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적 · 민주적 사회주의를 위하여’
  • 편집국 ()
  • 승인 1989.12.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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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입수 - 고르바초프의 <프라우다> 기고 논문 <사회주의사상과 혁명적 페리스트로이카>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은 지난 11월26일 당기관지 <프라우다>에 사회주의의 새로운 진로를 제시하는 장문의 논문을 발표했다. <사회주의 사상과 혁명적 페레스트로이카>라는 제목의 이 논문은 인간 · 현실 · 효율을 중시하는 그의 페레스트로이카 철학을 현실 진단과 함께 담고 있어 소련의 오늘과 내일을 이해 · 조망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프라우다>지를 긴급 입수, 그 내용을 옮긴다.

페레스트로이카를 시작한 지 5년이 다 돼가고 있다. 1985년 4월에 시작된 이 혁명적 사회개조의 과정은 보다 폭넓은 규모로, 그리고 새롭게 깊이를 더해가면서 진행되고 있다. 페레스트로이카가 우리의 경제적 · 사회적 현실과 보다 밀접하게 연결됨에 따라 우리는 많은 것을 더 잘 꿰뚫어보기 시작했다.

만약 초기의 단계가 기본적으로 이러저러한 사회조직의 왜곡으로 인해 지난 수십년 동안 형성돼온, 전반적으로 정체된 사회체제의 향상땅위만을 다루는 것이었다면, 이제 우리는 경제적 토대로부터 증축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모든 사회적 건설의 획기적인 개축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저 말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소유관계, 경제적 메커니즘, 정치체제를 재편하는 한편 이 사회의 정신적 · 도덕적 기류를 변화시키기 위한 조치들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페레시트로이카를 실현시킬 분명하고도 세부적인 계획을 갖고 있지 않은 것처럼 우리를 헐뜯는다. 그러나 그러한 의문 제기에 결코 동의할 수 없다. 만약 다시금 준비된 틀을 사회에 덮어씌워 생활과 현실을 몰아붙인다면 그것은 이론적 오류를 범하는 것이 될 것이다. 바로 그것이 우리를 고통에 빠뜨렸던 스탈린주의의 특징이었다. 우리는 레닌식으로 행동하고 있다. 레닌식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오늘날의 현실로부터 어떻게 미래가 탄생하는가를 연구한다는 뜻이다. 이에 발맞춰 나름대로의 계획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어떤 대안이 있는가? 딱이 이것이다라고 할 만한 것은 없다. 오늘날 가장 분명하게 거론되는 두가지의 견해에 대해 언급할 수 있을 뿐이다. 하나는 행정명령 체계, 엄격한 계획체제, 경제에서는 물론 문화에서까지도 명령체제를 유지하자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과거의 방법이 10월혁명의 노선을 거의 완전히 외면해 버렸다는 주장에 기초하고 있는 것으로서 사회의 자본주의화를 제시하고 있다 . 과연 우리가 그러한 길로 갈 수 있을까? 아니다. 우리는 그것들을 거부하고 있다. 이에 대한 논쟁은 쓸모없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또 다른 길, 이 사회의 진보를 가져다 줄 다른 길이 있다.

오늘날 우리 앞에는 마르크스주의의 권위, 마르크스주의적 현실접근법이 있다. 페레스트로이카의 개념과 정책을 보다 깊이 있게 다룸에 있어, 또 발전하는 사회주의의 제문제를 이해함에 있어 우리에게는 마르크스주의적 방법론,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이데올로기의 하나인 마르크스주의의 세계관과 가치체계가 필수적이다.

 

사회주의 사상의 중심은 인간

사회주의는 자신을 보다 정확하게 인식해야 한다. 당초의 사상에 비추어서 말이다. 그리고 인류문명 발달의 현단계라는 맥락에서도 자신을 인식해야 한다. 사실 혁명 이래 70여년은 인류진보에 있어 신기원의 시작이랄 만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에는 역사적으로 보아 길지 않은 기간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페레스트로이카를 사회주의의 역사적 도정에서 하나의 단계로 간주하고 있다. 그 과정 속에서 권위주의적 · 관료주의적 체제는 폐기되고 진정으로 민주주의적이고 자율적인 사회구조의 형성이 이루어지고 잇는 것이다.

