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충격과 한반도 통일전망
  • 베를린·김승웅 주간대리 ()
  • 승인 1989.12.03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동·서독사태 “勝者도 敗者도 없다”

統合논의 이르지만 分斷 한국에 시사하는 바 커
EC국가들은 ‘게르만 경제권’ 형성조짐에 불안

 지금의 東·西獨사태를 무슨 거창한 ‘사태’나 ‘사건’으로 파악한다면 이는 매우 서툰 시각이다. 동독 인구의 절반에게 서독 땅을 밟는 비자가 발급됐고, 이중 지난주말 현재 서독 땅을 직접 밟은 사람의 머릿수가 3백50만에 이른다는 것은 이미 유럽에서는 큰 뉴스가 되지 못한다.

 굳이 사람의 머릿수가 뉴스가 된다면 그것은 같은 분단의 아픔을 공유하고 있는 한국의 언론정도일 것이다. 콘크리트壁 사이로, 또는 철조망의 틈바구니로 뚜벅뚜벅 걸어나오는 동독 인파를 대할 때 한국기자들은 으레 기묘한 착각에 빠져버린다. 그들에게서 북한주민의 幻影을 보는 것이다.

 

一過性사건 아닌 ‘문제의 시작’으로 인식

 여기는 체크포인트 찰리. 기자는 지금 東·西獨사태의 현장에 서있다. 東·西베를린을 가르는 1백64㎞의 콘크리트 장벽이 갑자기 끊기면서 벌어진 50~60m의 틈바구니를 저쪽은 동독 경비대가, 이쪽은 美·英·佛연합군 경비원이 지키고 있는 검문초소 앞에 기자는 서있다. 미군이 관장하는 이 검문초소는 분단을 목격하러 베를린을 찾아오는 세계 관광객들에게 한국의 판문점같은 역할을 해온 곳이다. 베를린에는 이런 검문소가 22군데나 있다. ‘사건’발생 보름이 지난 탓일까. 西베를린쪽으로 넘어오는 인파도 눈에 띄게 줄어 있다. 이번이 두 번째 넘어오는 길이라고 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처음 왔을 때, 서독정부가 1인당 1백마르크(4만원 정도)씩 지급한 ‘환영금’을 다 쓰지 못한 채 돌아갔다가 남은 돈을 마저 쓰려고 다시 찾아오는 사람들이다.

 매스컴의 열기도 많이 식어, 奇談·奇緣을 찾기에만 열심이다. 베를린 장벽이 설치되기 직전에 西베를린 도서관에서 빌려간 두권의 책을 반납하기 위해 29년만에 찾아온 중년의 東베를린 주민이야기, 그가 도서관측에 물어야 할 대여료가 2백만원에 달하며 도서관측은 이를 전액 탕감해줬다는 미담 따위가 그것이다.

 東·西베를린 사태는 어느새 이처럼 머릿기사자리를 빼앗겼다. 다른 유럽 나라 언론뿐만 아니라 당사자인 서독 언론에서도 마찬가지다. 뉴스가 끊겼다는 말이 아니라 紙面의 안쪽으로 잠적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성싶다. 이 말은 표현을 바꾸면, 유럽 언론이 지금의 사태를 一過性의 뉴스로 보지 않고 하나의 흐름으로, 문제의 시작으로 파악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뜻한다.

 이번 사태의 주역은 과연 누구인가? 동독주민인가, 고르바초프인가? 동독의 정치·경제체제는 어느 선까지 개혁될 것인가? 동독은 독립된 주권국가로 남아있을 것인가, 아니면 서독과 통합의 길을 택할 것인가?

 소련이 동독의 체제변화를 어느 선까지 허용할 것인가?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와 바르샤바조약기구는 어떻게 변질될 것이며 유럽주둔 미국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리고 92년으로 예정돼 있는 EC(유럽공동체)의 통합은 과연 가능하며, 동독은 드디어 EC의 13번째 회원국이 되는 것인가?

