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 펼친 김대중 “정치는 사절”
  • 김재일 차장 ()
  • 승인 2006.05.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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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호킹과 이웃, 연구소 오가며 통일 집중연구‥‥6월 귀국후 집필 · 강의예정


 

  지난 1월 하순 새 정부 출범을 앞두고 술렁이던 정국을 뒤로 한 채 훌쩍 영국 유학길에 오른 金大中전민주당 대표. 김씨는 영국에서 석달 동안 무엇을 했고,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국내에서 세차게 일고 있는 개혁의 소용돌이를 이국 땅에서 바라보는 그의 감회는 어떨까. 권력을 향한 의지가 남달라 몇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까지 정치에 강한 집념을 보였던 그는 과연 정치를 포기한 것인가.  지난 20여년 동안 정치 무대를 주름잡았던 주역의 한사람으로서 애증의 대상이 되었던 인물이었기에 유난히 그의 근황과 구상에 대해 궁금해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김씨는 영국에 있는 동안 우리나라 정치인이나 언론을 철저하게 외면하고 있다. 국내 언론사 현지 특파원들의 인터뷰 요청을 거절할 뿐만 아니라 세미나 등 회합에서 만나도 함구로 일관하고 있다. 영국 정부 초청으로 영국에 간 김윤환 민자당 의원이 인사차 들르겠다고 했으나 "무수한 억측을 남을 수 있으니 서로를 위해 만나지 않는 게 좋다"면서 면담 요청을 사절하고 전화로만 인사를 나눴을 정도다.

  그동안 김씨를 방문한 사람은 김씨의 장남흥일씨와 권노갑 김옥두 최재승 남궁진 의원등 측근, 그리고 홍사덕 의원과 대통령선거때 김씨를 지지하는 텔레비전 연설을 한 탤런트 정한용씨다. 그들 중 가장 최근 김씨를 만나고 돌아온 權魯甲 의원과 동교동의 張誠環 비서를 통해 그의 근황과 관심사를 알아본다.

 

인사차 방문한 측근에 "공부하라" 당부

 인사차 방문한 권노갑 민주당 최고위원은"국내 정치 상황과 관련해 귀국 시기를 늦출 것 같다"는 언론 보도를 부인하고 김씨가 원래 계획대로 6월 말에 귀국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측근 중에 그의 귀국 시기를 국내정치와 연관해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직접 만나 확인한 결과 김총재(측근들은 지금도 그렇게 호칭한다)는 원래 일정대로 귀국하겠다고 했다"고 전한다.  그는 김씨가 영국에서조차 기계적이라고 할 만큼 빈틈없이 짜여진 시간표대로 움직이는 것을 보고 감탄했다고 한다. 권의원은 김씨가 몇차례씩이나 의원들에게 "공부하라"고 당부했다고 전했다.

  90~93년 발표된 남북한 통일과 북한의 정치 변동에 관한 논문 63편을 가지고 김씨를 방문해 2주 동안 그의 연구 생활을 돕고 돌아온 장비서는 그의 영국 생활을 다음과 같이 상세하게 전한다.

  김씨는 오전 6시에 어김없이 일어나 대개1시간 동안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더 타임스〉, 〈선데이 타임스〉를 읽고 유럽공동체 경제, 독일 통일, 북한 핵 문제 등 한반도 관련 기사를 스크랩한다. 아침 식사가 끝나면 9시께 새에게 모이를 주고 곧장 연구실로 향한다. 김씨가 초청 연구원으로 있는 클레어 홀 칼리지의 국제 문제 연구소는 걸어서 10분 거리이다. 거기서 오후 6시까지 연구에 몰두한다. 점심은 대개 이희호 여사가직접 연구실로 전달한다. 학자들과 점심이나 저녁식사를 하기도 하는데 연구실 가까이에 있는 음식점을 이용한다.

