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럽에 사회당의 해는 지는가
  • 파리ㆍ양영란 통신원 ()
  • 승인 2006.05.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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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서 위기, 비전 결여로 각국 동병상련… 민심 되찾기 안감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4년. 그간 동유럽에서는 사회주의라는 말이 금기가 되어버렸고 예전의 공산주의자들은 사회민주주의자로 재빨리 간판을 바꾸어 달았다. 동유럽 사회주의의 와해는 서유럽의 정치 판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3월 총선에서 참패한 프랑스 사회당을 비롯해 서유럽 국가들의 사회당은 최근 몇년간 심한 몸살을 앓고 있다. 나라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서유럽 사회당은 집권당이건 야당이건 도덕성 결핍과 정체성 위기, 이데올로기의 공백을 메울 만한 새로운 비전 결여 등으로 동병상련하고 있다.

 

프랑스 이어 이탈리아 역시 ‘풍전등화’

 집권 11년째에 접어든 스페인의 사회당은 부패ㆍ경기 침체ㆍ장기 집권으로 인한 권력 피폐 현상에 시달리고 있다. 스페인에서 사회당의 인기가 떨어지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7월부터이다. 집권 10년 사이 노동자당에서 부르주아당으로 변신했다는 비난을 받을 정도로 당 지도급 인사들의 갖가지 금융추문이 끊임없이 터진 것도 신임도를 떨어뜨린 주요인 중의 하나이다. 요즘음 사회당은 82년 권력을 장악한 이래 처음으로 지지율에서 야당인 인민당과 비슷한 수준에 이르렀다. 이대로 간다면 올 가을 총선에서 야당이 승리할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스페인 사회당 당수이며 총리직을 겸하고 있는 펠리페 곤잘레스가 이같은 사태를 분석하는 시각은 다르다. 그는 “사회주의의 주기가 끝난 것은 아니다. 서유럽 특히 중도우파가 없는 스페인이 필요로 하는 것은 사회민주주의와 기독민주주의의 기류이다”라고 주장하면서, 사회당으로부터 등을 돌리는 유권자를 재규합하는 데 부심하고 잇다. 이에 맞서 야당측은 프랑스에 밀어닥친 우파의 해일을 본보기로 들어 “사회당의 재집권은 시대착오적이다”라고 반박한다.

 그러나 지금의 선거제도에서라면 스페인 사회당은 다음 총선에서 재집권하기에 충분할 만큼 의석을 확보할 수 있으리라 전망된다. 카리스마를 갖춘 지도자가 없다는 점이 프랑스 사회당 내분을 가속화시킨 것과 달리, 곤잘레스의 지도력은 아직 온전하기 때문에 스페인 사회당의 앞날을 프랑스 상황과 섣불리 비교하기는 어렵다.

 이탈리아 사회당은 서유럽 다른 어느 국가에서보다 더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 부패정치인 구속 사태로 인한 정국 혼란은 마침내 국민투표가 실시되고, 사회당 당수인 아마토 총리가 사임한 뒤 새 정부가 구성됨으로써 돌파구를 찾는 듯했다. 그러나 참피 신임 총리의 내각에 참여키로 했던 각료 4명이 사퇴하여 다시 위기를 맞고 있다. 장관직을 사퇴한 4명은 바로 개혁 의지를 직접적으로 반영하는 새 얼굴이기에 사태의 심각성은 더욱 크다. 이중 3명은 91년 사회민주당이라고 이름을 바꾼 공산당 출신이다. 47년 이후 한번도 연합 내각에 참여한 적이 없는 이탈리아 공산당은 집권 사회당과는 달리 청렴하다는 이미지를 지키고 있는 정당이다. 이들이 사표를 낸 까닭은 전임 이탈리아 사회당 당수이며 현재 각종 부패사건 때문에 조사를 받고 있는 베티노 크락시에 대해 면책특권을 인정한다는 국회의 표결에 반발한 것이다. 사회민주당의 도덕성을 등에 업고 떨어진 인기를 만회해 보고자 하는 사회당으로서는 또 다시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탈리아 사회당의 앞날은 풍전등화와 비슷하다.

 82년 헬무트 콜 총리에게 정권을 넘겨준 이래 줄곧 야당에 머물러 있는 독일 사회민주당(사민당)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그동안 사민당은 독일 사회민주주의의 전설적인 지도자 빌리 브란트의 ‘손자’라는 별명이 붙은 새 세대 지도자들을 배출해 왔다. 오스카 라퐁텐느 같은 젊은 지도자를 주축으로 환경보호주의자들의 정책까지 폭넓게 포용한 사민당이 서독의 막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전세계에 독일의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원대한 비전을 제시한 것도 같은 무렵이다.

