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同病相憐”이 돼버린 역사의 아이러니
  • 이석열 주미특파원 ()
  • 승인 1989.12.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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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구권과 유럽변화에 대한 美ㆍ蘇의 대응

 엘베江과 보헤미아森林 동편에서 불고있는 개혁의 돌풍이 44년 동안 온존돼온 유럽의 ‘무장에 의한 평화’를 송두리째 뒤흔들고 있는 와중에서 미국과 소련은 절묘하게도 한가지 사실에 의기투합하고 있다.

 동구권 공산국가들에서의 잇따른 개혁열풍이 급기야는 베를린장벽의 개방을 가져왔고 이를 고비로 兩獨간의 人的교류가 이루어짐에 따라 필연적으로 대두되고 있는 독일통일 문제가 ‘태풍의 눈’이 된 마당에 워싱턴과 모스크바는 이 걷잡을 수 없는 사태가 더 이상의 어떤 혼란도 유발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에 의견일치를 보고 있는 것이다.

 

‘유럽’목소리 커지고 美ㆍ蘇영향력 퇴색

 바람을 일으킨 당사자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서기장이 “동구권의 개방ㆍ개혁정책은 평화적이고 안정을 해치지 않는 범위내에서 이뤄져야 하고 그것은 소련과 동구권의 기존 안보체제를 떠나서는 안된다”고 개혁의 한계를 분명히 한 것은 경제사정이 파탄지경에 이르고 소수민족들의 분리운동이 가속되고 있는 ‘內憂’에 바깥 사정까지 겹치는 ‘外患’을 피해야한다는 소련 나름의 절박한 사연이 바탕에 깔려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가 하면 패권주의로 ‘유럽무대의 主演’을 맡아 트루먼 대통령의 공산주의 봉쇄정책 이후 아이젠하워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케네디의 베를린방문과 자유수호결의 천명 등으로 유럽과 공동운명체가 돼버린 미국의 부시행정부는 ‘철의장막’이 내부로부터 붕괴되는 ‘팩스 유로파’에 의해 퇴색할 수밖에 없는 미국의 윗니에 대해 불안해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동구권의 변화에 따른 유럽의 개편을 놓고 유럽국가들의 목소리가 커진 대신 美ㆍ蘇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줄어들고 있는 형편에서 두나라 지도자들이 同病相憐이 돼버린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위성국가들을 휩쓸고 있는 변화의 바람을 조심스럽게 주시하고 있는 고르바초프는 어떤 상황에서도 각나라의 공산당이 권력 밖으로 밀려나지 말 것과 동맹대열에서 이탈해서는 안된다는 한계를 그어놓고 있지만, 이미 폴란드와 헝가리는 첫 번째 한계를 벗어났고 이어 동독과 체코슬로바키아가 그 뒤를 따르고 있다.

 이가타은 상황에서 크렘린 당국이 미국과 서방 진영을 향해 “자본주의를 수출하지 말라”고 경고한 것은 자칫하다가는 바르샤바조약기구가 와해될 수도 있다는 위기감 때문이라 볼 수 있다. 거듭된 크렘린당국의 경고에도 부시행정부가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은 채 차분히,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동구권의 변화를 지켜보고 있는 것은 매우 인상적이다. 아무튼 美ㆍ蘇 두 나라가 지금까지 진행돼온 정세변화에 손을 묶인 채 어쩔 수없이 이끌려 왔다는 것은 유럽역사에 새 章을 편 베를린장벽의 개방이 부시와 고르바초프의 생각을 떠나 이뤄졌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여실히 증명된다.

 이 역사적인 베를린장벽의 개방은 동구권의 개혁과 개방이라는 정치 및 경제적인 의미의 한계를 훨씬 벗어나 유럽전체 안보문제와 직결되는 ‘독일문제’를 표면으로 끌어내는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東獨이 장벽을 개방하여 1천8백만 동독인이 국경을 넘어 자유롭게 서독을 방문할 수 있게 되면서 東ㆍ西獨간에는 통일에 대한 열망이 조용히 분출되고 있다.

 베를린장벽은 독일을 둘로 갈라놓은 경계선이자, 동시에 유럽을 東ㆍ西로 분리, 대립시켜온 냉전의 상징물이었다. 따라서 베를린장벽의 개방은 냉전의 한 장치가 해체된 것을 뜻할 뿐 아니라 독일분단의 명분도 약화시켰다고 보는 것이다. 독일문제와 맛물려 유럽의 안보문제가 당면한 현안으로 대두되면서 美ㆍ蘇 두 나라는 ‘통일독일 이후’에 대비한 새로운 질서를 서둘러 모색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전통적으로 ‘강한 독일’에 대해 위협을 느껴오면서 살아온 영국과 프랑스같은 나라는 ‘하나의 독일’에 대비하여 미국이 주도적인 역할로 안보체제를 만들어 나가도록 촉구하는 판이다.