  김씨는 그동안 세계적인 석학들을 포함해약 50명의 저명 인사와 만났다. 케임브리지대학교 부총장인 데이비드 월리엄경과는 '사회주의 대 민주주의, 전체주의 대 인도주의의 대결은 끝났는데 어떤 이데올로기가 미래의 세계를 지배할 것인가'에 대해 논했다. 개신교 신학자인 칼 빌헬름 니버 교수와는 통일이전 동독의 교회 활동과 통일에 대한 교회의 기여도, 서유럽 사회의 윤리·도덕 상실에 대한 문제점을 논의했다. 알스테어 긋레드 영국 외무성 동아시아 담당 차관과는 남북통일 전망, 독일 통일, 한 영관계에 대해 토론했다.

 

김씨 찾은 방문객 "산책 모습 쓸쓸해 보여"

  그는 또 에딘버러 대학교 패터슨 교수와 유럽 통합과 관련한 마스트리히트 조약의 법적 문제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다. 케임브리지 대학교 킹스 칼리지의 앤서니 기든슨, 존 던교수와는 냉전 이후 새로운 이념의 대두 및 강대국과 약소국 간의 관계, 클린턴 행정부의 과제에 관해 의견을 나눴다.

  미국 하버드 대학교에서 수학한 김씨는"면학 환경은 하버드보다 케임브리지가 낫다"며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조용한 분위기에 대해 만족해한다고 했다. 그가 집중 연구하는 분야는 독일 통일, 유럽공동체 통합, 남북한통일로 모두 통일 문제라는 점이 관심을 끈다. 장비서는 김씨의 연구 내용을 살펴볼 때 그가 남북 통일을 지상 목표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김씨는 뉴스뿐만 아니라 영어 공부를 위해 저녁 식사 후에 매일 1시간30분 정도 BBC방송을 듣는다. 또 연구실을 오갈 때나 산책할 때 손바닥 절반 크기의 단파 라디오를 호주머니에 넣고 리시버를 귀에 꽂고 다니면서 영어와 친숙해지기에 힘쓴다. 4백여권의 책이 꽃혀 있는 그의 서재 책상 위에는 《세계사대사전》《국사 대사전》《웹스터 영어 대사전》과 조그마한 영한 사전, 텔레비전 헤드폰 등이 놓여 있다. 그는 세계 여러 나라 수도의 위치를 한눈에 볼 수 있게끔 더 타임스사가 발간한 세계지도를 서재 벽에 붙여 놓고 가끔 그를 방문한 손님과 각 나라의 흥망성쇠에 관해 이야기하기를 즐긴다.  김씨가 유별나게 꽃을 좋아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는 영국에서도 꽃 사는데 '상당한 돈'을 썼다. 열흘에 한번 꼴로 저녁 때 산책 삼아 집에서 15분 거리인 꽃가게에 들러 꽃과 화분을 산다. 그래서 꽃가게 아저씨는 그곳에서 가장 친숙한 사람이 됐다. 그는 화분을 테라스에 놓고 꽃을 가꾸는데, 집 앞을 지나는 행인들도 꽃을 볼 수 있도록 화분을 배치하는 데 신경을 쓴다. "일년 내 내푸른 잔디를 볼 수 있는 영국처럼 우리나라도'상록수'정책을 펴야 한다" "모든 식물은沸性이 있을 것이므로 항상 소중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말하는 김씨는, 이슬비가 내리는 날은 우산을 쓰고 인근 숲을 산책하곤 하는데, 그를 방문했던 측근들은 그때 매우 쓸쓸하게 보였다고 말한다. 환경 분야에도 각별한 관심을 보이는 그는 "앞으로 우리는 자연과 환경 그리고 동식물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닫게 될 것이다"라고 측근에게 강조했다.

  김씨의 바로 옆집엔 천체 물리학자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스티븐 호킹이 살고있다. 호킹 박사는 지금 자기에 관한 영화를 촬영하기 위해 로스앤젤레스에가 있는데, 부인을 통해 4월에 영국에 돌아가서 꼭 만나고싶다는 말을 김씨에게 전하기도 했다. 호킹박사는 3년전《시사저널》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했을 때 영국대사관이 주최한 리셉션에서 김씨가 그에게"천체 물리학에 대한 지적호기심과 학문적 신념이 어디서 나오느냐"고한 질문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고 한다.

