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속도 붙은 한국학 연구
  • 서지문 (고려대 교수ㆍ영문학) ()
  • 승인 2006.05.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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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회 유럽한국학대회 35개 논문 발표돼…“진지한 연구 자세 인상적”

 베를린 훔볼트 대학에서 열린 제16회 유럽한국학대회(AKSEㆍ4월16~20일)는 여러 모로 흐뭇하고 고무적인 ‘사건’이었다. 내가 한국학대회에 처음 참가한 것은 런던 대학에서 한국문학을 강의하던 지난 84년이었다. 한국에 대한 인식이 매우 낮고 좋지 않은 편이었으며 학문에 대한 수요도 미미했으나 희귀한 분야까지 파고들어 연구하는 유럽 학자들의 모습은 매우 감동적이었다. 특히 상당수 동유럽 학자들의 존재는 지극히 고무적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한국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은 외롭고 고달프지만 이들 사이의 유대감이 유난히도 돈독한데다 진지한 연구 자세는 경탄스러울 정도이다.

 첫날의 합동 발표회에는 20여개국에서 온 1백여 학자가 참여했으며 이후 나흘간 어문학ㆍ예술, 역사ㆍ사회학 두 분과로 나뉘어 진행된 학술회에는 총 35개의 논문이 발표되었다. 덴마크의 헨리크 소렌슨 박사의 〈고려조 후기 한국 라마이즘〉과 서울대 신용하 박사의 〈1884년 갑신정변과 개화당의 북청군대〉를 선두고 논문들이 발표되었다.

 비교종교학자인 소렌슨 박사는 라마교(밀교)가 원나라, 특히 원나라 궁정에서 성했기 때문에 고려 때 원나라 주둔군과 관리, 그리고 노국 공주가 시집와 살고 있던 왕실에서는 라마교가 상당히 성했다고 파악하고 있었다. 왕실과 달리 일반 국민들이 라마교 의식에 대한 지식이나 이해가 전혀 없었던 것을 보면 일반에는 전파되지 않았던 것이라고 단정했다.

 신용하 교수의 논문은 개화파가 1백50명의 일본 군인에 의지해 갑신정변을 일으켰다는 지금까지의 학설을 완전히 부정하는 새로운 것이었다. 즉 개화당의 지도자 박영효와 윤응렬이 그 전 해에 각기 5백명씩의 신식 군대를 훈련시켰으므로, 갑신정변에서 개화당이 의지한 것은 1백50명의 일본군이 아니라 근대식 훈련을 받은 1천여 한국 군이었다는 내용이었다.

 이번에 발표된 논문 중 가장 주목받는 것은 광복 이후 첫 일본인 한국 유학생었다는 후지야 가와시마 박사(미국 오하이오주 보울링 그린 주립대 교수)의 〈조선조 지방양반사회연구〉를 비롯한 두편의 한국 양반에 관한 논문이었다. 이 두편의 서로 상이한 관점에서 쓰여진 것이어서 토론의 열기가 대단했다. 16세기말~17세기초 안동 지역의 향안(鄕案)을 토대로 한 이 연구에서 가와시마 박사는 당시 양반들이 중앙 권력과 직접적인 연결 없이 지역 문화를 이루고 지방의 도덕적 엘리트로서의 위치를 확립했으며 양반 신분은 안정된 것이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상반된 견해에 정다운 토론

 그러나 백승종씨(튜빙켄대 한국학 강사)는 18세기~19세기 전라도 고현내(古懸內)양반 사회에 대한 연구 발표에서, 18세기 이후에는 조선 사회에 상당한 신분 이동이 있었고 하위계급 출신의 편입에 의해서 양반 인구가 증가했다고 발표했다. 연구 대상이 된 시대가 다르기는 했지만 이렇게 조선조 양반 사회에 대해 상반되는 견해를 발표한 두 학자는 이후 학회가 끝날 때까지 내내 진지하면서도 정다운 토론을 벌이는 모습을 보였다.

 필자는 둘쨋날에 〈작품 ‘魂불에 나타난 民俗과 俗信의 종적ㆍ횡적 민족결속제로서의 의미〉라는 제목으로 발표를 했다. 구성의 뼈대와 주 등장 인물을 소개하고 이 작품에 생생하게 재현된 전통적 의식ㆍ풍속ㆍ관습ㆍ통념ㆍ속신의 의미를 분석했다. 한국인의 민속과 민간신앙들이 전통 사회의 한국인들에게 시간적ㆍ공간적 정체성과 생활의 구조와 질서를 부여했으며 대부분의 속신과 통념 들은 한국인들이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고 의지하며 살려는 욕망을 반영한다는 것, 그리고 이렇게 수백년을 두고 모든 계층이 공유했던 민속과 공예의 전통과 민간신앙은 종적ㆍ횡적으로 민족적 일체감을 형성해 엄격한 신분제도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민족으로서의 결속을 가능케 한 것이었다는 것이 주요 논지였다.

