珍山은 정치 인맥의 鎭山이 었다
  • 조용준 기자 ()
  • 승인 2006.05.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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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이기택 황명수 등 후예 여야'정복' … 이민우 유치송 고흥문조'직계‘


  珍山은 살아 있다! 엄밀하게 말하면 지난 60~70년대 신민당 당수로 야권을 이끌었던 柳珍山씨의 '진산계'가 살아 있다는 말이다. 그것도 살아 있는 정도가 아니다. '진산의 후예'들은 오늘날 한국 정치를 움직이는 최고 실세가 되어 있다.

  金泳三 대통령만 하더라도 그가 '40대 기수론'을 내세우기 전까지는 진산계였다. 김대통령은 진산이라는 커다란 울타리 안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진산의 집도 김영삼 대통령과 같은 상도동이었다. 민주당 李基澤 대표는 한때 '법진 산계'에 속했다. 민자당 黃明秀 사무총장은 진산계의 마지막 세대라고 분류할 수 있다. 개혁 정국초반에 최대 개혁 실세였던 崔炯佑 전 민자당 사무총장도 '김영삼 직계'였기 때문에 이 그룹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지금은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李敏雨 전 신민당 총재·柳致松 전 민한당 총재 高興門 전 국회부의장 등 일세를 풍미했던 사람들도 진산의 직계 부대였다. 이렇게 볼 때 현재 한국정치는 여야 가릴 것 없이 그야말로 진산계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셈이다.

 

보수 야당 시조와 양김 연결한 '다리'

  진산이 정통 야당의 맥을 이으면서 朴正照 군사정권에 의해 탄압받던 때와는 엄청난 차이가 아닐 수 없다. 강산이 두 번이나 바뀌는 동안 계보의 끄트머리에 자리잡았던 진산의 후예들은 천하를 호령하는 거목들로 자라났다(이하 존칭 생략).

  진산은 당시 40대 실력자들, 즉 김영삼 金大中 李哲承 세 사람 가운데서 김대중과는 소원한 관계였다. 반면 김영삼·이철승과는 오랜 연분이 있었다. 진산과 김영삼은 3대 국회이래 줄곧 민주당 구파로 계보를 함께해 온 정치적 동조자였다. 민주당 구파의 맥은 金性株 申翼熙·越炳玉을 통해 진산을 거쳤다가 김영삼으로 이어졌다. 이에 반해 김대중은 張勉 李相喆 朴順天등 일제 관료 출신이 중심이 된 민주당 신파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진산 체제 아래에서는 郵一亨과 연결된 비주류일 수밖에 없었다.

  진산은 광복 이후 한국 보수 야당의 시조들과 김영삼·김대중 그룹을 바로 연결해주는'다리'구실을 했다는 것이 정당사를 연구하는 정치학자들의 공통된 견해이다. 두 김씨와 관련한 진산의 역할은 命鎭午 박사를 새 당수로 영입한 68년 5월 신민당 전당대회가 하나의 좋은 예가 된다.

  최근 정계에서 활약했거나 활약중인 인물중심으로 파별 난립이 극도로 심했던 그때의 신민당 계보를 살펴보자. 먼저 주류에 진산계(김영삼 이민우 유치송 고흥문 趙尹衡) 유진오계(일명 筆洞 직계 李基澤 李重載 朴永祿 華汶植) 정일형계(金大中 金相賢 朴鐘律) 등이 포진하고 있었다. 비주류측은 李載형계(黃珞周 金在光 朴一 金玉仙) 洪翼杓계(朴容萬 越淵夏) 등이 있었다.  당시 김대중은 김영삼과 마찬가지로 유진오·유진산 라인에 합세했다. 진산을 수석부총재로 밀테니 총무를 보장하라는 것이 김대중의 합류 조건이었다. 전당대회 뒤 유진오는 새 총무로 김대중을 지명하기 위해 인준가능성을 타진했는데 반응이 신통치 않았다. 전임 총무였던 김영삼에게 협조를 요청했으나 김영삼은 필동 직계에 속한 鄭成太를 추천했다. 유진오도 그 길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그러자 김대중이 반발했다. 김대중은 진산을 찾아갔고 진산은 유진오에게 압력을 넣었다. 결국 유진오는 김대중을 총무로 지명했다.  인준투표 결과 김대중 총무안은 인준에 필요한 과반수에서 6표 모자라 부결되고 말았다. 이때의 비토 그룹은 김영삼 부대였다.


