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공에 심은 ‘은근과 끈기’
  • 더반·한종호 기자 ()
  • 승인 2006.05.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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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에 대한 백인 인식 바꾼 처녀 병아리감별사 이필용씨



 그가 처음 남아프리카공화국(이하 남아공) 땅을 밟은 때는 89년 6월4일, 남아공에 대한 경제 제재가 풀리지 않아 한국인이라고는 손가락을 꼽을 정도로 적었던 시절이다. 요하네스버그 공항에 도착한 그가 지닌 것이라곤 옷가지가 든 가방과 여권, 그리고 남아공 정부가 발급한 병아리감별사 노동허가서 한 장 뿐이었다. 영어라고는 한마디도 못했다. 4년이 지난 지금, 그는 남아공에서 가장 큰 양계 업체인 레인보우 농장의 선임 병아리감별사가 되어 있다.

 이필용씨(27). 그는 67년 경북 영천에서 8녀1남 가운데 여섯째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국민학교 6학년때 술 때문에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몇뼘 농사만으로 조석거리를 마련해야 했다. 간신히 중학교를 졸업한 이씨는 경남 양산에서 목화실을 뽑아 옷감을 짜고 염색까지 하는 중소기업인 태창기업에 들어갔다. 밤에는 야간 고등학교에 다녔다. 그라나 아무리 일을 해도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이씨는 병아리감별사가 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말을 듣고 곧바로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1년 뒤인 89년 남아공에서 취업요청서가 날아들었다.

 처음 남아공행을 결심했을 때 주위에는 온통 만류하는 사람뿐이었다. 돈도 좋지만 스물을 겨우 넘긴 처녀가 낯설고 위험한 곳에서 어떻게 살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이씨는 사람 사는 곳은 다 마찬가지라는 야무진 생각으로 남아공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외무부에 따르면 현재 남아공에 사는 한국교민은 3백85명에 이르지만 당시만 해도 상사원과 선교사 몇사람 외에는 한국인의 왕래가 거의 없었다.

 심한 인종 차별로 악명높은 남아공에서 이씨가 가장 먼저 부딪힌 벽은 언어 장벽과 함께 불평등한 계약조건과 한국인에 대한 그릇된 인식이었다. 정식 국교가 없어 어려움을 호소할 만한 곳도 없었다. 그가 처음 일하게 된 곳은 요하네스버그 남쪽에 있는 포쳅스트룸이란 도시였다. 막상 와 보니 한국에서 듣고 온 계약 조건과 달라 첫 1년동안은 매주 4백㎞나 떨어진 캐롤라이나 농장을 다니며 추가로 일을 해줘야 했다. 백인 사장은 보수에서부터 관사에 크기까지 사사건건 차별하려 들었다. 노동법상 보장된 휴가도 얻지 못했다. 이씨는 “남아공 백인들은 자기들이 세상에서 최고라고 생각하여 유색인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이씨는 또 “한국인에 대한 백인들의 인식도 좋지 않다. 그들은 한국인이란 돈을 조금만 줘도 가리지 않고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1년후 ‘봉급 3배’ 관철시킨 악바리

 그는 남아공에 온 뒤 몇 달이 지나서야 자신이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1년 계약이 끝나자마자 보수를 3배로 올려 달라고 요구했다. 사장은 물론 다른 한국인들조차 비웃었지만 결국 그의 요구는 원안대로 관철됐다. 무엇보다도 그의 능력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감별사의 능력은 시단당 감별한 마리수와 적중률로 평가한다. 그곳에서 일하는 영국인 감별사들은 잘해야 시간당 1천1백마리를 98%정도의 적중률로 감별해내는 데 비해 이씨는 1천5백마리를 99.8%의 비율로 감별해낸다. 농장 주인도 그의 능력에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이씨는 백인들에게는 능력을 인정받는 피고용자이지만 흑인들에게는 부담없는 친구이기도 하다. 백인에게는 어려워서 말도 못붙이는 흑인들이 자기네에게 농담도 걸고 야단들 치기도 하는 리디아(이씨의 새 이름)에게는 친근감을 느끼는 모양이다.

 그러나 이씨는 흑인들이 경영하게 될 남아공의 장래가 몹시 어둡다고 생각한다 남아공은 현재 새로운 헌법과 새로운 권력을 만들어내기 위한 흑백간, 그리고 흑인 단체들간의 격렬한 정치 논쟁에 휩싸여 있다. 내년 초쯤으로 예정된 선거 결과에 따라서는 흑인 정부가 들어설 수도 있다. 이씨는 그같은 변화가 남아공에 끝없는 분쟁과 파괴라는 재앙을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지역에 사는 다른 한국인들도 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씨는 지금 평온하고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다. 그가 일하는 농장은 더반에서 북서쪽으로 88㎞ 떨어진 피터마리츠버그 교외에 있다. 새벽 4시30분에 일어나 도시락 싸고 성경을 읽은 뒤 출근하여 5시40분부터 일을 시작하고 오후 3시쯤 시내에 있는 아파트로 돌아온다. 퇴근한 뒤에는 독일에서 병아리감별사로 일하는 한국인 약혼자에게 편지를 쓴다. 처음에는 한국인 병아리감별사가 이씨 혼자였지만 지금은 4명으로 늘어나 힘들 때 말벗이 되어 준다. 이씨는 오는 6월 12일 독일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그는 “그동안은 슬프고 외로운 시간뿐이었지만 앞으로는 밝고 기쁘게 살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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