사회주의사상은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수세기에 걸쳐 혁명운동을 포함한 여러가지 사회운동을 뒷받침해왔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사회주의사상을 깊이 연구한 끝에 공상적 환상이나 하릴없는 설계로부터 그것을 떼어내 개화과정의 합법적 부산물로서, 아울러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역사적 창조의 산물로서 과학적 사회주의를 제시했다. 동시에 그들은 이를 조잡하고 획일적인 ‘볼품없는’ 공산주의와 구별지었다. 새로운 사회의 형성을 물질적 생산과 민주주의 그리고 개개인이 최상의 발전을 거두는 것에 관련지었던 것이다.

사회주의사상에 대한 그러한 해석은 매우 위대한 사회적 · 정신적 가치이다. 그 중심에는 인간이 놓여 있으며 수탈과 억압에서 해방된 사회에서의 인간의 물질적 · 지적 · 도덕적 발전이 있다. 지나간 세월 동안 우리는 그같은 마르크스의 사상을 외면했다거나 뛰어넘었다고는 보지 않는다.

마르크스주의의 창시자들은 새로운 사회발전의 구체적 태와 메커니즘을 고안하는 문제에는 한번도 손대지 않았다. 그들은 당대의 사회현실과 혁명적 노동운동의 실상에 기초하여 사회주의사상을 다루었던 것이다. 아울러 사회현실을 인식하고 개조함에 있어 미더운 기준이 될 만한 사회발전 방식의 일반론적 모델만을 제시했을 뿐이다. 마르크스주의의 창시자들과 그들에 의해 형성된 이론이 개인우상화 시기와 침체기의 왜곡, 이런저런 정치가들의 과실을 책임질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 이론이 이러한 사건들과 한세기 가량의 시차를 두고 있대서만이 아니라 본질적으로도 그렇기 때문이다.

이는 특히 널리 퍼진 몇몇 해석과 관련되어 있다. 이를테면 우리가 수십년 동안 품어왔던 상품생산에 대한 부정적 태도를 마르크스로부터 직접 나온 것이라고 여기고 있다. 그는 사적 소유에서 사회적 소유로 전환함으로써 가격법칙이 생산의 조절자로서의 능력을 상실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 마르크스는 상품생산의 극복을 사회적 소유뿐 아니라 생산력 발달의 최고수준과 관련지었다. 그 기저에는 과학과 기술의 발달이 깔려 있다. 게다가 지금껏 이 세계 어디에서도 도달하지 못한 수준의 발달이다. 그러한 수준의 생산력 발달은, 당연하게도 우리가 요즈음 처해 잇는 정도의 새로운 수준이 아니라 머나먼 미래에나 가능한 것이다.

이제 우리는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의 자기발전 가능성을 과소평가했다고 말할 수 있다. 자본주의는 과학과 기술혁명의 성과를 모아 자본주의에 활력을 부여하는 사회 · 경제구조를 형성할 수 있었다. 또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은 대다수 인민이 비교적 높은 수준의 복지를 누릴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러나 그게 곧 자분조의의 깊은 내적 모순을 없애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비록 마르크스가 과학 · 기술이 진보하고 과학이 직접 생산력과 사회의 힘으로 전환함에 있어서 거대한 발전 잠재력이 됨을 직시한 최초의 사람이었다 할지라도 그는 다가오는 과학 · 기술혁명이 자본주의 발달의 새로운 원천이 될 수 있으리라는 점을 예견하지는 못했다. 마르크스는 자신이 알고 있던 19세기 자본주의의 발전가능성만을 분석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는 대다수의 나라에서 두가지의 사회체제가 오랬동안 공존하리라는 것을 꿰뚫지 못했다. 그같은 공존체제는 자본주의로 하여금 사회 · 경제분야에서 사회주의적 경험의 상당한 요소들을 도입하게 했고 정치의 민주화를 부추겼다. 그리하여 총체적으로 자본주의는 보완적인 힘을 얻게 되고 시대의 요구에도 부응하게 되었다.

그밖에도 오늘날에는 과거에는 없었던 새로운 문제들이 날카롭게 나타났다. 자본주의적 소유의 성격이 심각하게 변화했다. 특히 요즈음에는 생산의 국제화나 자본주의 경제 전반의 국제화에 발맞추어 그 구조도 변화했다. 전지구적 문제들이 첨예화되어 이제 그 문제들을 도외시하고는 현대적 사회발전의 조류나 미래의 인류에 대한 현실성 있는 개념을 정립할 수 없을 정도이다.

