. 사회주의 경제를 하룻밤 사이에 공식적으로 ??매장??해 버린 것이다. 바로 그 다음날 러시아의 물가는 2백50%가 뛰었다.

  사회주의 경제를 자본주의로 전환하는 작업은 자본주의 경제학자들에게는 역사적인 검토가 불가능한 거대한 ‘경제학적 실험??일 뿐이다. 서방 경제학자와 유수 기관들은 러시아에 충격 요법만이 해결책이라고 권고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나타난 결과로만 본다면 충격 요법은 보수파 정치인들에게 너무나 큰 충격을 주었던 것 같다. 반면 러시아에 적용한 충격 요법의 강도가 약해서 지금과 같은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옐친의 정치적 미래가 보수 세력과의 타협 여부보다는 경제정책의 성공 여부에 있다는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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