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진상 밝히려 살아왔다”
  • 정희상 ㆍ김상현 기자 ()
  • 승인 2006.05.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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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데타 진압 장군들 법적 대응 나서 …‘수모’와 고통의 14년


 79년 12·12쿠데타는 역사의 갈림길임과 동시에 장군들 인생의 갈림길이기도 했다. 인생과 목숨을 건 ‘한판승부’에서 쿠데타를 성공시킨 세력은 정권을 잡고 이후 13년간 한 시대를 풍미했다. 그들은 전두환·노태우 등 두명의 대통령을 배출했고, 이 통치 기간에 나머지 가담자 전원이 요직을 차지했다.

 반면에 쿠데타 진영 반대편에 섰던 장군들의 경우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 갖은 수모와 충격에 시달리며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왔다. 비참한 삶 자체마저도 일반의 관심으로부터 차단돼야 했던 ‘패장’들의 세월은 군의 역사 측면에서도 크나큰 상처가 아닐 수 없다.

 12·12쿠데타 당시 군부에서 어느 선까지 쿠데타 반대편이었는지를 확연히 가르기는 힘들다. 전방 부대를 지휘하던 장군들의 경우 그날 밤 서울에서 숨가쁘게 전개돼 성공한 쿠데타를 자신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경우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쿠데타 반대 진영은 정식 지휘계통상, 그리고 반란진압 고유 업무상 서울에서 경복궁에 모인 쿠데타 세력을 제압하기 위해 병력 동원에 적극 나선 장군들로 한정시킬 수밖에 없다. 이들은 쿠데타가 성공하자 체포돼 강제 예편당하거나 한직으로 전보됐다가 군복을 벗는 불이익을 당함으로써 자연스럽게 하나의 ‘진영’으로 분류되는 것이다. 장태완 수경사령관, 정병주 특전사령관, 이건영 3군사령관, 하소곤 육본 작전참모부장, 문홍구 합참본부장, 김진기 육본 헌병감, 윤흥기 9공수여단장이 그들이다.

 이들은 쿠데타 진압에 실패함으로써 대부분 이튿날 새벽 쿠데타군에 체포돼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연행되었다. 특히 장태완 수경사령관과 정병주 특전사령고나의 경우 휘하 병력을 동원해 쿠데타 진압을 적극 시도했다는 점 때문에 겪은 고통은 남달랐다. 장태완 장군은 12월13일부터 이듬해 3월 초까지 서빙고 분실에서 조사받은 뒤 석방되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생활이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보안사 요원(합수부 특수수사대 소속) 2명이 6개월 동안 봉천동 장씨 집에서 숙식을 함께 하며 장씨를 가택연금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장장군의 가문은 비운의 연속이었다.

 

전국 유랑하며 분노 삭여

 “완고한 선비 기질이었던 제 아버님께서는 12·12반란 소식을 접하신 후 방문을 안으로 걸어잠그고 드러누우셨습니다. 예로부터 나라에 모반이 있을 때 충신 집안은 모반자 밑에서 살아갈 수 없는 일이라시며 식음을 단절하시다 내가 석방되고 난 뒤인 80년 4월18일 73세로 별세하신 것입니다.”

 장태완 장군은 그 ‘불효’의 충격으로 그뒤 전국 산천을 누비는 버릇이 생겼다고 말한다. 한번 집을 나가면 1주일 이상 소식을 끊고 전국 산천을 유랑하며 산꼭대기에 올라 꺾여져나간 장군의 기개를 북받치는 분노 속에 외쳐보기도 하고, 산 아래 펼쳐진 국토에 평화와 민주 발전이 깃들기를 기도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이 다시 닥친다. 슬하에 둔 1남1녀가 탈없이 자라 딸은 외국어대 서반아어과에, 아들은 서울대 자연대학에 진학했다. 80년 가택연금 당시 보안대원 2명이 6개월간 대학 입시 준비를 하는 아들 방을 차지하는 소란 속에서도 아들 성호군은 무난히 합격해 장장군은 무척 대견하고 미안했다고 한다. 서울대 81학번 성호군은 1학년 말에 전과목 A학점으로 수석을 차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82년 겨울 아들에게 변화의 조짐이 보였다. 누나와 함께 암울한 시대 속에서 쿠데타군에 의해 제거된 아버지와 집안의 앞날을 고민하는 일이 잦아지더니 82년 1월9일 “아버지 다녀오겠습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홀연히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은 것이다.