 

정치 의도' 오해 살까 연구소 계획 백지화

  통일·자연·환경공해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즐기는 김씨이지만 국내 정치 이야기만 나오면 냉답하게 돌변한다. 측근들은 그가 새 정부의 개혁 등 국내 정치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고 강조한다. 그는 한인 유학생들 모임에 초대받았을 때도 토론내용에서 정치 부문을 뺀다는 전제를 하고 참석했다. 그는 거기에서 유럽공동체 통합, 학생들의 전공, 인생, 도덕, 윤리 등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는데 한 학생이 정치와 관련된 문제를 슬적 묻자 그 부분에 대한 답변을 어물쩍 피해 넘어가 폭소를 자아내기도 했다.

  김씨는 자신의 앞날을 어떻게 설계하고 있을까. 그는 측근을 통해 재산 헌납 계획을 처음으로 밝혔다. 자신의 재산을 3개 분야로 나눠 재활원 기증을 통한 장애자 복지 기금 조성, 한반도 평화를 위한 '아시아 평화 재단'설립, 통일 문제 연구 기관 출연 등을 위해 희사할 것이라고 한다. 그는 "사재를 한푼도 갖지 않겠다. 때가 되면 전 재산을 헌납하겠다"고 전했다.

  그는 유럽의회 지도자들과 유럽 통합에 관해 대화하기 위해 4월 하순 벨기에 브뤼셀을 방문한다. 그 후 4월30일부터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열리는'세계 지도자 회의'에 참석할 계획이다. 이 회의에는 각국의 전·현직 원수가 참석해 냉전 시대 이후 선진국과 후진국 간의 평화와 협력 문제에 대해 의견을 나눈다. 5월에는 동유럽을 방문한 후 유니온 신학교에서 수여하는 '유니온상'을 받으러 미국을 방문한다. 6월에는'국제사면위원회'초청을 받아 호주에서 열리는 회의에 참석할 계획이다.

  김씨는 7월에 자기에게 평생 명예 교수직을 준 모스크바 대학교에서 강의할 생각이다.6월 말에 귀국할 예정이니 우리나라에서 러시아로 출발하게 된다. 그의 국내 생활은 남북한 통일 연구와 현대 정치사를 집필하는데 집중할 것으로 보인다. 국내외 출판사들은 벌써부터 그가 집필할 현대 정치사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고 한다. 측근들은 김씨가 연구와 집필 활동을 위해 칩거할 수 있도록 서울 근교의 한적한 곳을 물색하고 있다.'현대정치연구소'를 설립하려던 당초 계획은'정치적 오해를 불러일으킬 우려' 때문에 백지화했다.

  김씨는 서울대행정대학원, 고려대 정책과학대학원, 경희대 평화복지대학원에서 강의요청을 받았으며 이를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케임브리지 대학 출판부에서는 김씨의 저서인 《세계 8강으로 가는길》을 영문으로 출판하는 문제를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정식으로 요청해 올 경우 이를 허락할 계획이다. 그러나 김씨는 일본 NHK등 세계적인 방송사들이 〈김대중 일대기〉를 제작하려고 요청 한 인터뷰 제안은 거절했다.

  과연 김씨는 정치와 절연했는가. 이에 대 한 추측은 아직도 여러 갈래이다. 그러나 장 성민 비서는 "우리는 자기들의 유희적 만족 을 위해 현실 정치를 일시적 쾌락의 대상으로 보려는 자의적 해석을 삼가야 한다. 정치에서도 진실한 가치와 미적인 면을 있는 그 대로 받아들이는 이성적인 풍토가 자리잡아야 한다"고 말해 최근 나도는 김씨의 향후 행보와 관련한 정치적 해석을 냉담하게 일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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