 

스탈린이 사회주의 왜곡

한편 스탈린 시기의 왜곡은 마르크스-레닌의 사회주의 개념에 들어 있는 핵심적인 것이 유실되는 결과를 빚었다. 인간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을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조건으로 보는 이 사상 대신에 인간을 당과 국가라는 기계의 ‘나사’쯤으로 여기고 근로자들의 조직을 그 기계의 ‘구동벨트’쯤으로 여기는 견해가 대두되었다. 그 후로도 이 메커니즘은 대체로 유지되어 왔다. 더욱이 행정 · 관료주의 체제가 본질적으로 한층 큰 힘을 얻게 되어 사회에 지극히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이 기간을 통상 ‘침체기’라 부른다. 그러나 이는 이미 부적합한 명칭임이 분명하다. 사회주의 과업에 심각한 손실을 안겨준 ‘잠재력의 상실기’였던 것이다. 당시에는 과학과 기술의 급격한 향상이 지닌 의의를 과소평가하여, 비록 과학 · 기술혁명의 성과와 사회주의의 우월성을 결합해야 한다고 무척이나 떠들긴했지만, 그 방면에 이렇다할 조처를 취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일련의 중요한 분야와 방향에서 우리는 낡은 기술시대에 머물러 있게 되었다.

우리는 레닌의 유명한 명제 즉 독점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에는 아무런 중간적 ‘구조’도 없다는 것도 재검토해 보아야 한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경제적 경쟁에 대한 개념도 바뀌어야 한다. 결정적 의미를 지니는 것은 생산의 양적 증가나 1인당 생산품의 質이 아니라 자원의 절약 및 기술정보의 제공이다. 우리는 경제적 기준을 바꿔 이를 오늘의 경제현실에 맞게 적용해야 한다.

‘사회주의성’의 기준은 인간의 이익과 요구에 보다 많이 부합해야 한다. 물질적 복지의 함양분야에서는 “따라잡고 추월하자”는 대결적 구호가 아니라 세계적 경제발전 과정에 보다 유기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길을 따라야 한다. 만일 이 분야에서 다른 사람들과 대립하지 않고 그들과 더불어 자신의 경제문제를 해결코자 노력한다면 우리는 경제적으로 승리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보는 ‘사회주의성’의 본질과 내용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이며, 우리가 조심스럽게 보존하려는 가치는 어떤 것인가?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사회주의 사상, 그것은 무엇보다도 자유의 사상이다. 과학적 사회주의의 창시자들은 사회혁명의 주요 동인, 곧 노동계급의 해방을 일체의 억압과 수탈로부터의 인간해방과 불가분의 것으로 연관지었다. 바로 여기에 사회주의적 자유의 개념이 공동체론이나 집단주의론에 유기적으로 결합되어야 하는 이유가 있다. 그러나 개인을 무시하는 집단주의가 아니라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진정한 집단주의라 불렀던, 즉 개개인이 각자의 연합체 속에서 자유를 구가하는 집단주의라야 한다.

유감스럽게도 사회주의사상의 바로 이 경계가 가장 심하게 뒤틀렸다. 곡해된 집단주의의 이름으로 인간적 개성이 무시되었으며 개인의 발전이 방해받았다. 개인에 대한 사회의 우위라는 명분으로 합리적인 자유의 영역이 급격히 축소되었으며 사회주의 사회 건설의 인도주의적 본질이 메말라버렸다. 바꿔 말하면 중핵적인 것, 즉 인간 자체, 인간의 요구, 인간의 이익, 인간의 생동감 있는 삶이 사회주의 이상으로부터 떨어져나가버렸다.

사회주의의 가장 중요하나 원칙인 생산의 공유화도 유치하게 곡해되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공식과 선언에 의해, 그리고 독재와 행정지도에 의존한 展示的 복지에 의해 빚어졌다. 이제 우리는 긍정적인 경험과 부정적인 경험을 함께 고려하면서 사회적 소유를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야 한다. 무엇보다도, 공유화를 국유화와 혼동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레닌도 이에 대해 경고했지만 나중에 무시되어버렸다.