 “방학중이라 서울로 시골로 친구집으로 전화를 해봤으나 아무 소식도 찾을 수 없이 한달이 지나갔습니다. 2월10일 오후에 아내가 전화를 받더니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어요. 아들이 할아버지 묘소 근처에서 변사체로 발견됐다는 전화였습니다.”

 장태완 장군은 주검으로 변한 아들을 부둥켜안고 서울로 돌아오던 순간을 되뇌이더니 더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인생은 아들이 시체가 되어 돌아온 날부터 죽음과 같았다는 것이다.

 지금 장태완 장군은 아들이 마지막 간 자리에 다음과 같은 비문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고 장성호의 종착지. 서울대학교 자연대학 1학년생. 저 높은 곳 어디멘지 찾고 찾았으나 네가 찾은 곳이 바로 여기구나. 엄마 아빠가 태어난 중간, 이곳을 찾아서 한맺혀 못다 핀 20세의 젊은 나이 푸른 강물 바라보며 못다 핀 꽃이 되어 이곳에 누워 서울대 수석 열매 여기에 뿌렸구나. 1960.10.1~1982.1.12. 본적 : 경북 칠곡군 인동면 신동 520번지. 아빠 : 장태완-1979년 12·12 군사쿠데타를 진압하다 구속 예편되어 위로는 아버지 아패로는 외아들을 잃게 된 죄인. 엄마 : 이병호, 누나 : 장현리.”

 장태완 장군은 스스로를 “12·12 반란을 막지 못한 국민의 죄인이자 가족 3대를 망친 가문의 죄인”이라고 표현했다. 따라서 차라리 죽는 것이 떳떳하고 마음 편한 일이지만 “12·12 쿠데타의 진상을 역사와 국민 앞에 증언할 마지막 임무 하나만 마치고 이승을 하직하겠다는 일념으로 ‘구차한 삶’을 살고 있다는 주장이다. 엄청난 시련 속에서 그는 심장병을 얻어 불편한 몸으로 ”요즘 12·12쿠데타 주역들을 법정에 세우려는 고소장을 쓰고 있다“고 말한다.

 

직속 부하에 체포된 정병주

 장태완 수경사령관이 역사의 증언자를 자처하며 12·12사태 후유증 속에 살아가고 있다면 정병주 특전사령관은 12·12사태 진상의 열쇠를 쥔 한 당사자로서 살아 생전 벼르던 진상 규명을 유언으로 남긴 채 생을 마감했다. 정병주 장군은 12월13일 새벽 특전사령부에서 직속 부하 최세창 공수여단장이 이끄는 쿠데타군에 체포된 후 보안사 서빙고 분실에서 석달간 취조를 당했다. 그는 체포 당시 쿠데타군의 총격에 손목을 부상당한 뒤 바로 수도통합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다.

 80년 봄 풀려나온 정병주 장군 집에도 보안사 요원 2명이 상주했다. 감시와 고통을 피해 전국 산천을 누비는 유랑생활을 한 것은 정병주 장군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진상 규명을 위한 그의 일념은 집요했다. 12·12사태와 관련한 국내외 모든 자료를 수집하는가하면, 장태완 수경사령관 등 쿠데타 반대편에 섰다가 병상에 누은 장군들에게 오래 살아남아 역사의 증인이 되자는 다짐도 했다. 그러던 정병주 장군이 사망한 것은 지난 89년3월. 당시 수사기관은 ‘자살’이라고 발표했지만 유가족과 군 동료, 선후배 들은 납득하기 어렵다며 강한 의혹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현재 정병주 장군의 유해는 국립묘지에 안장돼 있다.

 12·12쿠데타 현장에서 총격을 받았으나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지고 살아가는 장군도 있다. 당시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이던 하소곤 소장이다. 하장군은 쿠데타군에 의해 왼쪽 폐가 관통당하는 중상을 입고 3개월에 걸쳐 수술과 치료를 받은 끝에 겨우 목숨을 건졌다. 치료 후 보안사에서 수사를 받고 강제 예편되어 풀려난 그의 집에도 4개월간 보안사 요원이 상주했다.