 작가의 강렬한 상상력과 기량을 보여주는 예로 인용하고 싶은 부분은 너무나 많았으나 제한된 시간 때문에 4권 후반부에서 춘복이가 흡월하는 한 장면의 그 숨막히는 위용의 묘사를 낭독해 주었는데 아주 감명깊다는 평을 들었다. 또 작품을 직접 읽고 싶다는 한국 문학 전공자가 많아 작품 구입과 우송 주문을 많이 받아 왔다.

 필자 뒤를 이어 폴란드의 오가레크 최 교수는 〈박완서 작품의 매력〉을 발표했다. 박완서에게는 생애의 다양하고 쓰라린 경험들이 작가로서의 자산이다. 박완서에게는 날카로운 문제 의식ㆍ비판적 시각과 함께 악인이나 범법자에게서도 나약함과 가련함을 발견하는 인간미가 있기 때문에 독자는 그녀의 작품에서 한국적 현실에 대한 심도 있는 이해를 얻게 된다고 평가했다.

 같은 날 서울대 김윤식 교수는 〈정지용의 海崍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김윤식 교수는 몇년 전부터 해마다 유럽한국학회에 참가하는데, 학술진흥재단이나 국제문화재단의 지원을 받지 못할 때는 자비로 참가해 왔다고 한다. 김교수는 이것이 자신의 한국유럽학회에 대한 자그마한 성원이라고 말했다.

 나흘째 되는 날 〈불교 聖書에 있어서의 전설의 역할〉에 대해 발표한 박영숙 박사(미술사)는 유럽에 영주하면서 한국학을 연구하고 강의하는, 몇 안되는 한국인 학자 가운데 한사람이다. 런던 대학 박영숙 교수나 헬싱키 대학 고송무 교수, 파리 대학 이 옥 교수는 유럽 학자들과 협력하여 유럽의 한국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 한국과의 유대감을 강화시켜 주는 교량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고 있다.

 

북한은 올해 불참

 발표된 논물들은 대개 수준 높고 흥미로운 것들이었다. 그 가운데에서도 내게 특히 인상적인 것은 소련 상트 페테르스부르크 학술원 대학원생 니나 자슬라브스카야의 〈혜초의 왕오천축국전과 러시아정교회 다니일 주교의 기행문 비교연구〉이다. 《왕오천축국전》을 소련어로 번역하기까지 했다는 이 젊은 여성은 《왕오천축국전》의 구조와 목적과 문학적 요소를 다니일 주교의 팔레스타인 성지순례 기행문과 비교했는데, 동ㆍ서양의 순례기행 문학에 대한 광범위한 지식을 지니고 있는 것 같았다. 이런 젊은 학자들이 한국학을 공부한다는 사실이 마음 든든하게 느껴졌다.

 한국학술진흥재단은 유럽내에서 참가하는 논문 발표자에 한하여 여비를 지원하고 있으나, 숙식비를 비롯하여 그밖의 경비는 모두 참가자 자비로 충당한다. 토론자나 기자단에 대해 아무런 지원이 없음은 물론이다. 지난 몇년 동안은 북한에서도 몇명씩 참가했는데 올해는 4명이 참가 신청만 해놓고 오지 않았다. 다음번 학회는 2년 후인 95년 체코의 프라하에서 열린다. 그때까지는 남북 관계가 개선되어 북한측도 다시 참가하게 되기를 바란다.

 이번 학회 기간에 열린 총회에서는 임원을 개선했다. 다음 회장에는 한국의 민속음악을 전공하는 영국 덜함 대학의 로버트 프로바인 교수가, 부회장에는 네덜란드 라이든 대학의 왈라벤 교수가 추대되었다.

 84년도에는 유럽에서 한국학이 고전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서인지 참가한 학자들에게 일말의 애수를 느낄 정도였다. 그러나 그 사이 한국학 연구의 조건도 얼마간 호전되었고, 한국학 과목이나 과정을 개설하는 대학이 늘어나고 있어서인지 그때보다는 활기가 있어 보였다. 이들이 좀더 깊이 연구하고 국내 학자들과도 활발히 의견을 교환할 수 있도록 후원하는 기관과 기금이 늘어서 유럽에서의 한국학이 성큼성큼 발전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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