별수 없이 유진오는 정성태를 다시 임명해 가까스로 인준을 받았다. 그러나 정성태는 6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총무직에서 물러났고, 그 뒤를 김영삼이 다시 이어받았다. 김영삼의 마지막 원내총무 1년동안의 눈부신 투쟁은 그에게 야당의 한 세대를 뛰어넘어 대통령후보에 도전하는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  68년 5월의 총무인준 부결 파동은 김영삼과 김대중을 운명적인 라이벌로 만들었다. 이때를 시발로 두 사람 사이에는 돌이키기 힘든 틈이 생기기 시작했다. 68년 전당대회에서 김대중을 지원했던 진산은 70년 9월 대통령후보 지명대회에서는 김영삼을 추천했다. 당시만 해도 김영삼과 김대중은 결국 진산의를 안에서 권력 쟁패를 향한 지리한 경쟁을 벌였던 것이다. 바로 그 중간에 진산이 있었던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90년 3당합당 직후 소수계파인 민주계는김 영삼의 당권 장악 및 대통령후보 쟁취에 심각한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내각제
개헌 합의문서 파동과 김영삼의 '마산행'을 거치면서 그들은 나름대로 자신감을 갖기 시작했다. 현재 민자당 당직자인 당시 민주계의 한 핵심 인물은 김영삼의 당무복귀 직후 이렇게 말했다.

  "밖에서 볼 때는 몰랐는데 안에 들어와 보니 여당의 정치력이 얼마나 허약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여당의 정치라는 게 기본적으로 공작을 빼면 시체였다. 그것은 권력과 정보를 이용한 공작이지 정치가 아니다. 거친 정당판에서 험난하게 커온 우리와는 기본적으로 다르다. 따라서 국민적 힘을 바탕으로 우리가 밀어붙이면 그들은 밀리게 돼 있다. 우리는 막히면 뚫고 나가지만 여당 출신은 그럴 만한 자생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이 당직자의 말은 맞아 떨어졌다. 수적으로나 정보력으로나 민주계를 압도했던 민정·공화계는 김영삼이라는 저돌적인 불도저에 그대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무모할 정도로 정면 돌파를 감행하는 김영삼의 정치형태는 권위주의 체제 아래에서 안주해온 여당 정치인으로서는 가질 수 없는 일종의 '자산'이었다.

  김영삼은 어디서 그러한 힘과 정치력을 키울 수 있었던 것일까. 이름을 밝히지 말라고 요구한 한 정치학자는 이렇게 말한다.  김대통령이야말로 당대의 정치가 중에서 가장 뛰어난 정치력을 가지고 있다. 좀 허술한 듯 보이지만 정치력은 後廣(김대중)보다 한 수 위다. 물론 김대통령은 본능적으로 그런 기질을 갖고 있다고 보아야 하겠지만, 힘과 힘 사이의 관계를 정확히 읽어내는 데 타의 추종을 불허했던 진산에게서 상당 부분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진산은 바로 그 때문에 권모술수에 능했다는 평가를 받지만 그 분이야말로 정치의 달인이었다. "  이 학자는 또 "진산과 김대통령의 돌파력은 비슷한 데가 많다. 다만 김대통령이 적극적으로 여론의 힘을 이용한다는 차이점이 있다"라고 말했다.

 