 하소곤 장군은 요즘 심경을 이렇게 밝혔다. “총상이 심해 요즘도 비나 눈이 내리면 후유증에 시달린다. 나에게 총을 발사한 후배 장교는 아직까지 한번도 찾아와 사과한 일이 없어 더욱 괘씸하다.”

 하장군은 그날의 총상으로 고통스런 세월을 보내다 지난해까지 교통안전진흥공단 이사장을 맡은 뒤 최근 그만두고 집에서 쉰다. 하소곤 장군도 12·12사태의 진상을 기필코 규명해 내겠다고 다짐했다.

 12·12쿠데타 진압군 편에 섰던 대부분의 장군들은 오랜 유랑 생활이나 은거 생활을 해왔다. 당시 육군본부 헌병감이었던 김진기 소장도 그런 경우이다. 김장군은 ‘쿠데타 주역들의 장식품이 되기 싫어’ 보안사에서 수사를 받은 후 스스로 군을 떠났다. 그는 이후 수원에 내려가 농사를 짓다가 “반란군 주역들이 득세하는 세상이 싫어 아예 사람들 눈에 안띄는 섬(보문도)으로 들어가” 양식업에 손을 댔다.

 “별다른 지식 없이 손댄 사업이라 성공할 리가 없었지요.” 그는 이후 군인 출신으로서의 전문성을 살려 지난해까지 영국 전략문제연구소와 일본 평화연구소 연구원직을 맡아 국제관계 및 지정학을 연구했다. 노태우 정부로부터 이런저런 보직을 제의받기도 했지만 모두 거절했다고 말한다.

 김진기 장군은 새 정부가 들어선 지난 4월15일 토지개발공사 이사장 제의를 수락해 현재 그 보직을 밭고 있다. 12·12사태 진상 규명 얘기가 나오자 그의 답변은 단호해졌다.

 “12·12쿠데타 피해자는 우리 진압군측 장성들이 아니라 순수 직업군 전체와 국민이다. 쿠데타 주역들은 국가에 씻을 수 없는 해악을 끼쳤다는 점에서 마땅히 처벌받아야 한다. 새 정부가 나서서 12·12의 진상을 규명하고 그에 따른 조처를 할 것으로 기대한다. 12·12는 어떤 군사반란보다 더 무법적이고 명분없는 짓이다. 앞으로 이같은 불행이 일어나지 않도록 예방하는 일이 중요하다.”

 

시효 만료는 내년 12월12일

 12·12 당시 특전사 공수여단장 중 유일하게 쿠데타 진압군측에 가담한 사람이 있다. 9공수여단장 윤흥기 장군으로서 그는 정병주 특전사령관의 명령으로 그날 밤 쿠데타 진영의 온갖 방해 속에 도보로 부평에서 서울 방면으로 행진하다 이미 한강대교를 쿠데타군이 장악해 버려 부대로 되돌아간 장본인이다. 83년 2월1일 소장으로 강제 예편당한 윤장군은 그 뒤 실업자 생활을 하다 86년부터 재향군인회 소속 향우실업 대표를 5년간 맡았다. 현재는 국방연구원 연구위원으로 있다.

 지난 4월 머리를 다쳐 뇌수술후 요양중인 윤장군은 12·12쿠데타 진상 규명에 여생을 바칠 각오라며 이렇게 말했다. “헌법·군형법상 12·12주역들은 모두 단죄할 대상자들이다. 실정법을 어긴 범죄자들을 마땅히 다스려야 다시는 일부 정치 군인이 군 본연의 임무를 망각하는 짓을 못할 것이다. 94년 12월12일이면 시효가 만료되므로 그 전까지 쿠데타 주역을 법정에 세우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시사저널》 취재진이 만난 대부분의 12·12쿠데타 진압군측 장성은 오랜 시련을 딛고 진상 규명 작업을 위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들은 “지금까지 쿠데타 주역들의 ‘무용담’으로 채워진 그날의 진상을 재조명해 순수 직업 군인의 노력과 고통이 군의 정사(正史)로 기록돼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있다. 이에 따라 이들은 5월부터 군 원로들, 순수 직업 군인들은 물론 법조계 인사들과 함께 법적인 대응에 나설 계획이다.

 문민 우위의 군통수정책을 내세우는 새 정부가 12·12 쿠데타 진압군측 장성들의 이같은 노력에 어떤 조처로 화답할지 비상한 관심이 모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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