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에서 온 편지〉
  • 경기 장봉ㆍ김상현 기자 ()
  • 승인 2006.05.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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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사랑 주세요”


외딴섬 장애인 재활원, ‘육지’와 교신

 지난 3월로 창간 한돌을 맞은 〈섬에서 온 편지〉는 한 정신박약 장애인 재활원에서 달마다 펴내는 4쪽짜리 회보이다. 여기에서의 ‘섬’이란 그 재활원이 자리잡은 지리적 장소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사회에 편입되지 못하고 소외된 장애인들의 처지를 가리키는 상징어로도 읽힌다.

 이 섬은 ‘장봉도’라고 하는 서해의 작은 섬이다. 이 섬에 있는 장봉혜림재활원(경기도 옹진군 북도면 장봉리 105-1)에 가려면 월미도에서 영종도까지, 영종도 삼목 배터에서 다시 장봉섬까지 배를 두번 갈아타야 한다. 갈아타는 품이 좀 들 뿐, 기실 인천에서 장봉섬까지 가는 데는 한시간 반이면 족하다.

 〈섬에서 온 편지〉는 장봉재활원이 바깥 사회와 소통하는 중요한 도구이다. “부족한 운영비에 보탬을 줄 후원자를 구할 목적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장애인에 대한 일반의 그릇된 인식을 바로잡으려는 목적이 더 크다”고 임성만 원장(35)은 말한다. 재활원이 외딴섬에 자리잡을 수밖에 없었던 것도 일반인의 그릇된 인식 탓이었다. 장애인을 ‘동정은 하지만 함께 지내기는 싫은’ 존재로 생각하는 이웃의 겉 다르고 속 다른 인식이 이들을 장봉섬까지 떠민 것이다. 그렇다고 장봉섬에서 이들을 순순히 받아들인 것도 아니었다. 낫을 들고 찾아와 “이 섬에 병신들을 데리고 들어오면 죽여버리겠다”고 위협하는 주민도 있었다. 그러나 더이상 갈 곳이 없었던 임원장은 이를 악물고 참았다. 참으면서 주민과 꾸준히 교류를 꾀했다. 7년이 지난 지금 그 꾸준함은 재활원을 이웃으로 받아들인다는 주민의 묵시적 동의를 이끌어냈다.

 모든 시작이 그렇듯이 〈섬에서 온 편지〉는 퍽 어렵게 첫발을 내디뎠다. 재활원 홍보 업무를 맡은 장국현씨는 “창간호를 4천부 찍었는데 어디에 보내야 할지 몰라 전화번호부에 적힌 관광서·사회단체 들의 주소를 보고 발송했다”고 말한다.

 

“장애는 특별하거나 괴상한 것 아니다”

 매달 1만6천여부를 찍는 지금 재활원 후원자는 모두 5백12명으로 늘었다. 그들은 대부분 회사원·주부·교사·학생·전화교환원·군인·은행원 등 주위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임원장은 “후원 액수나 지위는 중요한 게 아니다. 우리를 이해하고 자기 깜냥대로 도와주는 것이 고마울 뿐이다”라고 말한다. 장애인 사진을 찍기 위해 2주 동안 재활원에 머물렀던 중앙대 사진학과의 한 대학생은 지난 4월 중순 새 후원회원 15명의 명단과 함께 격려 편지를 보내오기도 했다.

 임원장이 〈섬에서 온 편지〉를 통해 꾸준히 사회에 내보내는 메시지는 지극히 평범한 것이다. 그 메시지는 “장애인도 정상인과 다를 바 없이 희로애락을 느끼는 ‘인간’입니다”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장애인이 내 이웃이라고 느껴질 만큼 낯이 익어야 한다. 〈섬에서 온 편지〉는 그 ‘낯 익히기’의 첨병인 셈이다. 임원장은 “나는 어릴 때부터 장애인들과 함께 생활해왔기 때문에 그들이 전혀 낯설게 여겨지지 않는다. 나와 같은 경우라면 누구든 마찬가지일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의 부친은 오래전부터 부천혜림원을 운영하는 임병덕 목사(74)이다.