 

독일 움직임 관련 외교각축 시작

 더욱 주목해야 할 사실은, 이러한 여론의 추적을 배경에 깔고 끌고 당기는 유럽특유의 외교각축전이 이미 점화됐다는 점이다. 東·西獨장벽의 제거로 초래될 90년대 또는 2000년대의 유럽청사진을 염두에 두고, 自國의 권익과 지위를 지키기 위한 대결과 흥정이 이미 시작된 것이다.

 유럽 언론의 관심은 온통 오는 12월 2~3일 지중해상 말타에서 열리는 美·蘇정상회담에 쏠려 있다. 흔히 “얄타의 붕괴, 말타의 新築”이라고 일컬어지는 이번 東·西獨사태를 놓고 제일 신경쓰는 쪽은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대통령이다. 부시와 고르바초프가 말타의 艦上에서 만나 이번 사태에 관해 과연 무슨 흥정을 나눌는지 미테랑으로서는 초미의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그라 고르바초프에게, 전화를 통해서 말타에 앞서 佛·蘇정상회담을 제의한 것도 美·蘇간 비밀흥정을 간파하기 위한 탐색전의 하나로 볼 수 있다.

 또 지난주말 엘리제宮에서 열린12개국 EC정상회담의 배경이나 의제만 봐도 미테랑의 불편한 심기를 읽을 수 있다. 당초 12월 초순으로 예정된 EC연례정상회담을 제쳐두고 별도로 소집된 이번 회의는 비록 프랑스가 금년도 의장국으로서 소집요구권이 있다고 하지만 東獨의 EC가입이라는 해묵은 안건을 공식의제로 채택했다는 점에서 여타 회원국, 특히 영국의 분통을 터뜨리게 했다.

 

‘독일 통합’에 주변국 못마땅

 이번 東·西獨사태에 관해 미테랑이 밝힌 “그렇게 빠를 줄은 몰랐다”는 반응은 프랑스 국민의 공통된 對獨觀을 그대로 반영한다. 統獨문제와 관련해서 미테랑이 지금까지 취해온 기본입장은 “독일 통일을 반대하지는 않는다”는 마지못한 찬성론이었다.

 1870년 普·佛전쟁때 비스마르크에게 당한 이후 1·2차 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 평균30~40년마다 한 차례씩 독일에 당해온 프랑스 입장에서는 이번 東·西獨장벽제거는 독일에 대한 해묵은 악몽을 일깨워주는 계기가 아닐 수 없다. 지금도 파리 교외의 東北쪽은 프랑스에서 개발이 가장 더딘 지역에 속한다. 독일쪽 국경을 향해 있기 때문이다.

 영국의 입장은 더욱 미묘하다. 허드外相은 지난주말의 EC정상회담을 줄곧 비난하고 있다. 지난 16일 “왜 하필 이 시점에서 동독문제가 정상회담의 의제가 돼야 하느냐”고 반문을 제기했다. 독일 통일에 관한 한 영국의 기본입장 역시 탐탁치 않다.

 그러나 그 시각이나 관심도에서 영국과 프랑스는 차이점을 드러내고 있다. 영국이 우려하는 것은 지금의 東·西獨사태나 앞으로의 단계적 발전에 대해서라기보다는 이 문제를 놓고 프랑스의 영향력이 점증하고 목소리가 높아져가는 사실에 대해서다.

 유럽 어느 국가도 이번 東·西獨장벽제거를 統獨차원으로까지 확대해석하지는 않고 있다. 가시적인 첫 단계로는 지금의 동독이 가까운 장래에 EC의 13번째 회원국이 될 수도 있다는 가정에 머무는 정도다.