우리는 공유화론 자체 그리고 사회적 소유의 장점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사회적 소유는 사회주의 이상의 유기적 구성요소이다. ‘통일된 노동’도 ‘해방된 노동’도 언제나처럼 사회주의의 중요한 특성으로 남아있다. 동시에 우리는 형식적 공유화를 거부하며, 나름의 잠재력을 고갈시키지 않고 사회주의 경제를 효율 · 향상의 길로 인도하는 소유형태의 다양성을 주장한다. 사회주의 이상의 강점은 효율성과 노동생산성의 문제들이 인도주의 및 사회정의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잇ㅆ다는 데에 있다. 바로 여기에 사회주의사상의 무게중심과 특성이 있다. 또한 여기에 사회주의체제의 약점이 아닌 강점이 있다.

 

사회주의 특징은 인민권력의 확립

사회주의의 핵심적 특징은 진정한 인민권력의 확립이다. 누구도 감히 이를 부인하지 못했다. 대중으로 하여금 지배하게 한다는 것은 언제나 사회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간주되었다. 레닌에 따르면 사회민주주의의 발전은, 문화가 진보하고 대중의 의식수준이 높아감에 따라 ‘근로자를 위한’ 민주주의에서 ‘근로자 자신들에 의한’ 민주주의로 변화하는 가운데 이루어져야 한다. 50~60년대의 전환기에 발표된 ‘전인민에 의한 사회주의 국가’는 그 시기를 가리키는 이정표의 구실을 해야 했다. 유감스럽게도 몇십년간에 걸친 이론적 혁신은 정치적 메커니즘의 변화를 수반하지 못했다. 따라서 소유관계와 마찬가지로 사회민주주의도 추상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 인민의 자율관리와 법치적 국가를 보장해야 한다는 기본원칙과의 통일성 속에서 보아야 한다. 이러한 원칙을 실행한다는 것은 우리의 정치체제의 민주적 발전은 물론 사회주의적 발전까지 보장해준다.

사회주의는 민주적 · 인간적 이상과 가치의 운반자요 보호자이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강조되고 있는 인간적 가치의 우위라는 조건에서 계급적 접근의 본질은 무엇인가에 관한 물음은 특별히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프롤레타리아운동 초기부터 마르크스는 “노동계급의 해방투쟁은 계급적 특권과 독점을 위한 투쟁이 아니라 평등한 권리와 의무, 일체의 계급적 지배의 척결을 위한 투쟁을 의미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러나 아울러 우리는 현실생활, 사회의 현상, 사회의 원동력과 모순에 대한 진정한 계급적 분석을 회피해서는 안된다. 우리 사회의 제계급 및 제그룹의 이익과 요구를 면밀하게 고려함으로써만이 우리는 사회주의의 왜곡을 극복하고 사회주의를 질적으로 새로운 단계로 이끌어야 할 페레스트로이카 과정에서 현실성 있는 정책을 수립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처음에 제기한 기본적 물음에 다가가고 있다. 즉,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사회의 새로운 質, 사회주의의 새로운 모습이라는 개념에 어떠한 사상을 포함시켜야 하는가?

마르크스는 언젠가 공산주의는 이상이 아니고 기존의 ‘상태’를 없애나가는 사회의 현실적 ‘운동’이라고 쓴 적이 있다. 그러나 이 사상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노력은 미래의 이상형 ‘모델’을 그리는 데에 집중되어 왔다. 그래서 사회에서 일어나는 변화들은 간과했다. 그러나 생활은 객관적으로 형성되는 조건에 따라 전혀 다른 길을 걸어왔다. 준비된 구도에 따라 생활을 이끌려는 열망은 교조주의, 이념적 잔인성, 폐쇄성, 자기기만, 인간과 역사에 대한 억압을 초래했다.

인민은 기다림에 지쳤다. 그들이 무조건 믿도록 하려는 터무니없는 호소와 약속이 너무나 많았다. 인간의 이익에 대해서도 많은 말을 뇌까렸지만 물질적으로나 현실적으로 뒷받침 된 적은 드물었다. 그리하여 우리나라는 강대국이 되었으면서도 개화된 국가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인민대중을 위한 생활여건을 조성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사회주의의 새로운 모습에 관한 물음은 오늘의 사람들이 근본적인 요구와 이익을 어떻게 생각하고 표출해야 하느냐에 의해 규정된다. 이러한 바탕 위에서 오늘의 현실에 부합하면서도 장기적인 전망을 겨냥하는 목표와 계획을 설정할 수 있다. 사회주의의 새로운 모습, 그것은 마르크스의 사상에 완전히 합치되는 인간화된 모습이다. 이를 위한 미래의 사회는 현실적이며 실행가능한 인도주의이다. 그것을 인식하는 것이 페레스트로이카의 주된 목표인 만큼 우리가 인도적인 사회주의를 건설하고 있노라고 말하는 것은 온당하다.