 최근 파리에서 열린 유럽공동체(EC) 정상회담의 분위기는 NATO를 그대로 유지해나가자는 회원국가들의 의견이 지배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외교전문가들은 리처드 체니 美국방장관이 내년도 국방예산에서 1백50억달러를 자진 삭감하고 이어 94년까지 1천8백억달러를 깎고 해외주둔병력을 대폭 줄일 계획이라고 밝힌 것은 미국이 군사력은 감축하지만 계속 유럽에 남아서 동맹관계를 유지할 뜻이 있음을 나타낸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것은 또한 소련과의 ‘협력적인 분위기’속에서 NATO국가들과 바르샤바조약기구 국가들이 안정된 힘의 균형을 이룰 수 있도록 이른바 ‘美ㆍ蘇협력하의 두 동맹체제에 의한 유럽’에 대한 포석이라고 분석하기도 한다.

 수년내에 유럽주둔 미군병력을 현재의 절반인 10만명선으로 줄이는 것을 골자로 한 체니 장관의 계획에는 주한미군도 현 병력의 절반으로 대폭 삭감된다는 내용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이러한 계획은 지금 비엔나에서 진행중인 유럽주둔군 감축협상에서 소련측에 이미 제시된 내용으로, 국무부 대변인의 말로는 “소련측에 제시된 미국측 안은 그 폭이 넓고 규모가 방대한 병력삭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유럽주둔군 감축협상은 군사력을 양진영이 합의한 테두리 안에 묶어두자는 것으로 그 정치적 의미는 매우 큰 것으로 평가된다. 양진영의 합의하에 이루어진 국제적 제어장치가 유럽의 세력균형을 유지해나갈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갖게한다. 양진영의 두 동맹체제는 지금까지는 군사력에 의한 ‘힘의 균형’을 목표로 한 것이었으나 군사력이 대폭 삭감된 새로운 동맹체제는 정치력에 의한 ‘힘의 조정’을 목표로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미국정부의 병력감축안(국방비삭감안)은 해마다 늘어나는 재정적자와 적자를 메우기 위해 꾸어 쓴 돈에 대한 이자지불이 연간 1천5백억달러나 되는 궁색한 형편에서 어쩔 수 없는 고육지책이기도 하지만 소련의 침략위협이 현저히 감소된 국제정세에 걸맞는 대응조치이기도 하다.

 

동맹체제내에서 동구개편 권고

 한편 유럽의 화합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NATO와 바르샤바조약기구가 해체되어야 한다고 주장해오던 크렘린당국은 이제는 적어도 향후 10년 동안은 양대 동맹체제가 존속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입장을 바꿔 말하고 있다. 소련은 무엇보다 유럽의 현 국경선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동맹체제는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바르샤바조약기구의 네 기둥이라 할 수 있는 폴란드, 헝가리, 동독 그리고 체코슬로바키아가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조만간에 이들 나라들이 블록에서 이탈하리라는 불안이 소련으로 하여금 미국과 협력하여 정치적으로나마 동맹체제를 유지해나가야 한다는 판단에 이르게 했는지도 모른다.


 예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 소련 외무장관은 바르샤바조약기구를 손질하여 계속 끌고나갈 방침임을 분명히 했다. 그는 최근 바르샤바에서 열린 동맹국 외무장관회담에서 각국이 동맹체제 안에서의 개편을 시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美ㆍ蘇가 동구권과 유럽의 변화에 대응한다는 것은 다음 몇가지 질문에 대한 구체적인 해답을 찾는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하고 있다. 즉 유럽주둔 병력을 얼마만큼 양진여에서 줄일 수 있는가. 서도에 핵병기를 계속 배치해야만 하는가.

 앞서 밝혔듯이 유럽주둔병력 감축은 비엔나회담에서 美ㆍ蘇 두 나라 사이에 상당한 진전을 보고 있는 것으로 그 성과를 기대해볼 만하다는 것이다. 서독내 핵무기 계속배치여부 문제는 서독측의 반대로 해결이 여의치 못한 실정인데 이와 관련, 반핵운동은 베를린 장벽 개방 이후 더욱 거세지는 형편이다.

 서독이 NATO를 탈퇴하여 중립국이 되는 것을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소련의 입장과는 달리 미국을 비롯한 서방측은 매우 곤혹스러운 입장이다. “독일사람이 원한다면 그들 뜻대로 하는 것”이라고 말은 하면서도 다들 불안해하는 눈치이다. 중립화가 된다 하더라도 독일의 군사력은 유럽에서 가장 막강한 것이 될 수 있으므로 모든 나라들이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다.

 한스 디트리히 겐셔 서독 외무장관의 워싱턴 방문에 이어 대처 영국총리가 황급히 추수감사절에 미국을 찾아와 캠프 데이비드에서 부시 대통령을 만나고 간 것은 독일 문제와 유럽의 집단 안보문제가 지중해상으 美ㆍ蘇정상회담의 초점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브루킹스연구소의 존 스타인브루너 외교연구원장은 “미국은 유럽의 한 부분이다. 유럽내의 모든 정치발전은 미국을 제쳐놓고서는 아무것도 되는 일리 없다. 방관자가 아닌 당사자의 입장에서 유럷문제를 다뤄야 한다” 주장하면서 말타정상회담은 미국이 맹방의 지도자로서의 단호한 의지를 보여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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