 허드外相의 對佛불만은 EC회원국들 사이에서는 그 나름의 타당성을 지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92년의 EC통합 일정에 따르면, 오는 12월8~9일 이틀동안 슈트라스부르크에서 열리는 EC정상회담에서는 EC의 시장통합에 관한 구체방안으로 단일화폐의 통용문제를 거론하기로 돼있었다. 영국측의 불만은 이 회담이 앞당겨진 데 있다기보다, 수년 남짓 거론단계의 불과했던 동독의 EC가입 문제가 왜 파리에서의 정상회담에서 최우선 議題로 채택됐느냐 하는 데 있다.

 

동독의 EC가입, 유럽최대현안으로

 보다 긴박한 단일화폐 통용문제를 뒷전으로 미루자는 저의가 아니냐, 다시 말하면 ‘EC종주국’ 행세를 하려는 프랑스에 대한 강한 반발을 뜻한다고 불 수 있다. 프랑스의 처사를 “대단히 개탄할 만한 일”로 단죄한 허드外相은 下院 외교위 답변 직후 곧바로 베를린으로 달려가 겐셔 서독外相과 만나 동독의 EC가입에 관한 서독의 진의가 무엇인지를 직접 캐묻고 있다.

 동독의 EC가입은 이처럼 東·西獨장벽 제거 이후 유럽대륙의 최대현안이 되었다. 그 가입시기나 조건 등에 관해서는 어느 국가도 이렇다할 복안이나 저의를 드러내놓지는 않고 있으나 소위 ‘말타체제’가 구축되고 새로이 선뵐 유럽의 再編과 관련해서 제일 먼저 대두될 문제로 보는 것이 지배적인 관측이다.

 동독이 EC에 가입할 경우, 막강한 서독의 경제력을 등에 업고 새로운 中歐 세력권이 형성된다는 것이 첫번째 관심사항이 되고 있다. 지금까지는 통칭 東歐圈으로 소련의 경제권에 속해있던 이 지역이 EC에 가입함으로써 결과적으로 EC나 코메콘(동구경제상호원조회의)의 입김이 닿지 않는 제3의 경제권으로 비약·성장하리라는 조짐을 여타 EC국가들은 불안하게 읽고 있는 것이다.

 특히 92년의 EC통합으로 유럽 전역이 단일국가의 형태로 바뀌게 되면 東·西獨을 軸으로 한 게르만경제권이 이웃을 잠식, 새로운 中歐圈을 형성하는 것은 시간문제로 보고 있다.

 지금도 헝가리나 체코, 유고, 폴란드 등 東歐 어디를 가든지 독일어가 제2외국어로 행세하고 있다. 종주국인 러시아어보다 독일어가 더 우세하다.

 東獨의 EC가입이 이뤄질 경우 지금의 유럽은 게르만경제권을 포함해서 크게 三分될 것으로 보는 것이 유럽 언론의 진단이다. 다른 한 그룹이란 영국과 아일랜드가 축이 될 앵글로 색슨圈이다. 앵글로색슨圈은 또한 유럽권에 기존 영향력을 고집하는 또하나의 앵글로색슨국가, 즉 미국의 입장을 대변할 것으로 보인다.

 제3의 그룹은 프랑스를 맹주로 하는 지중해圈이다. 이탈리아, 그리스, 포르투갈, 스페인이 이 圈에 속한다. 베네룩스3國의 경우 독자적인 세력권을 형성한다기보다는 독일권과 프랑스권에 중복 포함될 것으로 관망되고 있다.

 프랑스의 고민은 이러한 三分圖式에 끼느냐, 아니면 다른 2개의 세력圈 가운데서 어느 쪽을 골라 제휴해야 하느냐는 데서 시작된다. 지난 주말의 EC 정상회담을 주재한 미테랑의 의중은 이런 점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것이 프랑스언론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브란트의 東方정책 ‘성공’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이 소련이다. 이번 東·西獨장벽 제거의 주역이 누구냐는 질문에 서독의 미카엘 호프만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1차적으로는 장벽을 넘는 동독주민들이고, 2차적으로는 고르바초프다.”