 

스칸디나비아서도 예전만 못해

 그러나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그 이후의 통일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한 탓으로 90년 총선에서 어처구니없이 또 패배했다. 설상가상으로 콜 수상의 인기를 앞지르던 젊은 미남 당수 엥홀름마저 최근 발생한 독일판 워터게이트 사건에 휘말려 재집권 도전에 어려움을 겪게 됐다. 독일 국민이 사민당을 지지하는 데 주저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사민당 내에서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를 고수하는 데만 집착하는 구세대와 89년 대전화기 이후의 현실 해석에 중점을 두는 신세대 사이의 단절은 정체 위기를 몰고 왔다. 이 위기는 실용주의 노선을 택함으로써 부분적으로나마 해결되었으나 그 실용주의라는 것도 결국 콜 총리가 줄곧 추구해온 정책과 전혀 다르지 않다. 따라서 사민당은 여당이 되기에는 역부족이고, 또한 야당 역할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이미지를 국민에게 심어줄 소지를 안고 있었다. 프랑스 사회당이 패배한 이후 독일 사민당은 이제 미국 클린턴 행정부의 정책에서 새로운 모델을 찾고자 부심하고 있다.

 유럽 국가 중에서 스칸디나비아 반도는 아직도 사회당의 막강한 영향권 안에 놓여 있는 예외 지역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2차대전 이후 25년 동안 줄곧 집권당의 영예를 누려 왔던 과거와 달리 사회당의 입김은 점점 약해지고 있다. 32~76년 여당 자리를 지켰던 스웨덴 사회당은 현재 야당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핀란드 사회당도 마찬가지이다. 덴마크 사회당은 10년 간의 야당 생활을 청산하고 재집권에 성공했으나 중도파와 연합정권을 수립한 상태이며, 노르웨이 사회당 역시 우파 군소 정당과의 연합 내각을 구성하고 있다. 사회당이라고는 하나 이들 스칸디나비아 국가 사회당은 일찍부터 기업의 국영화에 반대해 왔으며, 기업에 대한 징세에 관대한 실용주의적 정책을 시행해왔다. 그러나 전세계적인 경기 침체로 기업의 이윤이 감소하고 실업자가 크게 늘어나자 스칸디나비아의 상징처럼 되어버린 사회보장제도 운영은 점점 어려워지고, 중과세에 불만을 품은 유권자들이 점차로 80년대 레이거노믹스식의 신자유주의ㆍ신개인주의로 기우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특히 젊은 세대일수록 ‘요람에서 무덤까지’ 국민들의 일상 생활을 지나칠 정도로 보호해 주던 종래의 복지국가 체제보다 국가가 최소한 기본적인 생활을 보장해주되 나머지는 개개인의 자율에 맡기는 체제를 갈망하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유럽공동체(EC) 가입 문제 또한 스칸디나비아 국가 사회당들의 단합을 위협하는 요소로 지적된다. 통합 유럽이라는 거대한 집단 속에 편입함으로써 ‘스칸디나비아식 사회민주주의 모델’에 종지부를 찍게 될까 봐 우려되기 때문이다.

 영국의 노동당은 집권 토리당(보수당)을 누르고 승리하리라던 예측을 뒤엎고 작년 선거에서 또 다시 고배를 마셔 연속 네차례의 패배 기록을 세웠다. 거듭되는 패배로 말미암아 당 쇄신을 부르짖는 각성의 목소리가 높아가는 가운데 새로 노동당 당수로 취임한 존 스미스는 당 개혁 방안을 놓고 갈팡질팡하고 있다. 18년 노동당 전당대회 때 채택한 당 규약 제4조를 삭제하는 문제를 놓고 당 내 갈등이 첨예화하고 잇기 때문이다. 문제의 조항은 생산 ㆍ분배ㆍ교환 및 관리 등 모든 체제가 노동자의 공동 소유여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어 ‘마르크스주의의 마지막 잔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당론은 이 조항을 삭제하고 대신 시장경제에 적응할 수 있는 현실적이며 현대 감각에 어울리는 사회민주주의를 지향해야 한다는 개혁파의 주장이 지배적이다. 그런데도 스미스 당수가 수구파를 잠재울 단안을 내리지 못하는 이면에는 아직도 전통을 고집하는 노동조합이라는 변수가 작용하고 있다. 더욱이 59년에 이미 문제 조항을 삭제하려다 실패한 경험도 있어, 노동당의 주요한 자금원인 노동조합의 심기를 건드리는 일에 신중하지 않을 수 없다.

 한편 당내 개혁이 순조롭게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다음 선거에서 노동당 단독으로 승리를 거둘 수 있다는 보장이 없는 한 연합 전선을 구성할 파트너를 구해야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가장 유력한 후보로 지목되는 우파인 자유민주당과 손을 잡을 경우 노동당내 골수 좌파세력의 반발을 피하기 어렵게 된다. ‘대폭발’을 통해 거듭나느냐 정체 위기의 이 상태가 곪아터질 때까지 기다리느냐 하는 단안을 내리는 것이 영국 노동당의 급선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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