이 개념은 그저 외치기만 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는 물론 아니다. 모든 사회체제의 쇄신에 인간의 얼굴을 부여하는 사회적 · 경제적 · 정치적 구조를 창조하여 사회주의를 실질적으로 혁신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들 구조는 수단이 되어야 한다. 어디까지나 목적은 인간의 것이다. 사회구조의 인간화는 인간애나 도덕적 명제의 요구에만 부응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제 우리사회의 발전을 위해 경제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필수적인 것이 되고 있는 것이다.

페레스트로이카는 모든 국가적 · 사회적 일에 인간을 책임있는 활동주체로 포함시켜야만 인간의 소외감, 公益과 私益의 괴리를 극복할 수 있으며 사회생활의 모든 분야에서 개인의 적극성을 제고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다른 한편으로 사회구조의 인간화는 인간에 대한 투자를 높임으로써만 이루어질 수 있다. 우리는 인간 자체가 보다 발전되고 보다 경쟁력을 가지며 노동에서 보다 양심적이 되어야만 사회도 그만큼 더 집중적으로 발전한다는 것을 철처하게 인식해야 한다. 그러므로 인간에 대한 투자는 가장 채산성 있는 투자인 것이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교육, 보건, 기타 서비스분야에 우리나라보다 훨씬 많은 예상을 할당하는 선진국에 뒤져왔다. 그래서 근본적인 변화가 필수적이다. 이 분야에는 ‘잔여예산’을 투입한다는 원칙을 말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줘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사회주의의 최고의 가치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이상과 현실의 변증법적 통합 추구

경제분야에서 사회주의에 대한 우리의 시각의 변화는, 현대적 생산력의 진보와 노동생산성의 향상을 위해 사회주의적 소유의 다양한 발달, 그리고 이를 실현할 수 있도록 새로운 경제적 메커니즘의 창조가 필요하다는 것으로 귀결된다. 그 새로운 메커니즘은 사람들의 노동활동을 효과적으로 조직하고 거기에 활력을 불어넣어야 한다.

이러한 혁신과정에서 우리는 집중제와 대규모 계획제의 사회적 장점을 포기할 것까지는 없다. 다만 우리는 민주적인 것을 위해 관려주의적 집중제를 포기하는 것이며 나아가 실질적이고 현실적인 것을 위해 형식적인 집중제를 포기하는 것이다. 행정부처가 모든 것을 독식하는 만능집중제는 이제 바람직한 관리 메커니즘에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

혁신의 과정에서는, 의심할 바 없이, 경제의 획기적인 구조개편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첫째로는 방위산업체의 업종변경에 의해 일어나는데 이 길은 국제적인 안전보장, 군축, 非核평화로의 전환이 강화됨에 따라 열리게 된다. 둘째로는 총생산량에서 생필품이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히 커짐에 따라 일어난다.

구조개편이 갖는 또하나의 중요한 측면이 있는데 여기서 우리의 과제는 모든 인류가 추구하는 것과 동일해진다. 20세기 후반에 들어, 엄청난 천연자원을 고갈시키고 갈수록 더 많은 원자재와 연료를 요구하는 기존산업화 모델의 전도가 불투명하다는 점이 명백해졌다. 그러한 낭비적 경제구조는 세계의 일정지역에서 일정기간 동안만 발전될 수 있었다. 장기적으로 그리고 전인류적으로 보아 이는 쓸모없는 것이다. 그저 자연의 힘만 축낼 따름이다.

유감스럽게도 사회주의는 구조개편의 선두자리를 차지하지 못했다. 자본주의 세계가 70년대에 발생한 에너지 위기와 관련된 사회적 충격을 경험했다는 점에 기쁜 나머지, 우리는 그곳에서는 그 충격 후에 고도의 기술과 에너지 및 원자재의 절약에 입각한 활발한 구조개편이 뒤따랐다는 점을 너무나도 늦게야 깨달았다. 이제와서 우리는 게으르고 자만했던 것에 대한 대가를 치르고 있다.