 東方정책의 기수인 빌리 브란트 前수상의 비서실장으로 東·西獨관계에 정통한 그는 “이번 사태로 빌리 브란트 前수상의 東方정책은 성공적으로 막을 내렸다. 이제 앞으로 남은 문제는 서독정부가 마련할 새로운 보완책이다”라고 설명한다.

 고르바초프의 이번 조치를 놓고 유럽의 신문들은 그가 ‘독일카드’를 사용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즉 나토軍과 바르샤바軍의 상호 감축을 위해 그가 東·西獨장벽을 제거하는 조치를 단행했다는 분석이다. 그렇다고 해서 고르바초프의 이번 조치가 동독의 포기를 뜻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고 있다. 오히려 그 반대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엉덩방아 찧은 미국

 지금의 東歐圈을 독일중심의 中歐圈이 대신 차지하고 들어설 경우, 그 막강한 경제력이 소련으로서 노리는 바라는 것이다. 고르바초프는 이와 관련해서, 현재 소련내에 산재하는 약2백만명의 부유한 게르만人을 위해 별도의 집단거주지역을 마련, 앞으로 들어설 中歐의 게르만圈과 경제적 접목을 시킬 요량도 가진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결코 동독의 포기가 아님을 입증하기 위해 소련의 이번 조치를 ‘줄다리기’에 비유하는 시각도 있다. 즉 유럽을 사이에 놓고 미국과 팽팽한 줄다리기를 벌여온 소련이 갑작스레 줄을 놓아버린 것이 이번 장벽 제거조치라는 것이다. 유럽과 미국이 엉덩방아를 찧는 혼란을 이용해서 줄을 더 앞으로 당길 수 있다는 논리이다. 더욱 바짝 끌려온 동독의 뒤꽁무니에는 ‘서독의 경제력’이라는 金貨까지 달려 있으리라는 낙관적인 계산이 깔려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 조치로 가장 충격을 받은 것은 서독이다. 동독주민들이 밀려오기 시작한 지 보름이 넘는 지금까지도 서독정부는 아직 이렇다할 대응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본 정부의 內獨部관리들이 내리는 진단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즉 내년 중순께 동독에서 총선이 치러질 것으로 보이며 동독의 EC가입은 적어도 5년 정도의 시간이 걸리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코앞에 닥친 문제가, 첫째 베를린의 상징인 브란덴부르크의 콘크리트 담벽을 헐어 그쪽을 통해 동독 이주민을 받아들이는 문제, 둘째 금년 크리스마스에는 브란덴부르크광장이 東·西獨주민들간 再會의 가장 큰 행사 장소가 될 것이라는 정도의 진단이 고작이다.

 

동독 先制에 콜 政權 오히려 不利

 가뜩이나 하락세를 기록하고 있는 콜 행정부의 인기에 비추어 이번 장벽제거에 대한 서독정부의 비전이 제시되지 못할 경우 내년말로 예정된 총선에서 콜 수상이 다시 집권하리라는 보장은 희박할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그가 사건 다음날인 지난10일, 브란트 前수상과 함께 베를린으로 달려가 브란덴부르크광장에서 행한 연설은 많은 서독시민들을 격분시켰다. 운집한 東·西베를린시민을 앞에두고 콜 수상은 이렇게 말했다.

 “지금 이 사태는 우리쪽 민주체제의 승리입니다. 공산체제의 패배입니다.” 그러자 관중들의 야유와 함성이 터졌다. 그러나 그 야유와 함성은 뒤이어 연단에 오른 브란트 前수상의 연설로 잠잠해졌다.

 “결코 체제의 승리가 아닙니다. 우리가 승리한 것도, 저쪽이 패배한 것도 아닙니다. 그런 발상 자체가 우리의 적입니다”

 서독의 원로다운 발언이다. 지금이야말로 브란트와 같은 비전이 가장 필요한 때인 것 같다. 독일에서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