대화와 협상으로 '차선의 실리' 추구

  진산은 자신의 정치 형태에 대해 말할 때마다'현실적인 시국관'을 강조했다. 그는 강경과 극단보다는 대화와 협상을 택했다. 극한투쟁 노선을 배격하고 차선의 실리를 추구하는 형태였다. 그것은 선명 야당 노선을 내세운 사람들에게 공격의 표적이 됐다. 그러나 그는 총칼의 힘으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의 성격을 강조하면서 힘으로만 맞부딪치면 얻는 것은 정권의 변칙 교체뿐이며, 이런 것은 정치인으로서 피해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당시 정가는 이러한 진산의 정치 형태를'진산 스타일'이라고 불렸다.  그가 내각책임제를 소신으로 했던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는 군사 정권으로 출발한 박대통령을 선거를 통해 물리치기는 어려우므로, 대통령제와 내각제의 절충 형태로 정권 교체를 실현하는 것이 야당이 택할 현실적 정권 투쟁 방법이라고 말해왔다. 야당의 3선 개헌 반대 투쟁과 관련해 그는, 어차피 박대통령의 3선을 막지 못할 바에야 여야 협조체제로 박대통령의 3선을 수월하게 도와주고, 박대통령을 설득해 개헌한다는 구상을 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군정 종식'을 내건 87년 대통령선거에서 패하고 그 이듬해 총선에서마저 통일민주당이 제3당으로 내려앉았을 때 김영삼의 머리에 떠오른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당시 김영삼의 머리에는 혹 진산이 떠오르지 않았을까. 보수대연합 구상을 하면서 그의 선배이자 정치의 달인이었던 진산을 떠올렸음직하다는 생각은 지나친 비약일까.

  이기택은 처음에는 진산계가 아니라 유진오계였다. 68년 신민당이 고려대 총장이던 유진오를 새 당수로 영입할 당시, 유진오가 자기 사람 심기 차원에서 고대 총학생회장출신인 이기택을 끌어왔던 것이다. 그러나 '유진오 시대'는 오래 가지 못했다. 유진오 시대의 실질적 개막과 함께 그는 병상에 누웠다. 오랜 기간 당수가 유고 상태에 있자 진산이 차기 당수로 떠오르기 시작했고, 도쿄 제국 호텔에서 맺은'倫·柳 밀약'에 따라 유진오계 가진 산을 지지해 '법진산계'를 형성했다.  진산계에 속했던 정치인들이 모두 성공한것은 아니다. 정치판의 부침을 따라 정치 무대에서 사라져간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조윤형은 김영삼과 같은 진산 직계였다.  그 해 11월 김영삼이 '40대 기수론'을 제창하며 71년 대통령후보 경쟁에 도전해 진산의 품에서 벗어나기 시작했을 때도 김영삼의 몇 안되는 충실한 지지자였다.

  당시 진산은 자파 당원에게 김영삼 지명운동에 동조하지 말도록 지령을 내렸고, 정일형·이재형 등 진산과 라이벌이던 다른 파벌의 노장층 역시 진산과 보조를 같이했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세찬 노장층의 공격에 휘말린 김영삼은 김대중의 협조가 필요했다. 그때 김대중에게 파견한 김영삼의 '밀사'가바로 조윤형이었다. 김대중을 찾아간 조윤형은 "야당이 활로를 트기 위해서는 침체 요인인 보수의 벽을 허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김의원도 김영삼과 함께 후보 경쟁 선언을 해서 '40대 후보'를 쟁취하는 공동전선을 펴는 것이 필요하다"라고 제안했다.

 

'진산 인맥'에 대한 새로운 조명 필요

 한때 김영삼의 '밀사'를 맡을 정도로 그와 돈독한 관계였던 조윤형이었지만 유신을 거치면서 김대중에게 기울었다. 지난 총선에서는 鄭周永의 국민당에서 전국구로 의원 배지를 달았다. 그러나 그것도 얼마 가지 못해 민자당 입당설 속에 국민당을 탈당했다. 대통령선거 직전 그는 민주당으로 다시 돌아갔다. '진산계'였으면서도 행로에 따라 오늘날의 위상에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지난 3월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이기택 대표는 "민주당이야말로海公(신익희)과 維石 (조병옥)의 맥을 잇는 유일한 정통야당이다"라고 역설했다. 명분 차원에서 보자면, 또 현재의 정계 구도에서 보자면 민주당이야말로 신익희와 조병옥의 야당을 계승한 적자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인물로 접근해 볼 때 정통야당의 계승자였던 김영삼 대통령은 지금 민자당 총재이다. 지금의 민주당은 김대중 세력이 실질적 당권을 쥐고 있다는 점에서 신파의 맥을 잇고, 민자당이 옛 민주당 구파의 연결선상에 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이에대한 역사적 해석은 후세 사가들의 몫이다. 그러나 진산이라는 거물을 거쳤던 정치인들의 현재에 대해서는 새로운 접근이 필요한때이다.

  진산은 많은 사람에게서 잊혀졌다. 진산을 기억하는 연령층은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그러나 그의 정치술을 이어받은 사람들은 오늘날 한국 정치의 중심점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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