만일 페레스트로이카가 경제적으로 승리한다면, 다시 말해 경제적 안정, 노동생산성의 향상, 과학 · 기술 진보속도의 가속화가 보장된다면, 페레스트로이카는 승리할 것이다. 이러한 특징들에 의해 사회주의 경제의 새로운 모습도 규정된다.

정치적인 면에서의 사회주의 혁신은 시민사회와 법치국가의 메커니즘을 참고함으로써 진정한 인민권력을 보장하는 것이다. 보통 우리는 심지어 ‘민주적 사회주의’라는 용어 자체에 대해서도, 이를 기회주의적 수정주의 노선의 표현과 동일시하면서, 부정적인 태도를 가져왔다. 이제 우리는 국가체제뿐만이 아닌 모든 사회생활의 민주화에 대해, 그리고 대중의 사회적 적극성과 자발성을 향상시키는 강력한 자극제가 되며 아울러 이를 표출할 수 있는 조건을 형성시켜주는 민주화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이른바 법치국가론도 민주주의의 발전과 유기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이는 법의 최고성, 높은 책임의식과 규율에 바탕한 개인의 광범위한 사회적, 정치적 권리와 자유의 설정, 효과적으로 기능하는 관리메커니즘의 창조를 의미한다.

민주주의와 자유, 그것은 우리가 사회주의의 알맹이로 삼고 있는 인간문명의 위대한 가치이다. 우리는 실질적 민주주의에 찬성한다. 그러나 그걸 바탕으로 민주주의의 형식적 원칙들을 파기하는 것에 반대한다. 우리의 경험은 모든 합법적 원칙들을 엄격하게 준수하는 것이 사회생활에서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인도적 사회주의뿐만이 아니라 민주적 사회주의를 건설하고 있다고 실로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국가나 기타 정치제도 발달에서의 주도적 경향은 인민에 의한 사회주의적 자율관리의 이상과 현실을 변증법적으로 통합하는 것이다. 이는 직접민주주의의 잠재력을 활용하고 시민들이 직접적 의사표출의 다양한 창구를 통하여 사회의 모든 일에 대한 관리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또 행정부와 입법부의 확실한 분립과 사법부의 독립성을 보장해주는 다년간의 경험에 의해 실험된 의회대표제 민주주의의 메커니즘을 갖는다. 인민에 의한 사회주의적 자율관리는 국가조직과 사회조직 그리고 시민사회의 여러 제도들간의 ‘영향권’을 합리적으로 구분해주며, 아울러 소비에트체제 내부의 자율관리적 기초를 싹트게 해준다. 이 소비에트체제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바로 이민대표회의(소비에트)제이다.

페레스트로이카는 당에 ‘두얼굴의 과제’를 부과했다. 한편으로는 정치체제의 근본적 민주화, 시민사회의 구조화, 독립채산제로의 전환, 국민경제를 관리함에 있어 경제외적이 아닌 경제적 접근법의 도입이라는 조건에서 나름의 위치를 설정해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당내의 페레스트로이카를 완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새롭고 복잡한 문제이다. 대중의 자발성을 고양하고 1당체제의 범주내에서 제반 사회생활의 민주화를 도모한다는 것은 숭고하기는 하되 어려운 당의 사명이다. 또 그것은 많은 것을 규정하게 될 것이다.

 

당내 페레스트로이카 가속화 돼야

오늘날 당은 지도적 관리기능으로부터 벗어나 정치적 · 이념적 기반을 고안하는 중심으로 변모하고 있다. 당의 임무는 발생하고 있는 제과정을 심사숙고 하여 정책을 입안 · 제시하며,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원칙과 가치에 입각한 이론적 작업을 확대시키고 우리의 현실과 세계의 경험을 분석함으로써 예측활동을 수행하는 것이다. 소련 공산당은 당조직과 강원들을 통하여 기능하면서 다각적인 모습으로 발생하고 있는 제과정에 영향을 주고 있다. 또 당의 임무는 레닌이 주창한 과제의 해결 즉 지배기구의 관료주의화에 맞선 투쟁을 선도하고 나아가 이 투쟁을 페레스트로이카의 모든 단계에서도 전개하는 것이다.