〈섬에서 온 편지〉말고도 임원장이 낯 익히기를 위해 열심히 추진하는 일은 원생들을 데리고 인천이며 서울 등지로 나들이가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자꾸 ‘보여야’한다는 그의 믿음 덕택에 장봉재활원 원생들은 바깥 구경을 할 기회가 많다. “단역이든 뭐든 좋다. 신문이나 방송에서도 자꾸 장애인의 모습을 내보내야 한다. 그들의 장애가 특별하거나 괴상한 것이 아님을 거듭 보여주어야 한다”는 게 그의 말이다.

 1백여 중증 정박 장애인과 30여 교사·보육사가 생활하는 장봉재활원은, 외딴섬에 있다는 점 말고는 우리나라에 산재한 2백곳 가까운 여느 재활원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듯하다. 그러나 이곳을 다른 곳보다 ‘튀게’만드는 요소는 외형에 있지 않고 사람들이 ‘장봉공화국’이라고 부르는 그 내용에 있다.

 장봉재활원의 건물 8개 가운데 7개는 재활원 직원과 몇몇 자원봉사자들 손으로 지은 것이다. 특히 직업생환관과 복지관을 지을 때는 여기에 들어간 별독 40여만 장을 직접 찍어서 대느라 6~7개월 동안 직원 모두가 ‘죽을’ 고생을 했다. 장봉의 직원들이 보여준 그 억척스러움은 재활원에 대한 깊고 큰 애정의 다른 모습일 뿐이다. 특히 교사와 달리 24시간 장애인들과 동고동락하면서도 30만원 안팎의 보수밖에 받지 못하는 보육사의 생활은 ‘봉사’와 ‘희생’ 그 자체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임원장의 말은 다르다. “나를 희생해 장애인들에게 봉사한다는 의식으로 이곳에 오는 사람들은 오래 버티지 못한다. ‘희생’이나 ‘봉사’라는 인식이 잘못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일은 직업이 아닌 생활이다.”

 

값싼 동정 아닌 참사랑으로 화답해야

 이명옥씨(25)는 91년 8월 장봉재활원에 온 최고참 보육사이다. 모두 수녀인 두 언니의 ‘화려한’ 선례 덕택에 “수녀만 안되겠다면 무엇이든 네 마음대로 해도 좋다”는 부모의 허락을 쉽사리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냥 이 일이 좋고,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는 게 편하다”는 그의 말은 이곳에서 일하는 다른 보육사들의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누구나 ‘그냥 이 일이 좋아서’ 할 뿐이다.

 81년 유엔이 ‘완전한 참여와 평등’을 기치로 내세우며 지정한 장애인의 달 4월이 갔다. 12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장애인은 여전히 이방인으로, 온정과 도움의 손길을 받아야 하는 ‘구빈적 존재’로 자리매김돼 왔다. 유엔이 전국민의 10% 정도를 장애인으로 추정하는데 견주어 우리나라 공식 통계에 잡힌 장애인 수는 2.3%(약 91만명)밖에 안된다. 가족 중에 장애인이 있다는 사실을 숨길 수밖에 없는 사회 현실을 감안하면 이것은 지나치게 과소평가된 수치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엄마 아빠가 낳아서 버린

 아이들입니다.

 엄마가 낳은 아이들을

 왜 버렸을까요

 왜 버렸을까요?

〈섬에서 온 편지〉에 실린 한 원생의 이같은 글은 어쩌면 이 땅에서 버림받은 모든 장애인의 내면 풍경을 드러낸 것인지도 모른다.

〈섬에서 온 편지〉는 장애인들이 누구보다도 맑고 순수한 마음씨를 가졌으며, 다 함께 평등하게 사는 환한 세상을 열망한다는 사실을 꾸준히 알리고 있다. 이제는 이 사회가 〈섬에서 온 편지〉에 화답할 차례이다. 이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당연하게도’ 값싼 동정이 아닌 참사랑이다(문의전화 (032) 886-8051 ~ 2,78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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