그러한 기능변화는 정치체제 속에서 인민의 이념적 · 정치적 · 도덕적 전위로서의 당의 위치를 설정해준다. 당은 이제 국가조직이나 사회조직에 대한 ‘지시하달’을 맡는 게 아니라 독립성을 유지하면서 헌법과 기타 법률의 범주내에서 활동해야 한다. 오늘날의 복잡한 상황에서 페레스트로이카의 지난한 과제를 해결하는 데에 사회의 모든 힘을 모아야 하기에 1당체제 유지의 합목적성이 요구되고 있다 그럼에도 당은 다원주의의 발달, 사회여론의 경쟁, 민주주의와 인민을 위한 글라스노스트(정보공개)의 확대에 기여할 것이다. 사회주의의 혁신을 위한 투쟁에서 당은 그 어떤 대중선동 그 어떤 민족주의적 혹은 국수주의적 사조, 그 어떤 지각없는 집단이익에도 주도권을 양보할 수 없다.

당 역시 페레스트로이카의 길에 들어섰다. 그 내부구조, 업무스타일과 방법론이 변화하고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아직 당의 페레스트로이카는 사회 전반의 페레스트로이카보다 더디게 진행되고 있어서 당의 전위적 역할 수행에서 심각한 난관을 조성하고 있다. 자율관리의 새로운 형식과 절차가 강구되고 집단주의와 우호주의의 원칙이 발전되며 의식적 기강에 입각한 조직원의 권리가 실현되는 명실상부한 민주화의 본보기가 되기 위해 당은 획기적인 혁신의 길로 들어설 결의에 차 있다. 당기구의 구조와 기능을 새로운 조건에 합치시켜야 하고 당의 제반 연결고리의 활동을 재편해야 하며 보수주의와 교조주의를 극복해야 한다.

사회분야에서의 혁신과정은 훨씬 깊숙하고 견실하게 나타나고 있다. 넒은 의미에는 이는 인간의 이익과 그 표출이 다양한 형태로 교차하는 분야이다. 이는 관습, 서비스분야, 교육, 보건, 사회보장, 레저를 포괄한다. 다시말해 인간의 욕구충족을 목표로 하는 모든 사회개조의 총체이다.

 

사회혁신 통해 인류보편가치 추구

페레스트로이카는 민족간의 무수한 문제와 모순을 사회생활의 표면에 그야말로 까발려 놓았다. 그것들은 오늘에 와서 생긴 것이 아니다. 공식적으로는 ‘민족문제’가 해결되었다고 발표해놓고 민족적 기초를 탄압하던 때에 생성된 것이다. 현재의 민주주의와 글라슨노스트 상황에서는 그러한 갈등을 냉철하게 보아야 한다. 문제의 실상을 규명하지 않고 그걸 해결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자기민족의 주권과 경제와 문화를 지키려는 운동이 다른 민족에게 그리고 우리나라 전체에, 나아가 페레스트로이카에 손실을 주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마도 사회주의의 혁신을 주도하는 가장 획기적인 변화는 이념, 문화, 교육분야일 것이다. 페레스트로이카는 인간과 사회의 정신적 발전, 심리의 변화에 폭넓은 지평을 열어주고 잇다. 우리의 미래관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교사, 의사, 기사, 과학자 등 지식인 집단의 역할과 그들이 문화와 학문분야에서 행하는 활동이다. 과거 수십년 동안의 왜곡을 시정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지적 노동, 지식, 고도의 전문성에 대한 사회적 평가를 결정적으로 높여주는 것이 지극히 중요하다. 이렇듯 페레스트로이카 과정 속에서 우리가 다가가고 있는 사회주의는 효율적인 경제, 과학 · 기술 · 문화의 높은 성과, 사회생활의 모든 측면을 민주화하고 능동적 · 창조적 생활과 활동을 위한 조건을 형성하는 인간화된 사회구조에 기초한 것이다.

세계 공통의 문제들이 이제 인간생활에서 더욱 커다란 위치를 차지하기 시작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다양한 사회체제가 나름의 특성을 유지하면서도 평화, 안전, 자유, 자신의 운명결정권과 같은 인류보편적 가치의 범주내에서 발전하고 있다고 여겨도 좋을 근거를 부여하고 있다. 또한 사회주의 세계는, 나름의 가치와 장점을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들을 혁명적 페레스트로이카의 도상에 그리고 이성과 인도주의에 입각한 진정한 인간사회 건설의 도상에서 훨씬 더 발전시키고 향상시키면서, 전인류 공동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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